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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초 김연수 명창 말년의 모습

바다에 젖은 애절한 가락-동초제 소리의 고향 금산

유영대 / 전주 우석대 교수

자동차길로는 끄트머리인 우리나라의 최남단 고흥 녹동까지 갔었다. 가는 도중 줄곳 동초가 남기고 간 소리를 들었다. 그중에서도 그가 말년에 지은 단가「이산저산」이 계속하여 입가에 맴돌았고, 금방이라도 그가 곧게 뻗은 27번 국도의 저쪽 끝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를 반겨줄듯 싶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김연수는 언제나 임방울과 비교되어지는 가운데, 꼬장꼬장하고 욕심 많고, 고집세며, 정감은 별로 없는 인물로 정형화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산저산」은 어떠한가. 그에 대한 그같은 평가가 꼭 들어 맞지는 않은 듯하다. 오히려 이 노래의 분위기로 보아 다정해 보이지는 않는가.

고흥 금산 유택에서

「이산저산」은 동초의 마지막 녹음이라 한다. 그의 지정고수였던 이정업이 한번은 병석에 와서 「빨리 일어나라」고 재촉하였다. 동초는, 「내 저승가면 자네를 빨리 불러옴세.」하였다.「나는 저승가기 싫어.」라고 대답하자 동초는 혼자말로 「저승가면 누가 반주허지.」라고 중얼거렸다.

이번 길은 같은 학교에 있는 김광중 선생과 함께였는데, 나는 그에게 이 소리를 들려주며 감상을 물었다.

이산저산 꽃이 피면 산림풍경 너룬곳 만자천흥 그림병풍

앵가접무 좋은 풍류 세월간 줄을 모르게 되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만은 세상사 쓸쓸하구나

나도 어제는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다

내청춘도 날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갈 줄 아는 봄을 반겨헌들 쓸데 있나

봄아 왔다가 가랴거든 가거라

네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 승화시라

옛부터 일러 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된들

또한 경개 없을손가 한로상풍 요란해도

제절개를 굽이잖는 황국단풍은 어떠하며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면 낙목한천 찬바람에

백설이 펄펄 휘날리어 월백설백 천지백허니

모도 백발의 벗일레라 그렁저렁 겨울이 가면

어느덧 연세는 또하나 더하건만

봄은 찾아 왔다고 즐기더라

봄은 갔다가 연년이 오건마는

이내 청춘은 한 번 가고 다시 올 줄을 모르네 그려

어화세상 벗님네들 인생이 비록 백 년을 산대도

인수순약격석화요 공수래공수거를 짐작허시는 이가 몇몇인고

노세 젊어 놀아 늙어지며는 못노느니라

놀아도 너무 허망히 허면 늦어지면서 후회되리니

바쁠 때 일허고 한가할 때 틈타서 이렇듯

친구 벗님 모아 앉어 한 잔 더먹소 덜먹소 허여가며

헐 일을 허면서 놀아보자

이 계면성음으로 불리는 단가는, 마찬가지로 백발을 노래한「백발가」와는 그 정조가 사뭇 다르다. 나는 70년대 후반에 박녹주가 문예진흥원에 와서 부른 「백발가」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노인네의 그 단단한 우조길의 오기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면에 특히 밝아 단가는 우조만을 고집했던 동초도 말년에는 이 노래를 장기단가로 삼아 불렀다. 동초의 유택을 찾아가는 길이어서 그런지 어딘지 모르게 처연한 심사가 우리를 감쌌다. 살아온 삶에 대한 무상감, 미처 이루지 못한 꿈, 애절한 심사, 이런 것들을 솔직하고 쓸쓸하게 노래하다가 뒤에 와서 활기를 회복하는 것이 이 노래의 맛이다.

