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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20 23:08

겨울. 동백향기

조회 수 3868 추천 수 0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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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이 글은 우연하게 알게된 글입니다.  
   하도 가슴이 뭉클하여 여기 올려드립니다. 
 나의 고향 거금도, 금산의 40여년 전의 일이라 생각되어지네요만  잘은 모르겠네요.
  그리고, 시드니에 있는  나의 친구 정성수를 생각하면서 이글을 같이 읽어 봅니다.
  성수야! 나는 윤숙이다 엄청 무척이나 보고싶고,
  그리고 그립구나..................

   이 글은 너무나도 긴  장문입니다.   단편 소설이라고 생각하시고 읽으시고 그 감상을 달아주세요

    
     <겨울, 동백 향기>
                                                           

  순구 녀석을 호주 시드니에서 만난 것은 너무 의외였었다. 국내도 아닌 지구 남반부의 시드니 시가지의
호텔 로비  라니......예상치 않은 시간이나 장소에서 엉뚱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순구를
만난 건 뜻밖의   일이었다.

그리고 순간, 가슴 깊은 곳을 후비며 달려가는 바닷바람 소리 속에서 젊음의 편린 한조각이 칼날처럼
시퍼렇게 날을 세우며 세월의 깊은 창고를 부수며 튕겨 오르는 것을 느꼈다.   순지. 그 섬 학교의 교사 시절
제자였던 순구 누이의 이름이 순지였다.

세월의 부피 속에 이미 묻혀 버린 것으로 알았던 그 여자가 전혀 나이조차 먹지 않고, 동백 꽃 냄새 속에
쌓여 내 안쪽에 머물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나는 그간 해본 적이 없었다.

호텔에 들어와 막 샤워를 끝낸 뒤였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내가 가지고 간 팩 소주가 여유가 있는지 궁금해진 동료 중의 누구려니 그렇게
수화기를 들었다. 그런데 수화기 저쪽에서, 민승호 선....생님이 맞으신가요?...제...제..가요...저 10여
년 전에요...예..............예..생각 나실랑가 모르것습니다........금산서요..........선생님이 납부금 내 주신...
저...정순구만요......

그 혀 짧은 음성 속에서 나는 곧바로 바닷 냄새를, 정확하게는 마른 김에서 풍겨 나오는 해초 냄새를
반사적으로 맡고 있었다.

"정순구?...... 앞짱구, 뒷짱구?"

"예....민 선생님이 맞....맞....맞으시구만요. "

"어떻게 여기로 다 전화를? 그리고 어딘가 지금?"

"여기 ... 로... 로..로비 호텔 로비구만요."

"호텔이라고? 여기 시드니?"

나는 녀석이 서울에라도 갔다가 우리 집에 전화를 했고, 거기서 내 여행 스케줄을 확인해서 이곳 호텔
전화를 가르쳐 주었거니 했다.

"고..공항으로 ..나갈..갈라고 했는디...시간을 잘 몰라서요....제가 닷새 전에 선생님 여그 오신다는
소..소식을 알아 갖고...."

"참 엉뚱하다...좌우간 내가 로비로 내려 갈께."

12층에서 로비까지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의 음성을 듣는 순간 내게 거의 반사적으로 떠올라 왔던
바다 냄새 속에서 정순구 그만이 아니라 그의 누이, 순지가 앞서 내 기억의 창고를 뛰쳐나왔음을 느꼈다.

처음 갯내음을 강렬하게 느꼈던 작은 여객선이 닿았던 곳의 포구 이름이 금진이었나.....그리고 전화
속에서 더뜸거리는 그의 음성에서 앞짱구, 뒷짱구의 가난했던 섬 아이만이 아니라, 그의 누나 역시
제 남동생처럼 한쪽에 깊은 볼 우물이 파였었던 것을 떠 올렸던 것이다.

"선생님....저..순구......구만요."

엘리베이터 앞쪽에 서 있던 청년이 주르륵 내 앞으로 다가 왔다.

동양계의 청년이 그 한 사람 뿐이었으므로 그가 정순구일거라고 짐작을 했을 뿐 전혀 낯선 청년 하나가
내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아 쥐었다.

"전혀 몰라보겠다. 이마도 다 들어가 버렸는데....."

"선..선생님은 안 변하셨구만요.....못 알아 뵈면 어쩔가 걱정이 태산이었는디 금방 알 것구만요."

로비 왼쪽에 붙어 있는 작은 바아로 자리를 옮겨 마주 보고 앉았을 때야 나는 청년의 왼쪽 볼에 깊이
파이는 볼우물을 보았고 동시에 그에게서 겨울 바람 묻은 해초 냄새를 맡았다. 호주로 이민 온 것이
5년째라고 했다.

"여그 신문에서....예...교포 신문이 나오구만요....한국에서 문인들이 여그로....세미나하러 오신다고.
...예...혹시나 하고....예...선생님 성함이 나와 있어서.....지가 그만.."

건강하게 자란 청년의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 목이 메고 있었다.

