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10월. 가을밤에 부는 바람이 제법 차갑다. 차가운 바닷바람은 코끝을 때린다. 바람은 언제나 바다에서 불어와 자유롭게 육지를 핥고 지나간다. 제멋대로인 바람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이리저리 휘몰아친다.
부둣가에 선 채 황량한 바람을 맞으며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내가 바람이라면 저렇게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 것인데 ….`
부둣가 끝에 선 나는 이제 더 이상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바다가 육지인들 저 바다를 건널 수도 없었다. 한국과 일본이 국교가 수립되지 않아서다.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은 `밀항` 외 다른 길이 없었다. 여수항에서 일본 혼슈(本州) 야마구치현(山口縣)에 위치한 시모노세키항까지는 150여 마일(약 240여 ㎞) 떨어져 있다. 지금도 화물선 기준으로 12시간 이상이 걸리는 먼 뱃길인 그곳은 당시 뱃길로만 20시간 이상 가야 했다.
그 수백㎞를 오가는 선원들이 너무 부러웠다. `저 사람들은 (내가) 동경하는 영웅 역도산을 간접적으로나마 가까이서 볼 수 있겠지.` 그 부러움이 나를 휘감으면 그들에게 다가가 "이번에는 역도산 소식이 없소이까"라고 물었다. 그러면 그들은 또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내가 결코 내디딜 수 없는 땅이지만 나의 마음과 생각은 온통 그곳에 가 있었다. 역도산을 만나기 위한 사나리오를 짜야겠다는 생각도 그때부터 하기 시작했다. 그 시나리오의 첫 실행은 몰래 한국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즉, 밀항이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당시, 일본은 배고픔을 씻어줄 것 같은 `부러움의 땅`이었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는데도 대부분 한국인들은 배고픔이라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아 밀항을 단행했었다. 운 좋게 밀항에 성공해도 한국인 차별 대우에 시달려야 했고, 또 대부분 사람들은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현장에서 체포돼 수형 생활을 해야 했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 밀항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다. 오로지 역도산 제자가 되기 위한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내게 밀항은 `급하게 사느냐, 급하게 죽느냐` 둘 중 하나였다. 어차치 그런 모험을 하지 않고는 역도산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밀항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해 추석날 씨름대회에 출전, 소를 탔다. 그 소를 돈으로 바꿨다. 또 농.수산물을 팔면서 푼푼히 돈도 모았다. 지금 돈으로 따지면 200만여 원 정도 모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선 선원증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였다. 선원증이 필요했던 것은 일본 항구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이 국교 수립이 되지 않았지만 수산 교역자에 한해 일본 항구에 닿는 것은 허용됐다. 그것만 있으면 배를 탈 수 있고, 또 일본에 갈 수 있었다. 당시 밀항자들이 이런 수법을 통해 일본에 몰래 갔기 때문에 선원증 발급은 굉장히 까다로웠다. 나처럼 밀항 계획을 세웠던 사람들은 뒷돈을 준 후 발급받았다. 이도 연줄이 닿지 않으면 사실상 불가능했다.
아는 선원에게 선원증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불법인 줄 알면서도 내가 워낙 역도산을 만나고 싶어 하니 어쩔 수 없이 알선 역을 맡았다. 모았던 돈 중 일부를 뒷돈으로 건넸다. 며칠 후 마침내 선원증이 나왔다. 선원증을 받는 순간 내 마음은 벌써 일본에 가 있는 듯했다.
배를 타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워낙 많은 선원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배가 문제였다. 지금처럼 카페리호 같은 좋은 여객선이 아니었다. 태풍 불면 금방 산산조각 나는 큰 목선 같은 것이었다.
당시 현해탄을 건너다가 목숨을 잃는 것은 뉴스조차 되지 못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현해탄을 오가면서 죽었다. 유행가는 아니었지만 아낙네들의 입에서 현해탄을 건너다 죽은 사람들의 넋을 위로해 주는 노래를 듣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으면 갈 수 없었던 곳이 일본이었다. 선원들은 "죽을 각오가 돼 있으면 배를 타고, 그렇지 않으면 포기하라"며 다시 한 번 일본행 의사를 물었다. 나는 "이래 죽어도, 저래 죽어도 괜찮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 번 죽는 것이 아니냐"라며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의 밀항 의지가 워낙 강한 것을 확인한 선장은 "좋다. 내일 오전 8시까지 부둣가로 나오라"고 했다.
역도산 잡지를 품에서 꺼냈다. 이제야 만난다.
정병철 기자
사진=이호형 기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