고흥군청을 들른 다음 녹동 항구에 달려와 금산에 가는 배로 옮겨타고서야 비로소 김연수라는 분위기가 실감나게 다가왔다. 그의 이야기를 꺼내자 배에 탄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호적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그의 무덤이며, 생가터며, 친구며, 온갖 흔적들이 금산에서 숨쉬고 있었다. 바다는 섬들이 오종종하게 모여있어 툭 트인 시원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으나 바로 그 오종종함 때문에 더 정겨웠다 특히 바로 곁에 있는 소록도는 또 다른 의미로 진하게 살아 숨쉬는 섬이 아니던가.

배안에서 만난 어르신은 먼저 면사무소에 들러서 협조를 요청하라고 하였다. 여러 자료들이 모아져 있으며 묘소까지 잘 안내할 것이라고 확언하였다. 그렇지만 버스에서 그의 유택이 보이는 순간 나는 가슴이 뛰어 그냥 버스에서 내려버렸다. 풍수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어떻든 묘자리는 잘쓴 듯 싶었다. 너무 잘 드러나는 자리였으므로, 그곳에 허겁지겁 올라 절을 두 번 했다. 막소주 한 병으로 선생의 혼을 위로하였다.

무덤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면 그의 생가터인 대흥리가 한눈에 들어오고 그 뒤켠으로 용두봉이 병풍을 두른 듯 높고 길게 펼쳐져 있다. 마땅히 명창이 태어날 만한 형국이었다. 사실 이유택은 지난 82년에 옮겨온 것이며, 원래는 김포 강화 어름에 묘지가 있었다. 이 묘지의 이장은 오정숙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강한영 교수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그해 4월에 이장하고 나서 8월 15일에 묘비 제막식을 하는데,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가 제막식하던 한 시간 정도만 개었다고 했다. 사물놀이도 울리고 고인의 제자들이 보렴도 부르고 품도 추면서 한껏 즐거운 분위기였다고 한다.

금산에 갔더니, 그곳 사람들은 금산의 중요한 성악가로 동초 선생뿐 아니라 오정숙 명창을 꼽았다. 왜 그런고 물었더니, 동초 선생의 흔적 곳곳마다 오정숙 명창이 다시 새롭게 손을 보아 으례 두 분을 함께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곳 냇가에 있는 연수교는 애초 동초가 물을 건너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위하여 세운 것이었는데, 나중에 오정숙이 출연하여 개축하였다. 매해 성묘길에 그는 면민 위안잔치를 베풀기도 한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고향이 금산임을 자랑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두 분의 소리내력을 함께 검토하는 것도 이번 길의 숙제가 아닐까 싶다.

동초의 판소리관

동초의 판소리관은 정연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는 국악을 업으로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부모들은 그에게 공부를 시켜서 다른 길을 걷게 할 요량이었던 것 같다. 열 네 살까지 9년간 고향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그후 서울에 와서 중동중학에 진학한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와서 농사를 짓다가 축음기를 통해 판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그는 스물 아홉 때 순천으로 유성준을 찾아가 수궁가를 배웠다. 그 과정에서 그의 성격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터진다. 선생인 유성준이 사설의 발음을 잘못하거나, 혹은 장단이 이상하다고 생각되면 곧바로 지적하여 따져 확인했다고 한다. 그러자 유성준이 거듭 비위 상했다고 하는데, 한 번은 박자가 조금 모자라게 소리를 가져가서 다시 그 문제를 거론하고 나오자, 유성준이 호통을 치며 「나릿님헌테 진상갈 것 아니니까 그냥 허라면 혀」라고 말했다 한다.

그 뒤에 송만갑에게 흥보가와 심청가를, 정정렬에게 춘향가를 배웠다. 그렇지만 김연수의 활동은 대체로 창극쪽에 많이 기울어졌으며, 자연 그의 판소리에 대한 견해도 연극적 특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그는 해방 이후 창극의 정립에 힘썼다.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판소리의 기량이었다 오래도록 독공하여 일정한 경지에 도달해야만 된다고 하였다. 오정숙에게는 다음과 같이 독공한 결과를 시험하라고 말했다.

