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노세키항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뱃전에 선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고향인 전라남도 고흥에서의 어린 시절이 뭉개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나는 1929년 2월 4일(음력) 전남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 거금도에서 태어났다. 거금도는 우리나라 섬 가운데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큰 섬이다. 나는 김해 김 씨. 사군파다. 선조들이 언제 거금도에 정착했는지 알 수 없지만 거금도에는 1950년대 후반까지 약 800명이 살았다. 대부분 조상대대로 그곳이 삶의 보금자리였다. 김해 김 씨가 많아 거금도가 김해 김 씨 집성촌 가운데 한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 자. ‘수’ 자를 쓴 아버지는 6척 장신으로 나보다 컸으니 아마도 1m 90㎝는 넘었을 것 같다. 아버지는 힘이 장사셨다. 할아버지 영향을 받아서다. 할아버지도 기골이 장대했다. 조선시대 때 아마도 장수였던 것으로 안다.
아버지는 남을 돕기를 좋아하셨다. 그런 아버지를 보노라면 마치 남을 돕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았다. 동네 사람들은 힘들고 궂은 일이 있으면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버지는 몸이 아프셔도 싫은 티 한 번 내지 않고 내 일처럼 도와 주셨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고 싶었는지 어머니가 점을 보셨다. 그 점쟁이 왈. “아직까지 남편이 저승에 가지 못했다”라고 했다. “저 세상에 가는 도중 하도 담이 무너진 집이 많아 그 담을 고쳐 주느라 아직 저승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미신이 담긴 점 얘기지만 아버지는 남이 어려움을 겪으면 반드시 자기 일처럼 도와 주는 인자하고 너그러운 분이셨다.
난 그런 아버지에게도 밀항 사실을 숨겼지만 아버지는 눈치를 채신 듯했다. 내가 어디로 떠나갈 것으로 짐작했었는지 한 번은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평소 “밥 먹었냐” 이외 말 한마디 하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나를 집 근처 용두산 쪽으로 데리고가셨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내가 죽으면 이곳에 묻어 달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깜짝 놀란 내가 아버지에게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묻자 아버지는 “허허” 하실 뿐 더 이상 말하지 않으려 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밀항한 후부터 시름시름 앓다가 2년 뒤인 1958년 세상을 뜨셨다. 나는 그때 일본에 있었다.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못한 불효자식이다. 그것이 내게는 철천지한으로 남아 있다. 모진 세파 속을 헤치며 사셨던 아버지는 바로 그곳. 당신께서 말씀하시던 산자락에 묻혀 계신다.
여느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나의 어머니도 오직 자식 잘되기만을 기원했던 분이셨다. 어머니는 몸이 약했지만 참으로 곱고 예뻤다. 사람들이 나와 어머니를 비교할 때 빠뜨리지 않는 것이 있다. 머리다. 나는 어머니 머리를 쏙 빼닮았다. 물론 어머니는 ‘박치기’는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맨 위의 나를 비롯. 밑으로 딸 수란심과 아들 공식·광식의 3남 1녀를 뒀다. 공식은 2003년 위암으로 죽었다. 나와 짝꿍을 이뤄 태그매치를 벌이곤 했던 막내 동생 광식은 1995년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나는 항상 부모님 뜻대로 움직였다. 유교적 가르침이 살아 있는 마을에서 이렇게 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역도산을 알기 전까지는 가족을 위해 부모님에게 순종하며 산 농사꾼이었다.
부모님은 나를 일찍 장가 보냈다. 어차피 집안을 책임질 장남이었기에 일찍 장가가 자식을 낳고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열여섯 살때 장가갔다. 아내는 박금례였다. 나보다 세 살 위였다. 슬하에 2남 2녀를 뒀다. 딸이 큰애였으며. 지금은 경남 남해에 산다. 큰 사위는 스모 선수였다가 레슬링 선수가 됐다. 둘째 딸은 고흥 녹동항 인근에 산다. 또 장남은 미국에서 살다가 돌아와 지금은 경기도에서 산다. 막내는 1978년 3월 군 복무 중 죽었다.
착한 나의 아내는 제대로 호강 한 번 받지 못했다. 나는 아내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못난 아버지였다. 레슬링을 하면서 세계 각지와 전국을 돌아다니다 보니 남편은 물론 아비 노릇도 하지 못했다. 내가 밀항함으로써 가족에게 준 상처는 지금 나의 레슬링 후유증만큼이나 컸다. 가족을 생각하면 마치 송곳으로 내 마음을 찌르는 것 같다.
가족들이 또 한 번 나로 인해 애간장을 태운 사건이 있었다. 나는 1948년 말 죽음 앞에 서 있었다.
정병철 기자
사진=이호형 기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