" 다 큰 청년도 우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가슴속으로 뜨거운 덩어리로 치밀어 올라와 얼른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잘... 잘 살았구만요...장가도 갔습니다요....예....꼭 선생님이....주례 해 주셨으면 그 생각은 ...예..예...
작년에 여그서 참한 색시 만나서요.....공업학교에 가서 목공일을 배와 갖고....여그서도 인자 먹고
살만하고요 ...그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나서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며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까까머리였던 까만 섬 소년의 얼굴이 청년의 모습 속에서 부옇게 떠 올라 오고 있었다.....그래,
나도 거금도 떠나오고 한 3년 학교에 더 있었나......출판 쪽 일하고, 글쓰고, 그리고 이렇게 나이
먹어 버렸다......한번쯤 그 섬에 가 보고 싶다, 그 생각 많이 했는데 이상하게 그게 쉽지 않더라....
하기야 거길 갔어도 넌 못 만났겠구나.....가끔 그곳 많이 생각했다....

일요일 날 공기총 가지고 나가서, 꿩 잡아서 구워 먹던 생각도 나고....참, 자네들 서넛하고 어디지?
거기....산비둘기 많이 잡았던 동네....예..거그가요. 홍룡이었구만요....둘은 10여 년 전 시간으로
되돌아간 듯 세월의 껍질 속에 깊이 묻혀 버린 기억들을 아슴하게 꺼내면서 매섭게 불어오던 겨울
바람과 거기 김 양식장, 김 건조 공장들을 같이 떠 올렸다.

순간 알싸하게 코끝에 슬픔으로 와 닿던 동백꽃 향기를 기억해 냈다.

연 사흘간 무단 결석. 정순구.

나는 그날 첫 부임지였던 그곳 섬 학교의 작은 교무실 창 틈으로 밀려드는 바다 냄새를 맡으며 출석부를
덮었었다. 개교 2년째인 거금도의 신설 중학교는 그때 학생이라야 모두 다섯 반. 200명이 채 안되었다.
곧바로 진학한 학생만 있는 게 아니고 나이가 스무 살 전후 학생까지 섞여 있었고 그때 2학년이었던
순구 역시 나이 많은 중학생에 속해 있었다.

등록금 기한을 넘긴 학생이 내가 맡았던 반에 두 명이 남아 있었다. 이일남이라는 학생은 벌써 보름
전에 돈벌이를 나간다고 배를 타고 섬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날 오후 코피라도 쏟을 것 같이 강렬하게 와 닿는 동백향을 진하게 맡았었다.

섬의 여러 군데에 동백의 군락지가 있었고, 그 매끄러운 잎 사이에서 피어난 동백꽃들을 섬에 온 후
자주 보아 오면서도 그 동백꽃 향기가 그토록 강렬하게 뇌리에 남으리라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었다...

지, 이름 쓰고, 펜지 부칠지 알먼 되제, 공부는 더 해서 뭣한다요? 거 공부 더 한다고 쌀 나오고,
옷 나온단 소리 나, 못 들었구만이라. 여그까지 와 주신 건 감사하요만 우리 일냄이는 육지서 오란디가
있어 돈 벌러 벌써 갔구만이라...원래 송충이는 솔잎을 묵어야제.... 뽕나무, 참나무, 기웃거리먼 반병신
되기 딱 조흔 거 아니것소?.....일남이의 아버지는 그때 뚫어진 그물코를 꿰매면서 한 번도 내게 시선을
주지 않고 자기 할 말만을 했다.

우람한 해송들이 억센 바다 바람을 막고 있는 부두를 지나, 돌담 이곳 저곳이 무너져 내린 순구네 집
앞에 섰을 때 나는 돌담 한 구석에서 오래 묵은 한 그루의 동백나무와 거기 수백 송이의 빨간 동백꽃을
보았던 것이다.

가까운 김 건조장에 일을 나갔던 그의 누이가 이마에 송송 작은 땀방울을 달고 뛰어 와 거기 동백나무
곁에 그때 막 도착하고 있었다.

"누..누이....누이..는..... 말을 모...못 하구만이라...."

고개를 푹 숙인 순구가 눈둘 곳을 몰라 발부리로 흙을 후비며 제 발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작은
소리로 더뜸거렸다. 나는 순구가 부모 없이 누이하고 생활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누이가 농아라는
사실은 그때 처음 알았었다.

설명할 길 없이 가슴이 짓눌려 왔다.

나는 시선을 마주 하지 못하고 바다 한쪽에 촘촘하게 박힌 김 양식장의 바닷말 쪽으로 눈을 보내 버렸다.

"....아무 생각 말고 학교 나와라. 선생님이 다 알아서 할테니까...너 약속 할거지?"

".............."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속 상하겠지만 앞으로 인생은 훨씬 긴 거야. 알았지? 자. 약속한다. 그럼."

내가 순구의 어깨를 두드리는 동안 설풋 고개를 들어 나를 건너다 본 그의 누이의 두 눈이 젖고 있었다.

"순구 학교 일은 내게 맡겨 두세요.....그리고 ....이렇게 열심히 사는 거 보니까 좋네요. 자. 그럼."

"............."