백 일 공부를 마치고 그냥집으로 오면 안 된다고 했어요. 산을 내려오다가 맨먼저 만나는 사람을 붙들고 자신의 기량을 실험해 보라고 하셨지요. 산을 내려오자면 맨먼저 만나는 것이야 나뭇꾼일 텐디, 그 사람 앞에서 여태까지 공부헌 것을 발휘해 보라 이거지요. 그 사람이 넋을 잃고 듣거나, 울 때 같이 울고 웃을때 호응해 주면 「됐다」허고 내려오고, 그 사람이 듣고 모른 채 헌다든지 오래 질게 허니까 졸고 앉았다든지, 「나 나무허로 갈라요」헌다면 때가 못 미쳤구나」하고 다시 산으로 올라가라고 하셨지요. 그 사람을 감동 못시키면 딴 사람도 감동 못시킨다 이거지요. 술맛은 술 못마시는 사람이 먼저 알듯이 소리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감동시켜야 진짜 소리라고 헐 수 있다 이거지요.

다음으로 강조한 것은 발음의 정확성이었다. 발음이 분명해야 관중에게 잘 전달되는데, 기왕의 사설은 구전으로만 전달되다 보니까 오자낙서가 많아 뜻이 불분명한 채로 그냥 외워서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로 소리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확실하게 발음하고 그 뜻을 명확히 알게끔 심하게 야단을 치기도 했다 한다.

김연수가 새로 짜넣었거나 장단을 달리하여 짠 대목을 보면 그의 작품에 대한 해석방식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특히 이면을 중요시하여 이면에 맞지 않은 소리는 소리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꾀꼬리같이 소리만 곱게 헌다고 소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이면이 맞아야 소리가 된다」고 했다. 신연맞이 대목의 장단구성은 세마치-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로 이어 짰는데, 이에 대하여 오정숙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연맞이 대목의 이민으로 보면 세마치 장단은 변학도가 춘향 볼 욕심에 마음은 급허지만 사또 행차에 위엄을 채리는 것이고, 중모리 대목은 좌우급창 군노사령들의 좀 성급한 행차이고, 자진모리 가락은 아전 등속의 치장 거동이니 더 촐랭이고, 휘몰이는 청도기 벌리는 정경을 그린 것으로 모든 행동거지가 다 이면에 맞지요.

김연수가 특히 방자와 비숫한 궤적을 그리는 인물에 애정을 보인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도령과 방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인 「해소식 묻는 대목」도 아주 흥겹게 진행된다. 이도령의 말은 대마디 대장단으로 처리하면서 방자의 대사는 장단을 흘리면서 엇붙여 두 사람의 층위를 구분하고 있는 것은 중요한 의도라고 생각된다. 양반이 장단에 규제되는데 대하여 방자는 장단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다가 급기야는 이도령이 다급하여 장단을 무시한 채 소리 지르는 부분에서 절정을 이룬다.

십장가 대목에서도 김연수의 독특한 이면해석이 들어 있어서 주목된다. 먼저 다섯 대를 때리고 다시 어르자 춘향이 대답하는 부분을 아니리로 처리한다. 이 대목의 춘향의 항변은 아름다운 소리이기는 커녕 죽을 정도의 곤장을 맞고 지탱하기 어려운 상태와 그런 가운데서도 당당히 자신을 지켜야 된다는 의지가 한데 어우러진 그런 복합심사를 보여준다. 그 이후의십장가는 성음이 달라지는 것이다.

진양장단을 24박으로 고정시킨 것도 그의 업적으로 알려져 있다. 장단의 구조를 우주와 음양 등 철학적 체계와 연관지어 해석하려는 시도는 조선조 말의 명고인 오성삼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북을 하나의 소우주로 이해하여 해와 달, 별의 심정으로 파악하고 중모리는 열 두 달로, 진양장단은 24절기로 표현하고 진양조를 24박으로 소리를 짜려는 노력은 정정렬이 먼저 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진양 모든 소리를 24박으로 짜느라고 첨삭을 가하고 수정한 것은 김연수에 와서의 일이라 한다. 실제로 그의 진양 소리는 달고 밀고 맺고 푸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 점은 새로 북을 배우는 이들에게는 아주 편한 도식이 된다. 명고수 송영주는 전도성도 24박을 주장하였다고 하면서, 「만일 18박에서, 혹은 30박에서 소리를 풀어 버린다면 진양 24박이란 용어는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그 진양 24박 주장의 정당성을 강변한 적도 있다.

