내가 일본에 가기 전인 1954~1955년쯤으로 기억된다. 여수 오동도 씨름대회에서였다. 키는 나보다 작지만 어깨가 떡 벌어진 몸매가 범상치 않게 보이는 한 사내가 눈에 띄였다. 그는 관중의 함성과 씨름꾼들의 투지에 넋을 빼앗긴 듯 보였는데 어딘지 모르게 내 마음에 와 닿았다.
그 대회에서 우승한 내게 달려와 심한 함경도 사투리로 씨름 좀 배우고 싶다고 했다. 당돌하고 저돌적인 그가 왠지 밉삽스럽지 않아 씨름 기술 몇 가지를 가르쳐 줬다.
그는 함경도 북청에서 피란 왔다는 김기수였다. 그는 운동이라면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승부 근성이 대단했다. `악바리`라고 불렸던 그는 나를 친형 이상으로 따랐다. 될 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안다고나 할까. 나는 그런 그가 언젠가 운동 선수로 대성할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1956년 10월 말 여수에서 사라지면서 그와 한동안 만나지 못했고 머릿속에서 점차 그의 얼굴도 사라져 갔다. 하지만 사람 인연이란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김기수를 일본에서 수 차례 만났다.
1957년 말이었다. 내가 역도산 제자로 막 입문한 후였다. 그때 역도산체육관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형님, 나 기수예요." 기수란 소리에 여수에서 씨름 잘했던 기수인지 누구인지 긴가민가했다. 그는 만사를 제쳐 놓고 역도산체육관으로 달려왔다.
내가 역도산 제자가 됐다는 소식을 한국에서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후 찾아온 것이었다. 한국서 김기수가 씨름은 물론이고 권투도 곧잘 한 것으로 알았던 나는 그때 그가 씨름이 아닌 권투 선수가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스승 역도산에게 김기수를 소개시켜 줬다. 스승은 김기수를 상당히 호의적으로 맞아 줬다. 왜냐하면 스승과 김기수의 고향이 같은 함경도였다. 늘 고향을 그리워했던 스승은 일본 땅에서 함경도 출신 후배를 만났으니 그 기쁨이 오죽했을까.
스승은 김기수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때 아마 스승은 용돈을 두둑하게 주면서 격려를 해 줬던 것으로 기억된다. 스승은 일본에서 한국말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기수를 만났을 때 한국말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본다. 일본어를 몰랐던 김기수가 스승의 말을 다 알아 듣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스승을 칭찬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렇다는 얘기다. 김기수와 1958년 5월 동경에서 한 번 더 만났다. 당시 동경에선 아시안게임이 열리고 있었다. 그는 이 대회에 웰터급 한국 대표로 출전, 금메달을 땄다. 스승은 김기수가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모른다.
김기수는 그후에도 일본에서 경기가 있을 때마다 나를 찾곤 했다. 그때는 나도 프로레슬링 선수로서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었을 때다. 돈도 좀 벌었다. 그래서 김기수에게 격려금도 줬다.
1966년 6월 25일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 매치에서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누르고 한국의 첫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이 된 그는 1997년 6월 운명을 달리했다. 인명은 재천이라지만 그가 그렇게 일찍 작고할 줄은 몰랐다. 그가 살아 있다면 지금쯤 나는 서로 과거의 추억을 얘기하면서 또 다른 노년의 우정을 나눴을지 모른다.
만약 내가 씨름을 하지 않았다면 김기수를 만날 수 있었을까. 씨름은 내 인생을 모두 바꿨다. 특히 간 크게도 내가 역도산 제자가 되기 위해 현해탄을 건넌 것도 씨름을 한 가닥 했기 때문이었다. 씨름은 나의 인생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운동이었다. 나는 태어나면서 씨름과 함께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본 경기가 씨름이었다.
사실 나의 프로레슬링 기술 밑거름은 씨름이었다. 나는 프로레슬링을 할 때면 상대에게 다리 걸기 기술을 곧잘 시도했는데 이 기술에 걸린 상대는 십중팔구 나자빠졌다.
타고난 내 씨름 실력은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 아버지는 힘이 세어서 다들 장사라 불렀다. 그런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힘이 셌다. 어른들도 나를 당하지 못했다. 학교 운동회 릴레이 때도 항상 선두였다. 동네 사람들은 내가 씨름과 운동을 잘하는 것에 대해 집안 내력이라고 추켜세우곤 했다.
넉넉한 인심을 지닌 아버지는 내가 씨름 대회에서 우승, 상금으로 소를 타면 동네 사람들에게 어김없이 잔치를 베풀었다. 소를 끌고 거금도에 도착하면 농악대가 앞에서 흥을 돋웠다. 동네 입구에는 `김일 씨름 우승`이라고 쓰여진 종이가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그때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를 씨름의 추억에서 깨운 것은 새벽녘 눈부신 햇살이었다. 선원들은 30여 분 뒤면 일본 시모노세키 항구에 도착한다고 알려 줬다. 시모노세키 항구가 눈앞에 펼쳐졌다. 선원들도 바삐 움직였다. 나는 큰 가방을 둘러멨다. 그리고 선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선원들은 "꼭 역도산 만나게"라고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 줬다. 배에서 내렸다.
정병철 기자
사진=이호형 기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