그녀가 한발을 내 쪽으로 내밀었을 때 동백꽃 두어 송이가 후드득 그녀 발 밑에 떨어져 내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까지 전혀 못 느끼고 있었던 동백꽃 향기가 왜 그 순간 어지럽게 코 속으로
파고들었는지. 그녀 한쪽 볼에만 깊이 파인 볼 우물과 동백꽃 내음. 그것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겨울이 되고 바다를 생각할 때면 어김없이 내게 다시 살아나곤 했다.


나는 그 섬을 떠날 때까지 순구 보다 세살 위라는 그의 누이, 순지를 두 번 더 보았다. 그런데도
그녀를 만나고 돌아온 날부터 섬을 떠날 때까지 나는 그녀의 볼우물과 햇빛에 그을린 그녀 까맣던
살빛을 늘 가까이 느끼며 지냈다.

그의 누이는 순구 편에 내게 있는 시집과 소설책을 서너 번 빌려 갔고, 아주 예쁜 글씨로, 잘 읽었어요
. 고맙습니다. 식의 작은 쪽지 편지를 빌려간 책 속에 끼워 놓긴 했지만 그녀를 직접 만날 기회는
일부러 만들지를 않았었다......순..순지 누이...말은 모...못해도 어렸을 때 혼자....글..글 읽고 ...쓰.
.쓰고...누이가 불쌍하구만요...순구는 제 누이를 화제에 올릴 때는 언제고 눈빛이 흐려졌다.

어머니도 벙어리였다고 했다. 그래서 아주 어렸던 한때는 여자들은 원래 벙어리려니,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작은 통통선으로 새벽이면 매일 어머니는 아버지와 고기잡이를 나갔고,
누이가 집안 살림을 꾸려 가서 언제까지고 그런 식의 생활은 변화 없이 계속되려니 그렇게 생각
했다는 것이다.

어느 날 좀 멀리로 새벽 출어를 나간 부모가 파도에 휩쓸려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되었을 때, 누이는
김 가공 공장, 미역 가공 공장으로 새벽 출근을 시작했고, 누나가 하던 일들이그의 몫이 되었다는 것이다.

20대 후반. 인생을 감상으로 파악하던 내게 순구 네가 처한 불행은 내게도 여러 날을 불면으로
몰아 갔었다. 삶이란 건 처음부터 운명 같은 것이 주어져 있는 것일까. 먼 전생의 인연이라는 것이
현재의 삶 속에 투영되어 현재적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삶은 그대로 진행되는 것인가. 거금도에서
지낸 1년 동안 나는 순구 네의 생활을 잊은 적이 없었다.


순구 녀석의 4분기 등록금을 대신 내 주고, 며칠이 지난 후 혼자 늦게 퇴근하던 교문 앞 골목길에서
그녀를 만난 것이 첫 번째의 만남이었다.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저녁 해가 막 지고 있었다. 서쪽 하늘이 발갛게 물들어 가고 있었는데 그녀는 옆얼굴 가득
그 저녁 노을을 받으면서 눈을 내리뜬 채, 내 앞에 신문지로 싼 작은 꾸러미 하나를 내밀었다.
너무 뜻밖이어서 우물거리고 있는 내 손에 그 꾸러미를 들이밀며 그녀는 한쪽 볼에 깊은 보조개를
만들었다.

그 눈이 잠시 내 눈을 보았다.....고맙습니다. 동생하고 저, 선생님 안 잊을 거예요. 김이에요.
제가 직접 말렸어요. 작은 거지만 제 정성이에요.....눈망울이 조금씩 움직이면서 하는 소리를
나는 그때 확실히 들었었다.

"잘 먹겠습니다. 아무쪼록 잘 지내세요. 필요하면 책은 언제든지 순구 편에 빌려 가구요."

그녀 볼우물이 더 깊이 파이면서 얼굴 위로 번졌던 저녁 노을의 색깔도 훨씬 짙어졌다. 그 저녁
노을의 붉은 빛이 내 가슴 한쪽을 적셔 가고 있는 것을 나는 그녀 순지가 내 곁을 떠난 뒤에야
알아냈다.

 

그리고 학년이 바뀌어 섬을 떠나게 된 날 육지로 나가는 배를 기다리던 금진 나루터에서 나는
두 사람을 다시 만났다.

생각하면 짧은 1년일 수도 있었지만 막상 섬을 떠난다는 생각이 이상하게도 사람을 감상스럽게
해서 나는 그날 새벽 일찍 하숙집을 떠나 부두로 나와 버렸었다.

담임을 맡았던 아이들을 만나면 마을 버스가 없던 그 시절, 몇 녀석인가는 틀림없이 4km가
넘는 길을 나를 배웅한다고 따라 나올 것이고 내가 탄 배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마 부두에
서서 손을 흔들 것이다.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교사로서의 첫 체험에 그런 무거운 이별의 의식이
기억 속에 각인된다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방파제의 바위 돌 위에 앉아 매서운 겨울 바람 속에서 해가 떠올라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1년을 소중하게 되새김질했다. 꼭 1년 전 이 부두에 내렸다가 들렸던
대포집에서 만났던 청허(靑虛)스님. 그와 주거니 받거니 마셨던 막걸리 잔과 같이 걸었던 밤 길.
.....헤어지면서야 송광암을 찾아가는 스님이라고 신분을 밝히는 바람에 내가 당황해 하자...
.중이라고 꼭 삭발하고, 심산에만 박혀 있는 건 아닙니다..............................................