김연수의 판소리관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이면에 대한 해석이라면 발림의 자세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앞서 말한 대로 일찍부터 창극에 관여했기 때문에 연극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오정숙은 말한다.

한 번은 동초 선생이 이리 소리단에 왔단 말을 듣고 동네 노인들이 도시락 싸들고 구경온 적이 있었어요. 모두 다 동초 선생님 도시락을 하나씩 들고 왔는디, 그런 날이면 선생님도 신이 나셔서 제자 자랑을 하고 싶어 하셨지요. 「잘해야 허네」 이렇게 당부하시기도 하니까요. 마침 제가 소리를 허게 됐는디, 북은 이리 국악원의 남궁 씨가 치셨구만요. 춘향가 중에서 어사또가 춘향집을 찾아가니 춘향모가 괄세하는 대목으로 향단이는 기둥을 안고 돌아서서 「아이고, 아가씨-」허고 우는 대목이었지요. 그래,「아이고 아가씨-」소리를 허는디, 「그쳐」하고 선생님의 불호령이 내리는 거여요.「그게 뭐야. 소위 연극을 했다는 사람이 그렇게 감정없이 소리를 허는거여. 「아이고 아가씨-」라고 부르면 그 한 마디 속에 별게 다 들어 있는디 맹숭맹숭 그렇게 소리를 질러버려 그 따우로 소리를 허는 거여」이러고는 그 많은 할아버지 앞에서 야단을 치시는디, 눈물이 쏟아지고 울어 버렸지요. 그러자 「왜우냐」고「때려서 우냐, 욕해서 우냐 당장 그치라」고 또 야단을 치셨지요, 그러고는 다시 허라고 하시데요. 그래, 억지로 울음도 참고 불렀더니 그제서야 무릎을 탁 치면서 「그거야, 그 감정으로 해야 돼」하시는 거지요.

우리가 아는 동초의 불같은 성격이 이 단락에 들어 있거니와, 그의 발림에 대한 견해도 이처럼 철저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의 판소리가 되기 위해서는 발음이 분명해야 하고 장면의 해석을 명확히 하며, 장면에 맞는 발림을 하고, 그것을 종합하는 형태로 부단히 공부해야만 된다고 생각하였다.

김연수의 사설집

동초의 판소리에 관한 업적으로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앞서 검토한 바 창극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판소리 사설집을 정리한 것이다. 이번에는 그가 정리한 사설집에 대하며 검토해 보기로 한다. 그가 6·25때 피난가면서 그때까지 수집 정리해 둔 판소리 사설집만을 싸서 나섰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판소리 사설에 대한 그의 열정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평생을 사설정리에 바쳤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여기에 신명을 쏟았다. 아마 신재효본을 위시한 여러 필 사본들과, 자신이 유성준, 송만갑, 정정렬 명창들에게서 배우면서 정리해 둔 사설집이었을 것이다. 60년대 중반이후에는 특히 사설집 정리에 집중적으로 노력한 듯하다.

어느 라디오와의 대담에서 「나이 60이니 무대는 치우고, 5바탕의 가사를 정리하겠다. 춘향전은 출판예정이고, 흥보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도 정리하여 출판코자 한다. 이은상 씨와 의논하여 이충무공전을 판소리로 짜겠다. 그리고 판소리연구원을 만들어, 신인을 양성하겠다.」라고 밝혔는데, 그의 춘향가가 67년에 간행되었으니 그 직전의 포부인 것으로 보인다.동초제 춘향가는 여느 춘향가보다도 긴 아흡 시간 가까운 것이다. 지난번 최승희를 이야기하면서 동초의 춘향가가 정정렬의 것과 많이 통한다고 밝혔거니와, 사실은 동초제가 훨씬 다채롭다. 정정렬이 춘향전을 새로 짜면서 가장 많이 손댄 부분은 초압인데, 「기산영수」나 「적성가」, 「늬그른 내력」, 「경상도 산세」 등 예전의 아름다운 더늠을 덜어내버렸다. 김연수는 많은 부분 정정렬판을 받아들이면서, 이전의 더늠들도 살려냈다. 그러다보니 가장 긴 춘향가가 되었다.

