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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 박치기왕 김일 [1]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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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내 나이 일흔여덟. 프로레슬러의 길에 들어선 지 어느덧 반 백년이 흘렀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우여곡절 많은 인생이었다. 세계챔피언이 되면서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곳까지도 올라가 봤다. 또 레슬링 후유증으로 쓰러지면서 끝 모를 듯한 바닥까지도 떨어져 보았다.

인생의 황혼녘에서 굳이 나의 레슬링 인생을 정리하려는 까닭은 한 가지다. 나의 삶이 결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매트 위를 뒹굴며 온몸을 던졌던 ‘사각의 링’은 일본으로 밀항한 후 겪었던 숱한 좌절과 애환. 그리고 박치기 하나로 세계 제패의 꿈을 이루기까지 내 삶의 궤적과 함께 나로 인해 울고 웃었던 팬들의 사연도 담겨져 있다. 오랜 세월이 흘러 희미한 부분. 잊혀진 대목도 있겠지만 땀과 눈물로 점철된 기억을 더듬어 늙은 손으로 펜을 잡는다. 어쩌면 나를 사랑한 우리 국민들에게 글로 바치는 처음이자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심정으로 ….

 

 

일본 오가는 선원이 건넨 잡지 속 역도산
강철 같은 근육-검은 타이즈에 휘둥그레...
씨름대회 우승, 농사꾼 인생 180도 바뀌어

 

1956년 10월경. 우리 나이로 스물 여덟. 그러니까 지금부터 꼭 50년 전이다. 나는 나를 일본으로 밀항시켰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그 무언가 거부할 수 없는 강한 힘에 이끌려서다. 나를 일본으로 끌어당긴 사람은 뒷날 나의 ‘영원한 사표’가 된. 다름 아닌 스승 역도산(1924~1963)이었다.

 

그것은 운명이자 숙명이었다. 물론 이미 세계 레슬링계에서 나름대로 입지를 쌓은 스승이 한반도의 남쪽 한 작은 섬에 사는 젊은이를 알 리가 만무했다. 당연히 내게 전령을 보내 “밀항하라”고 특명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나와 스승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오직 나만의 우상이었을 뿐이었다.


내가 ‘역도산’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전남 여수 부둣가 선원들에게서다. 그때가 1956년 3월쯤으로 기억된다. 당시 선원들은 일본을 수시로 오가면서 수산물 교역을 했었다. 일본 사정에 눈이 밝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선원들을 통해 처음 역도산 얘기를 들었지만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전설이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얘기로 들렸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맨주먹으로 때려눕히고. 주먹과 발로 때리고 차고. 꺾기를 한 후 던지는지 믿지 않았다. 나도 그런 레슬링 경기가 의아할 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래판 위가 아닌 사각이란 링에서 치고받는 경기를 한다는 것이 상상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서 텔레비전을 통해 그것을 본 선원들은 믿든 안 믿든 상관없었다. 그들은 호남 씨름 장사인 나만 보면 침을 튀기며 역도산이라는 존재를 알려 주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이 이 경우에 해당하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나는 여러 선원들로부터 똑같은 얘기를 수차례 반복해 들으면서 시나브로 역도산의 얘기를 신화가 아닌 사실로 받아들이게 됐다.

 

“역도산이 미국 선수를 당수로 눕히고 미국인의 얼굴에 피를 흘리게 했다”. “역도산이 미국인 선수의 경동맥을 손으로 누르면 상대가 역도산을 공포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얘기들을 하는 선원들은 역도산의 당수에 완전히 매료돼 있었다. 마치 자신들이 역도산이라도 된 듯한 표정과 모습이었다.


더욱 나를 흥분케 한 것은 역도산이 조선인이란 사실이었다. 조선인 역도산이 키 크고 덩치가 좋은 미국 사람들을 때려눕혔다는 얘기는 듣기만 해도 흥분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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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9월 추석을 앞두고 씨름대회에 출전해 우승, 부상으로 소를 받았다.

이 소를 돈으로 바꿔 일본 밀항 자금에 보탰다.