부처가 꼭 대웅전에만 앉아 있는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지요....머리가 짧기는 했지만 같은
배에 동승했던 사복차림의 중년 남자,스스럼없이 왕대포 잔으로 막걸리를 들이키던 그 스님의
법명을 안 것도 훗날 송광암 주지스님에게서였다....도력 높은 학승이지요....본인은 스스로 땡초라고
낯추지만 도량에서는 알만한 분은 아는 분이지요.

거칠 것이 없이 마음대로 떠돈다 하여 스스로는풍허(風虛)라 불렸으면 그런 말씀도 하시는 걸
들었습니다....금산에서 지내는 동안 꼭 다시 한번 그 청허 스님을 만나 술잔을 기우려 보았으면
했는데 청허 스님과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일요일 날 아이들과 공기총을 가지고 꿩을 잡으러 갔다가 학생 집에서 대접받은 생 김회의 맛.
갓 뜯어 온 김을 초고추장에 버무려 먹었던 그 독특한 미각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아무래도 그 첫 부임지의 1년에서 가장 깊이 가슴에 남은 건 순구와 그의 벙어리 누이, 순지에
대한 연민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빌려간 책갈피에 자기도 꼭 시를 써 보았으면 하는 게 꿈이라고
적어 보냈었다.

시를 쓰면 어떤 현실에서도 꿈을 꿀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글을 쓰는 건 영혼의 자유라고,
현재의 모든 고뇌에서 꿈을 꾸는 그 자유는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자기의것이라고 ...... 그렇게 내가
쪽지를 써 보냈었지 싶다. 객관적인 평가 보다, 자기 구원의 차원이  문학에서는 더 중요하게 생각된다고...
그런 식의 쪽지를 내가 앞서 쓴적도 있었다.

해가 적대봉 등성이를 천천히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때 나는 길모퉁이를 헐떡이며 뛰어 달려오는 한 소년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뒤이어 그의
누이가 땀방울로 해서 머리칼 몇 올을 이마에 붙이고, 막 떠오르는 아침 햇빛에 양쪽 볼이 발갛게
익은 채 숨을 몰아 쉬며 그의 뒤를 따라 오

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선......선생님...."

"너.... 순구...."

녀석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고개를 꺾었다. 녀석이 쿨적거리는 동안 순지의 눈 안에도
물기가 스며 있는 것이 보였다.

"뭐 하러 여기 까지 와? 늬들하고 헤어지기 겁나서 새벽에 나온 건데..."

나는 둘을 데리고 섬에 첫발을 딛었을 때 들렸던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일찍 미안합니다만 우리 국밥 한 그릇씩 먹게 해주실래요?....꼭 1년 전에 여기 들려 도력
높은 스님하고 곡차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만..."

"장사하는 사람이 지금이 머 일찍이다요? 해가 한참이나 올라 왔구만. 쪼깨만 기라디리시요.
내 얼릉 국 데와 가지고 밥 디릴테니께...."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는 하품을 해가면서 양은솥을 연탄 화덕 위에 올려 놓았다. 우리...
선...선생님이...전...전근 가시구만이라...순구 녀석이 다시 쿨적거리며 손등으로 눈을 훔쳤다..
...왓다. 우리 학상이 선상님한테 정이 많이 들어븐 모양이네......꽃은 피먼 시들고, 사람은 만나면
이별인 것이 세상 이친께....훌륭한 사람 되야서 선상님 다시 만나먼 되제....안 그라요? 선상님.?...
.그러문요. 그러구 말구요.

"순구, 너, 이겨야 된다.....가끔 편지하고....순지씨도 용기 잃지 마시구요. 열심히 일기 쓰고,
시도 써 보고....나도 열심히 소설 쓰고 두 사람 안 잊을테니까."

나는 웅얼거리면서도 순지 그녀의 이제 창백하게 변한 얼굴빛 때문에 고개를 외면했다.


세 사람 다 밥을 먹은 듯 만 듯, 그렇게 상을 물리고 곧바로 식당을 나왔다. 뱃고동이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보따리를 머리에 인 아낙네 둘이 배를 내려 방파제 위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자. 이제 헤어지자. ...힘들더라도 꼭 중학교 마쳐야 한다. 나도 너희들 못 잊을거다."

순구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돌아서다가 고개를 돌린 내 시선에 순지의 까만 눈이 맞 부딪쳤다.
순지씨도 열심히 사세요. 용기 잃지 말고....그녀 눈 가장자리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면서
나는 이상하게 알싸한 동백꽃 향기를 다시 맡고 있었다. 억지로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는 두
사람의 얼굴에서 나는 각각 한 개씩의 깊은 볼우물을 발견하면서 내 눈이 흐려가는 걸 느꼈다.