그가 덧붙인 대목들은 대체로 흥겹고 이면에 들어맞았다. 이도령과 춘향이 정이 담뿍 들어 사랑하는 대목은 듣는 이로 하여금 홍조 띤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벼개가 위로 솟구치고/이불이 발치로 벗어지고/침병이 뒤쳐질제/뜬눈으로 날을 새니/동방이 희번히 밝아온다」로 맺는 사랑가도 속된 외설의 영역으로 떨어지지 않고 아슬아슬하나 절제가 있어 좋다.

상방의 사또와 목낭청의 대사를 아니리로 그대로 살려낸 점도 흥미롭다. 아들이 춘향이 때문에 잔뜩 바람이 들어 있는데, 그것도 모른 채 자식자랑만 늘어지게 하는 사또와 그저 맹목적으로 사또의 말에 맞장구치며 비위만 맞춰 건성으로 대답하는 목낭청의 모습이 대조적이지만 여기서도 반전이 생긴다. 너무 대답을 잘하는 것이 불안했다는 듯 사또가 묻는다. 「자네 뉘말인줄 알고 대답을 이리 부지런히 하나.」 목낙청이 반문한다.「사또께서는 뉘말을 이리 부지런히 하시오?」 「이사람아, 우리 몽룡이 말이야.」 「사또가 몽룡이 말씀이면 나도 몽룡이 대답이지요.」 이런 무관심하고 막막한 대답이 있고서야 사또의 허위의식이 한꺼풀 벗겨지는 것인가. 뒤의 제자군 대목이나 허봉사의 점치는 대목들도 해학적 요소를 두루 갖추었으며, 다른 측면으로는 평민들의 일상적 삶과 욕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주 소중한 대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혹 정통성을 문제삼아 다른 유파에 비해 다소간 불리하다고 생각할 줄 모르지만 판소리란 언제나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이라는 특징을 알기만 한다면 오히려 더 바람직한 일일수도 있다. 물론 그 변화의 방향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지만, 어떻든 춘향가를 두고볼 때, 「여러 유파의 좋은 점을 놓치지 않고 포괄하여 종합적으로 한판의 춘향가를 완성해 놓은 것」이라는 임진택의 평가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개작하고 첨삭하고 확장을 해야만 당대의 핵심적 정서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전승예술이 아니겠는가, 어느 대학에서든가 연구발표회를 마치고서 이규호가 「방아타령」을 부른 적이있었다. 「재치기난다 최루탄 방아」라고 한 소절을 질러낼 때, 뭔가 그럴듯 해 보였다. 그날도 대학에는 최루탄 냄새가 자욱했기에.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을 수만 있다면 또 다른 방식의 어떤 개작이 이루어져도 그것은 정당하다. 그것이 비록 어설프고 관중에 야합하는 속기를 지녔다고 하여도 이내 제자리를 차지하여, 결국 살아남을 것만 살아남을 것이다.

동초제 사설은 춘향가의 경우 정정렬판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지며, 기왕의 좋은 더늠들을 모두 살렸다는 점은 앞에서 지적하였다. 심청가의 경우 송만갑제에 신재효본의 교합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심봉사가 황성 올라가는 길에 벌이는 파자식 통성명을 하는 대목은 거의 신재효본의 전재이다. 수궁가를 비롯 나머지 본들도 신재효의 영향이 두드러진데, 부분부분 그가 소리하는 사이에 「이것은 고창 신재효 선생님의 더늠인디」하면서 영향 관계를 밝히고 있는 점으로 보아도 그러하다.