 

 

늘 상상 속에 머물던 역도산이 내게 나타난 것은 그해 여름쯤이었다. 선원 한 명이 잡지를 건네면서였다. 그 잡지에 실린 역도산을 보는 순간 나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잡지에서 본 그의 몸은 단단한 강철과 같은 근육을 연상시켰다. 터질 듯 탄력 넘치는 몸은 검은 타이츠에 힘입어 화려한 냄새까지 풍기고 있었다.
역도산의 검은 타이츠에 내 눈은 빨려들었다. 그것은 난생 처음 본 복장이었다. 신기했다. 역도산이 팔짱을 끼고 응시하는 특유의 모습도 잊을 수 없었다. 전신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흥분이 나를 억눌렀다. 천진난만하게 역도산을 떠올리면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밥을 먹지 않아도 절로 배가 불렀다. 마음은 풍선처럼 둥둥 떠올랐다.

 

게다가 그 잡지에는 보디슬램·해머 던지기·당수 등 씨름과는 관련없는 기술들을 구사하는 역도산의 화려한 플레이 사진이 여러 장 실려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도산은 절대로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듯한 모습이었다. 그 잡지를 보면 볼수록 묘한 기분이 나를 사로잡았다. 마치 어두운 내 마음을 비추는 등불처럼 다가왔다.
당시에 나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농촌에 살았던 내 또래 친구들도 다 그랬지만 키 크고 마른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먹고. 자고. 일하는 것뿐이었다. 장남인 나는 고향(전남 고흥 거금도)에서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아 그 수확품을 배에 싣고 가 여수 부둣가 시장에서 판 돈으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명절 때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씨름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씨름 대회에서 우승한 후 소 한 마리를 상품으로 받아 집에 오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너무나 좋아했었다. 그럴 때면 고향사람들은 부모에게 “장사 아들이 효도도 으뜸이다”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농사 짓고. 거둬들이고. 내다팔고. 또 씨름대회에 출전하고 …. 다람쥐 쳇바퀴같은 생활은 끝없이 이어졌다. 가난과 싸우며 헤쳐나온들 그 다음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또 헤쳐 가야 할 가난뿐이었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면 꿈이다. 하지만 나는 그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럴 때면 주머니 속에서 역도산 사진을 꺼내 보았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면 ‘희망의 성’을 쌓는 기분이었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발은 바다를 걷고 있었다. 바다로 나가면 눈은 저 현해탄을 향했다. 현해탄을 보면 마치 조건반사처럼 역도산이 떠올랐다. <계속>

 

 

■김일 프로필

 

▲학력 및 경력

▲1929년 2월 24일: 전남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 963번지 출생.
▲1943년 3월: 고흥 금산초등학교 14회 졸업.
▲1957년 10월 : 역도산체육관(동경) 문하생 1기로 입문.
▲1963년 12월 10일 : WWA 세계 헤비급 태그 챔피언 획득(로스엔젤레스).
▲1964년 4월 16일 : 노스아메리카 태그 챔피언(텍사스 아모레로).
▲1964년 5월 19일 : 록키마운틴 챔피언(텍사스).
▲1964년 8월 12일: 극동 챔피언(서울).
▲1664년 10월 16일: NWA 챔피언 도전권 리그전 승리(텍사스 시스톤).
▲1965년 8월 12일: 극동 헤비급 챔피언(연맹 공식 기록).
▲1966년 2월: 올아시아 태그 챔피언(동경).
▲1967년 4월 29일: WWA 제23대 헤비급 챔피언(연맹 공식 기록).
▲1968년 1월 9일: 올아시아 챔피언(서울).
▲1972년 6월: 인터내셔날 챔피언(동경).
▲1972년 12월: 인터내셔날 챔피언(동경).
▲1995년 4월 2일: 일본 도쿄돔에서 은퇴(일본 신문사 기자단 주최).
▲2000년 3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은퇴(문화관광부·체육진흥공단·대한체육회 후원).
▲포상 경력
▲1994년 4월 26일: 국민훈장 석류상 수상.
▲2000년 3월 24일: 체육훈장 맹호장 수상

 

 

※일간스포츠(1S)는 재창간을 맞아 스포츠·연예계에서 큰 자취를 남긴 명사들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나의 삶. 나의 도전>을 매주 4회(화·수·목·금요일자) 연재합니다. 본지는 그 첫 번째로 1960~70년대 세계 프로레슬링계를 풍미했던 ‘박치기왕’ 김일 씨를 선정했습니다. 남해의 외딴 섬에서 태어나 세계 정상에 섰다가 지금은 병마와 싸우고 있는 그의 좌절과 영광. 애환의 인생 드라마를 소개합니다. 연재는 김일 씨의 메모와 구술을 본지 기획취재팀 정병철 차장이 정리하고. 그의 인생 장면장면들이 담긴 모습들은 사진팀 이호형 차장이 취재·연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정병철 기자
사진=이호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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