아, 그라고 선생님 떠나가신 후에....나 중학 졸업하고....공업학교 방학 때 그 스님 본적이 있구만이라
...금진서 버스를 같이 타고 갔는디요. 선생님 떠나시고 한 1, 2년후 부터 버스가 생겼구만요....
.이상하게....딱 그 스님이다 싶어서....예...그때는 승복을 입었응게 스님인지 알았제라 ....
그래서 선생님 이야기를 했구만이라.... 한참 있다가 나무관세음보살.....인연이란 원래가 피해갈
수 없는 것일세....그러시더만이요......순구는 무려 10여 년에 걸쳐 일어난 일들을 한꺼번에
마구 쏟아 내 놓았다. 마지막으로 제 사는 캠시 지구에는 한국인들이 많이 사니까 그곳에 가서
한국 음식을 먹는 게 어쩌느냐고 청해 왔다.

고맙기는 했지만 내일 오전의 공식 일정으로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세미나와 시드니 대학 한국학과
방문에 따른 준비들이 있어서 그를 그냥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내일 오후 시간이 어쩔지 모르겠다. 페트릭 화이트라고 이곳 출신 노벨 문학상 작가가 있었거든.
물론 죽었지만 그의 생전 살던 집이 여기 시내에 있는게 확실한데 별로 아는 사람이 없어.
혹시 괜찮으면 좀 알아두었다가 내일 오후 시간 내어서 같이 잠깐 갔다 왔으면 싶다."


그가 헤어지기 싫어 쭈빗거리는 것을 돌려보내면서 맨 처음 누이의 안부부터 묻고 싶었는데도
한마디도 누이에 대한 화제를 꺼내지 못한 자신의 위선이 이상하게 캥겨 왔다.

나는 그날 밤 룸메이트였던 K 시인과 밤늦게까지 소주를 마셨다. 습관처럼 나는 해외 여행 때면
종이 팩에 담긴 한국산 소주를 챙겨 간다. 이상하게도 외국에서 마시는 소주 맛은 색다르다.
일상 속에 뒤섞여, 잊고 있었던 삶의 궤적들이 맑은 소주 속에서 투명하게 정리되곤 하는
기분이 되기 때문이다

K형은 전혀 입으로 말하지 않고도 의사 소통이 눈빛 하나로 교환되는 거....이해하지요?
그래요. 시인들이 소설 쓰는 사람들보다는 더 민감하고 순수하니까 동의하실게요.............
왜 10년이고, 15년이고 그런 산술적 시간과는 상관없이 옛날 일들이, 그 시간들이 압축되고,
무화되면서 바로 어제 일 같이, 지금 겪은 것 같이 느껴지는 것.....K시인. 또 이런 것도 있지 않우?

꽃향기 같은 거 전혀 못 느끼다가 어느 순간 강렬한 향기에 놀라는 것.......전혀 아무 것도 아닌
줄 알았던 이성간의 감정이 세월이 흐른 뒤에야 사랑이었다고 후다닥 깨닫게 되는 그런 것.....
그래요. 꽃이 없는데도 10년 전에 맡았던 꽃향기가 갑자기 콧속을 휘도는 것........민형이요. 보소.

내 암만 생각해도 여기서는 민형이 시를 써야하는 기라......우리가 지금 이상한 곳에 와 있는기거든
....거, 뉴질렌드의 키위새 부터도 문제가 있는 기라. 안 그러나?...새는 날개가 있어야 새인긴데
지가 어쩌자고 날개도 없이 새 노릇을 해야하는긴지......그래서 지금 민형도 좀 이상해진기라...
.갑자기 생각한 건데 사람은 말예요. 누구든지 제 마음속에 섬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현실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사랑도 하나씩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그런 생각......현실적이건
추상적이건 누구나 다.....잊고 있다가 나도 섬이 있었구나....................................................

나도 사랑이 있었구나 그런 깨달음이 소주를 마시다 보면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지요.
그래서 난 이놈의 소주를 가방에다   챙겨 가지고 다녀야 하고 ....섬의 모습을 보려구...

그때 7월. 호주는 한 겨울이었지만 우리 나라 겨울처럼 차고 매서운 추위 같은 건 없었다.

센터니얼 파크의 잔디들은 여전히 푸른빛을 띄고 있었고, 1973년 노벨상 수상 작가인 페트릭
화이트가 동성 연애관계에 있던 멜로니와 만년을 살았던 번지 표시 10의 정원 고목들도 잎을
달고 있었다.

노인이 된 멜로니가 손을 내저으며 집안을 보여주기를 거부해서 우리 일행은 그집 대문 앞에서
몇 컷의 기념 촬영밖에 할 수가 없었다.

해외문학 심포지움이 시드니에서 열리게 되었을 때 나는 이왕이면 노벨상 수상 작가의 생전
집필하던 서재에 들어가 봐야겠다고 별렀었다.

그런데도 노벨상을 수상한 페트릭 화이트의 대표적 소설 <인간의 나무(The Tree of Man)>는
이곳 호주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데도 그가 살았던 집은 이곳 문화계 사람들에게도
무심하게 잊혀져 있어서 우리를 안내한  순구군도 이 집을 찾는데 애를 먹었었다.