김연수 창본의 공통적인 특징은 골계의 확대에 있다. 장단과 박자의 세밀한 표시뿐 아니라 전체 창본을 연극의 대본처럼 꾸며서 이를테면 「효과」, 「춘향」, 「심청」, 「언청」하는식으로 역할을 분담시켜 놓았다. 이런 방식의 연극적 특징 때문에 골계적인 요소가 확대되기도 하였지만 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로는 평민에 대한 애정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고 싶다. 그가 만든 창극에는 유난히 많은 조역들이 등장하여 한바탕 웃음보를 터뜨리게 하는데, 창본에서도 그러한 골계적 조연들이 많이 등장하여 한몫을 단단히 한다. 한 대목 들어 보기로 하자.

(중중모리 ) [효] 심봉사 좋아라 은자 이십 냥을 받아들고 저의 집으로 돌아오며 왼갖 생각을 두루 헌다.

[심] 뺑덕이네를 어쩔끄나 두고 간다해도 안 될테요 같이 따라가면 좋으련만 마다허면 어찌헐꼬 도르는 수가 옳다.

[효] 허고 저의집 문전을 들어서며,

[심] 여보소 뺑파, 이거 어디갔나. 뺑덕이네 집안 어른이 어디갔다가 집안이라고 돌아오면 우루루루루 쫓아 나와서 영접허는게 도리옳지 좌면 부동이 웬일인가. 에라이 사람 무정허네.

[효] 그때의 뺑파년은 그새의 뒷집 머슴을 후려다 무슨 이야기가 진진허여 문을 선듯 못여는데 그때의 심봉사는 문앞에 바짝들어서며,

[심] 여보소 뺑파 살구값 들어가네 문여소.

(아니리) [효] 뺑덕이네 이 몹쓸 년은 뒷집 머슴 먹일라고 씨암탉 잡어 솥에 안쳐 불피우고 자미나게 속삭이다가 심봉사 오는 바람에 닭도 못먹인 채 뒷문으로 내보내고 부엌으로 돌아나오면서 제일을 눈치챌까 됩데 심봉사를 타질으는듸,

[뺑] 흥, 얼굴이 벌간게 옵내 색주가년들헌테 호강 많이 받았구만.

[효] 속없는 심봉사 그 소리엔 구미가 당겨,

[심] 아닌게 아니라 내말을 들어보소.

(자진모리) [심] 자사께서 청하는게 웬일이고 하였더니 왔다고 전갈헌 즉 큰문 잡고 모시여라 허더니 손잡고 들어가서 주안상 들여놓고 기생시켜 술권하며 자고가라 허제마는 자네가기다릴까 더듬더듬 찾어와서 목터지게 불러봐도 방에선 쥐를 잡나 빠지락빠지락 소리만 나지 대답도 아니허니 이런줄 알았으면 읍내에서 호강허고 잘먹고 잘잘 것을 무엇하러 내가 왔어. 곽씨부인이 살았으면 문밖에서 나달었지 이럴 리가 있겠느냐 아이고 아이고 내팔자야.

(아니리) [효] 뺑덕이네가 방에서 빠지락라지락 소리 어쩌고 허는 말을 듣더니 제죄덜기 위하여 공연한 곽씨부인 말로 탈을 잡어가지고 정성을 까놓는디,

(중중모리 ) [뺑] 허허 이말 들어보소 세상천지 못헐 것이 남의 재취노릇이네 죽도록 정성들여 허노라 허였건만 그 공은 간데 없고 죽은 아내만 칭찬하니 아무리 생부천들 그 꼴을 보

겠는가.

