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절에 쇠머리를 가면서 진몰선창을 지나는데 만조가 되어 선창의 윗부분만 조금 보이며 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어렸을 땐 그렇게도 크고 위풍당당했던 우리의 관문이었던 선창이 이렇게도 작았단 말인가! 새삼
세월의 뒤안길에 묻혀버린 추억이 아스라히 떠오르니 그게 바로 진몰선창!
진몰선창!
그 곳은 우리 쇠머리 사람에게는 육지와 연결하는 유일한 길목이었으며 바닷 일 나갔다가 돌아온 배를 쉬게 하는
방파제였다. 아침이면 저마다의 사람들이 각자의 일로 육지엘 가기 위하여 모여드는 만남의 장소였으며, 또한 배
가 도착할 시간이면 오마지 않은 이를 기다리는 막연한 기다림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내가(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처음으로 육지인 녹동을 가기 위하여 출발했던 곳도 거기일 것이고, 1966년
(초등학교 5학년 시절)에 설레이는 마음으로 누나와 형이 유학하고 있는 꿈의 도시 광주엘 갈 때 배를 탔던 곳도
거기일 것이다.
우리 진몰선창은 (당시의 모든 선창이 그러했듯이) 여객선이 직접 접안을 할 수 없어 종선(본선과 선창을 연결하
는 작은 배)을 띄어 사람을 오르내리게 했다. 그 종선배를 운행했던 사람은 본선의 승선권을 판매하였고 해운회
사로부터 일정 금액의 판매수수료를 받았던 것이다.
나의 기억으로는 그러한 종선배를 운영했던 사람의 1호가 서기일(서수옥과 서영호의 아버지)씨.
제 2호가 재호 대부님의 사위였던 김형식씨
제 3호가 김기풍씨
제 4호가 김광용씨
제 5호가 김기봉씨로 이어져 오다 이제는 없어지지 않았나 싶은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기억에 의한 것임을
밝히며 틀린 부분이 발견되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광주에서 학교엘 다녔던 우리는 1년에 두 번씩 방학이 되면 고향엘 온다.
형과 누나는 보성의 예당으로 가서 수문에서 평화호를 타고 녹동을 경유하여 쇠머리로 오곤 했다고 하지만 나는 녹동까지는 급행뻐스로 그리고 대창호를 타고 쇠머리에 온 기억밖에 없다. 2시에 녹동을 출발한 배가 소록도 앞을 지나 신촌의 종선에 사람을 내려주고 조금 더 가다가 배천 끝을 막 돌아가면서 힘차게 뱃고동을 울린다.
뿌우웅, 부우웅!
배가 다 왔으니 종선을 준비하라는 신호이다. 그 뱃고동 소리와 함께 배가 왼쪽으로 돌면 맞도(연홍도)가 제일 먼저 반기고 배천마을이 보이며 이제 꿈에도 그리던 쇠머리의 진몰선창이 반긴다. 배천의 종선, 신양의 종선, 연홍의 종선을 차례로 쇠머리의 종선이 닿는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그나마 다행인데 폭풍우라도 몰아치는 날이면 그 종선이 선창까지 무사히 닿을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방학이 끝나면 우리는 또 어김없이 진몰선창에서 종선을 타고 본선인 대창호에 오른다. 부모님은 선창 끝에서 우리를 배웅하신다. 사람과 짐을 다 실어준 종선은 본선을 힘차게 밀어내고 선창으로 향한다. 배가 배천 끝을 돌아설 때까지 우리의 부모님은 거기에 서 계시곤 하셨다.
겨울이면 우리네 아버지들은 김 한 상자씩을 지게에 지고 진몰선창으로 나와 대창호를 타고 녹동에로 나가신다.
김을 팔아 우리가 먹을 쌀을 비롯한 양식과 생필품을 사 오신다. 그 중에는 꿀꿀거리는 돼지 새끼와 꼬꼬댁거리
는 달구새끼도 있었고 해우할 때 사용하는 조락, 등게미 등이 있었으며 또한 설이 가까워지면 멋있고 따듯한 잠
바와 양말도 한컬레씩 들어 있곤 하였다.
시계가 귀했던 그 시절에 우리는 마을 앞을 지나가는 배로 인하여 시간을 알 수 있었다.
평화호(후에 대창호, 승진호로 바뀌어 갔음)가 금당도를 출발하여 우리 진몰선창에 도착하면 아침 8시.
이 시간이면 새벽일 나간 사람들이 아침을 먹기 위하여 집으로 돌아오고.
우리에게 여수라는 육지에의 꿈을 심어준 여수배인 유명호가 쇠머리 앞 바다를 지가가면 그 때는 오전 11시.
들일을 나간 사람들은 어김없이 새 참을 먹는 시간이고 우리 오후반 학생들은 책보를 등에 메고 학교엘 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녹동에서 출발한 평화호가 진몰선창에 도착하면 오후 3시.
우린 그렇게 날마다 마을 앞을 지나는 지나는 여수배와 평화호(대창호) 등을 보며 육지를 동경하며 하루를 보냈고
꿈을 키워왔던 것이다.
이제 교통의 발달로 인하여 만남과 이별이 있었고 기다림과 꿈이 있었던 진몰선창은 제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여
옛 모습을 잃고 저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변했으나 제일 마지막으로 종선배를 운영하였던 김기봉씨가 그곳에 집을
짓고 생활하고 계시기에 우리에게 옛 추억의 단초나마 제공해 주고 있다.
진몰선창에서 낚아 올린 문저리의 맛이 고소할 어느 가을 날의 오후에 선창바닥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지나가는 사람은 다 불러 한 잔씩 권하고 싶다.
무엇일까?
밤새 가슴앓이를 하다가 생각해 냈으니.... 그래. 봉수녀석!
유신을 반대하다가 쫒겨 나를 찾아 금산까지 온 친구녀석하고
진몰선창에서 문저리를 낚았고 늦가을의 햇살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셨지.
몇일을 이렇게 보내다가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광주로 간 녀석이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연락이 온 날이 이듬해 봄이었던가.
봉수야.
항상 너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깜박 잊었다. 미안하다.
그리고,
종선배를 운영했던 사람에는 김수학님도 포함해야 될 것 같은데
좀 야리꾸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