이 노벨 문학 수상자가 젊은 시절 만났던 그리스 사관생도 출신, 멜로니와 일생을 동성연애자로
살았던 것이 일반 시민과 그의 거리를 넓혀 놓은 것인지도 몰랐다.

"주정뱅이로 일생을 살다간 헨리 로우손의 초상은 저희들 10달러 짜리 지폐에도 새겨져 있는데
노벨상을 탄 페트릭 화이트는 그가 살았던 집을 알고 있는 시민도 거의 없는게 신기하지 않나?"

호주에 이민 온지 5년이 넘는다는 순구 역시 우리 일행 때문에 화이트라는 인물이 호주 출신의
노벨상 작가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했다.

"다른 나라 같았으문 노벨상 작가가 살았던 집이라카먼 관광 코스일낀데 이 친구 괜스레 호주에
와서 산 거 아이가?"

K시인이 시멘트 계단에 털썩 앉아 담배를 태워 물며 중얼거렸다.

"모든 게 여긴 뭐든지 반대인기라.... 7월 달이 겨울인 거 까지는 좋다, 이거야. 그런데 이게
뭐꼬? 이게 ...겨울 날 맞나? 귓바퀴가 쌩쌩...종종 걸음이 쳐져야 그게 겨울인 거라. 지금 좀
웃기는 공간에 와 있는 거라고. 우리 민형 헤까닥 해진 것 도 다 이유가 있는 기라고"

K시인이 습관처럼 안경태를 밀어 올리며 고개를 갸웃둥거렸다.

"그라고 마, 호모에다 레스비안이 이 나라만큼은 제 맘대로 아니가? 우째 불쌍한 노벨상 탄
문인만 괄시를 하나 그 말이다. 어째 내 말 맞제?"

순구군이 제 손목 시계에 힐금 시선을 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그의 등을 밀었다. ......페트릭
화이트네 집도 찾았고, 오후엔 공식 행사도 있고 말야. 이제 신경 안 써도 돼. 오늘 저녁이나
내일 저녁 때 호텔에서 보던지....자꾸 쭈빗거리며 움직이지 않으려는 옛 제자를 보내고 K시인이
앉았던 돌계단에 나도 나란히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난 마, 여기 와서 캥가루 안 있나? 그걸 잡아서 꼬리 곰탕 장사를 하면 괜찮겠지 싶더만도..
...너무 숫자가 많아져서 정부에서 일부 도살 계획을 세웠다 안 하드나?"

"코알라도 잡아서 통조림 만들고?"

"내, 들었는데 코알라는 독이 있다 안카나? 그렇지 않았으먼 그 느림뱅이가 살아 남았갔나?"

"나무늘보는 하도 게을러서 나뭇잎 씹는 게 귀찮아 굶어 죽는 놈도 나온다는 말이 있더구먼...
...시인이 장사에 눈을 뜨면 세상이 어찌될지 으스스 해지네요."

전혀 마음과는 상관없는 싱거운 소리를 나누면서도 나는 거금도의 언덕에 무리지어 서 있던
동백나무 숲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동백나무가 없는데서도 풍겨 나오는 동백꽃의 냄새. 전혀 입으로 아무 소리를 내지 않는데도
전해 오는 이야기와 이야기.... 어쩌면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냄새 맡아지는 모든 현상 자체가
실제로는 허상일지 모른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바다바람 소리를 들으며 새벽녘  잠이 깨었을 때 몇번인가 문득 바로 내 옆자리에 그녀
순지가 작은 어깨를 움츠리고 잠들어 있는  환각에 놀랐던 것은....그녀 검게 그을린 피부와
깊이 파이던 보조개진 얼굴이 그때 20대 후반 한참   젊고 순수한 영혼 속에 언제부터 앉아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그날 오후 예정대로 오페라 하우스에서 호주 문인들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하였고, 거기서 나는 국내에서 인연이 있었던 한국 출신의 시인 필립 윤과 소설가 돈오 김을
만날 수 있었다.

.......개방된 사회로 보이지만 이네들 마음 속 심층에는 백인 우월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 있어요..
..거기다가 이 대륙 자체가 영국의 죄수들을 이주시켜 만들어진 역사 자체를 부정할 수 없는 만큼
유럽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구요.....지금도 원주민들이 흩어져 살고 있는
사막 깊숙한 곳에는 호주 정부의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거든요.....이 땅이 원래 그들 원주민인
아보르지니 땅

이지, 백인들 땅은 아니지 않겠어요?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그런 면에서 이 호주 땅은 백인들이
발견한 것이 아니고, 저희 백인들이 침략해서 점령한, 그러나 영원히 정복될 수 없는 그런 땅이라는
생각들도 해 보는 것 같습니다........저녁이 되어 교민 초청 시 낭독회의 자리에서 교민들 중 누군가가
우리 일행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킹스 크로스 스트리트. 우리 식으로 하면 왕십리(王十里)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넓은 홀의 화려하게 차려진 만찬에서 나는 또 소주가 마시고 싶어졌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 왔을 때 순구 군은 목을 길게 빼고 호텔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룸에 들어가 남은 소주 팩과 서울에서 가져간 양념 김을 가지고 그와 호텔을 빠져 나와 거리의
벤치에 앉았다.

"둘이 먹자. 너, 소주 먹어 본지 오래 되었지? 김도..."

녀석이 조금 쓸쓸하게 웃어 보였다.

 

"선...선생님.... 여그 시드니 본 다이 비치...모래 보...보셨지라? 꼭 밀..밀가루같이...예...미국..
사람들이 사..사다가 하와이 해해...해변에다가...붓는다느만요....그러니.....호주는 가만히 앉어서
부자가...되고요.....한도 없이...모래가 밀려 오니께요...."

"그래도 그 거금도 바다 모래 보다 못하다."

"예?"

"거기는 임마. 순수한 젊음이 있었거든. 거기 바다는 말이다. 생존과 투쟁...죽음, 한(恨) 역사가.
...추억이 있었거든....."

왜 갑자기 울적해지는가. 나는 한꺼번에 팩 한 개씩을 연거퍼 목구멍에 털어 부어 버렸다.

"순수한 청춘과 순결한 영혼이 있었고......돌아가면 너희 고향 배경의 소설을 이젠 쓸거다......
.너하고 같은 반이었던 그 일남이던가.....저희 아버지 만난 생각이 난다.....내가 찾아갔을 때
그 애 아버지, 그물을 꿰매고 있었다. 제 이름 쓰고.....편지 쓰면 되었지, 공부는 해서 뭘하느냐고..
...이미 육지로 돈벌이 나갔다고....지금 생각하면 그 아버지 이야기가 한편으로는 맞았다는 생각도 든다.
... 너희 고향 바다는 그랬어.....죄 없이 애들을 고아로 만들기도 하고.....어떤 동네는 한 동네에
하루 밤 제사를 열 군데, 열 다섯 군데로 만들기도 하고....."

나는 팔을 뻗쳐 옛 제자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비닐 포장된 김 조각을 조금씩 아껴 뜯으며 우리는 남은 소주를 다 마셨다.

"나는 그 섬에 있을 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을 얻어먹었다. 네 덕택에..."

"............"

"다시는 그런 김을 못 먹어 봤다."

내 말이 끝나는 순간 녀석이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으며 낮은 소리로 숨 죽여 울기 시작했다....
.....어저께 밤에......말 말씀 못 드렸구만요......순지 누이.....죽었구 만요.....
그의 어깨에 올려 졌던 내 팔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오페라 하우스 쪽 하늘 위에서 별똥별 하나가 유난히 길게 꼬리를 그으며 떨어져 내렸다..
....누이 죽고...서...누이.... 일..일기장 태워 주고....그라고 나서 섬을... .떴구만요.....
다시 그 섬 안.... 안 간다고....생각하고 여그까지 왔는디......어저께... 선..선생님 만나고 나서..
한번은 가야지.........불쌍한 누이....무덤에 가서...선...선생님이 서울서...아니, 여그 호주
신문에도 선생님 이름이 난 유명한 소설가 되셨다고, 그말...그 말 꼭 해주기로.....
생각이 바꾸어 졌구만요.....나는 멀리서부터 아스라하게 나를 향해 다가오는 마른 김 냄새와
동백꽃 향기를 물결 소리에 섞어서 듣고 있었다


"민형. 여기서 코알라하고 아조 유칼리 잎 뜯으면서 살낀가?"

K시인이 옆구리를 찔렀다.

일행들은 벌써 출국 카운터를 다 빠져나가고 이제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공항 안에 서너
명 밖에 눈에 띄지를 않는다.

"코알라가 아니라 앵무새들 때문이구마? 브루 마운틴에서 집안으로 날아 들던 새떼들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다했제....."

"나, 여기 원주민 아보로지니 과부하고 눈 맞추어 놓은 것 모르셨우?"

나는 입으로는 싱거운 대꾸를 하면서도 눈은 계속해서 입구 쪽을 향하고 있었다.

아직 비행기 출발 시간은 30여분이 남아 있었다.

일찍 출국 수속을 마치고 보세 구역에서 기념품 구경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10여 년 전
거금도를 떠나면서 자꾸 흐려가던 그 섬의 윤곽과 그때 불던 바람의 냄새를 떠올리면서도
지금까지 다시 찾아가지 못했던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곳 시드니는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올 수 있을까. 한국인들이 몰려 사는 캠시와는 가급적
떨어진 곳에 숙소를 정하고 자동차를 렌트해서 황막한 사막 쪽으로 혼자 나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원래 이 땅의 주인들이었던 아보르지니 원주민 마을에서 며칠간이고 머무르고 싶었다.

그리고 순구 군이 사는 집에 가서 그의 아내가 만들어 주는 한끼 정도의 식사를 대접받고, 야생
앵무새가 떼지어 정원으로 날아드는 거기 브루마운틴 부근의 작은 집에 방을 얻어 놓고 젊은 날
섬에서 지냈던 1년간의 이야기를, 가장 순결했던 청년 시절과 한 여자 이야기를 쓰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미래라는 건 얼마나 불확실한가. 더구나 어느 순간 청정하게 맑은
감정으로 내렸던 결론이 생활의 굴레 속에서 늘 퇴색해가던 것을 알만큼 나도 이제 나이를 먹은 것이다.

"민형, 정말 이제 시간 없어."

K시인은 벌서 몇 번 째 시계를 보고 있었다.

"조금만요. 오늘 이 녀석을 못 보면 영영 다시 못 만날 것 같애."

"페트릭 화이트 집보고 나서 민형도 호모가 된 건 아닐낀데 거 이상하네."

비행기 출발 시간이 20여분으로 줄어들었다.

 

그때 나는 덩치 큰 백인들 사이로 이마 위에 땀방울 젖은 머리칼 몇올이 붙은 청년이 허덕이며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10여 년 전 겨울 금진 나루터를 향해 헐떡이며 언덕길을 뛰어 내려오던 녀석의 모습이 국제 공항의
출국장 위로 오버랩 되고 있었다.

"시간 다 되어서 지금 그냥 들어 갈 참이었다.....얼굴 보았으니까 되었다. 이제."

나는 그의 손을 쥔 채 한 손으로 옛날처럼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선생님. 이거..."

그가 작은 비닐 봉지 한 개를 내밀었다.

"파이프구만요......선..선생님 많이 담배 태우시길래....여기 원주민 아보르지니들이 손으로
만들어서 볼품은 없어도....이 사람들 혼...혼이....혼이 숨어 있다드만요"

"이거 한 개가 아니네."

"열 개구만요....다 틀리게 생겨서...이 파이프 가지고 있으면 못된 잡신들이 근...근접을 못한다고
예........우....우리  나라 부....부적 같이요....."

그래. 잘 간직할 께..... 한국 나오거든 연락하고......나는 열 개나 되는 파이프들을 양손으로 감싸
쥐면서 또 아련한 해초 냄새를 다시 맡았다. 갯벌 위를 핥아 가다가 문득 잠시 한 소년과 그의 누이
머리칼 위에 머물었던 바람 냄새...., 나는 눈 앞이 부옇게 흐려 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선....선생님. 그럼.... 안녕히    그럼 가...가십시오...."

그가 허리를 너무 굽혔기 때문에 외국인 승객 몇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출국 게이트를 빠져 나온 후 그를 향해 한 번 더 고개를 돌렸을 때 손을 흔들고 있는 그의 어깨
바로 뒤로 한 여자가 서 있는 모습이 환영으로 부옇게 떠올라 왔다.

아,... 나는 짧게 신음 소리를 내며 그녀 순지의 시선을 붙들었다. 그때 분명 잠깐 고개를 들어 내
쪽으로 시선을 보낸 그 여자의 얼굴에서 한쪽으로 깊이  파인 볼우물을 나는 확실히 보았다.
............................................................................................................................
사랑 이었어, 그건..... 나는 시린 전율 속에 신음하듯 웅얼거리며 꿈 속처럼 밀려오는 진한
동백꽃 향기와  바닷바람 머금은 해초 냄새를  시드니 공항, 출국장 입구에서 선명하게 다시
맡기 시작했다.


  (xx27)  나는 이런 선생님을 갈망 한다(xx27)
성수야 거금도가 그리워지거들랑 이 글을 자주 읽어라 도움이 되겠구나  ....숙.
  • profile
    거금도 2003.06.21 14:10
    민승호님께서 쓰신게 아니구요..^^;
    녹동 출신 소설가및 교수이신 유금호님의 단편 소설집인 "여자에 관한 몇 가지 이설 혹은 편견" 에 실린 "겨울 동백향기" 에 내용입니다.

    유금호님 홈페이지에서 많은 글들을 접해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yookeumho.com/
  • ?
    용두봉 2003.06.21 19:12

    원래부터 책읽기를 모른터라, 또 게으르고 해서, 누가 무슨 어떤작품을 발표했는지도
    모르네요

    고흥 녹동 출신에 이처럼 훌륭한 소설가님이 계신것을 몰랐습니다. 문학에 신경좀 쓰면서
    살랍니다.

    인터넷상 어디엔가보니 민승호님이란 이름으로 게제되어 있었습니다

    하도 내가 어렸을적 금산 거금도 실정과 비슷해서......
    또 친구가 시드니에 있습니다 . 외로운 시간을 자유롭게 보내고 있을것입니다.
  • ?
    추선복 2003.06.22 23:45
    노선배님 글 감동깊게 잘 읽었습니다
    긴 글 올리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네들 역시 금산에서 자라온 시간들을
    글로 표현 한다면 아마도 몇권의 책이
    만들어지지 않나 싶네요
    그리고 거금도님덕에 동향출신의
    유금호님의 문학별장에서 좋은 글도
    읽게되어 감사드립니다
  • ?
    유금호 2004.05.29 00:11
    아주 우연히 인터넷상에서 내가 쓴 소설을 다시 보고 놀랐습니다.
    벌써 30여년전 20대 후반의 젊은 시절 1년을 금산에서 머물었습니다.
    그때의 제자들도 이제 다 중년의 나이가 되어 연락이 오기도 하고 합니다.
    내 문학별장에도 더러 들리고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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