이 정황만 보아도 웃음이 난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양식과 비교하여 어떠한가. 이 진한 골계야말로 삶의 활력소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이 때문에 보통 세 시간가량의 심청가도 등초제는 다섯 시간 가량을 하는데, 전반적으로 아쉬운 점은 주로 여류 명창들을 통하여 전승되는 관계로 남창만이 할수 있는 해학적이고 풍자가 가득 담긴 우스개 대목이 많이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사제의 도

앞에서도 알 수 있지만 오정숙의 스승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될 정도로 극진하다. 한 마디로 거룩하다고 말한다. 묵은 사진첩을 보다가 동초의 사진을 몇 점 빼내어 모을 때 오정숙은 「우리 선생님 사진위에 다른 사람 사진을 놓지 말고, 우리 선생님 사진을 맨 위에 올려 놓으라」고 말한다. 참으로 유난하고 특별난 사제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찌 그게 유난한 일이며 특별난 관계라고 할 것인가. 애초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정숙은 스승을 생각하면 죄송스럽기만 하다고 말한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직까지도 마음에 걸려있다고 하였다.

동초를 추억하면서 오정숙은 두 번이나 울었다.

선생님 임종이 74년 3월, 음력으로는 2월 15일이니까, 14∼5일일 거예요. 그 날은 사실은 제 수궁가 완창발표회가 있는 날이었지요. 그 말씀 헐라니까 제가 목이 메이네요(울음). 그 전날, 선생님께 가서 강을 받았어요. 그런디 선생님은 일어나시지 못허고 이불을 이렇게 고여놓으시고, 배가 이렇게 부으셨거든, 간경화증으로.이렇게 기대고 계시고, 저는 선생님 앞에서 강을 받읍니다. 선생님 저, 내일 발표횝니다 허고 그 앞에서 소리를 헐라고 그러니까, 말씀도 잘 못허세요. 그 이튿날 돌아가실 어른이니까, 정신만 말짱허지요, 소리허는 걸 좀 중지허라고 그러세요. 왜그러시냐고, 다가가서 물으니까, 「자리 깔으라고, 귀헌 소리를 땅에서 어떻게 시키겠느냐, 자리 깔아라」(목이 메어서 울며) 이레 말씀하세요, 그래 돋자리를 까니까 소리를 시작하라고 시늉을 하시데요. 첫 대목 「탑상을 탕탁 뚜다리며, 용성으로 울음을 운다」 용왕이 병이 들어서 자탄허는 대목이 첫 대목이거든요. 제가 소리를 헐 때, 용왕이 선생님 같아요. 선생님이 지금 용왕이시다, 허는 기분이 드는 거예요.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약을 구해서 재생을 시켜드릴 수만 있다면 이세상 끝까지라도 갈텐데. 이런 마음을 먹고 있으니 소리가 제대로 안 나오는 거지요.「그러지 말라」고 손을 자꾸 저으세요.

마지막 수업의 광경이 눈에 선하고 속이 뭉클하였다. 제자가 소리하는데 자리를 깔 여유를 가졌던 스승. 그런 정황에서 오정숙은 소리 한바탕을 다했다고 한다.

토끼허고 별주부허고 만나는 산중장면이 있어요. 토끼가 자세를 허니까「너 생긴 모양새가 팔난화망살이 있어 나는 팔난이 많겠다. 니 팔난을 이르테니 들어봐라」하는 자진모리 대목이 있어요. 그 대목을 허는디 마지막에 「닫는 토끼 징구리보고 구르릉 쾅」하는 포수가 총쏘는 대목이 있어요. 별주부가토끼 겁을 주기 위해서요 「어허 그분 방정맞은 소리 말래도 점점 더하는군」허는 대목인디, 제가 부채를 들고 서서 그 대목을 부르니까, 선생님이 거기서 갑자기 소리를 중지시키는 거예요. 우리 영감님이 옆에 계시면서 말씀을 전하는디, 「소리허고 총쏘는 시능허고, 넘어지라」고 발림을 그렇게 가르쳐 주셨어요. 그렇게 다 마치고 여관으로 돌아왔지요.

춘향가와 흥보가의 완창발표회는 스승이 객석에 앉아 있어서 맘놓고 소리를 깼는데, 수궁가 발표날 새벽에 선생이 돌아가셨다. 발표날 아침에 일어나니 치장을 도와주고 머리에 쪽을 지어준 박송희가 새벽같이 여관으로 왔다고 한다. 라디오를 좀 들으려고 해도 「오늘 발표허는 사람이 뭘 신경 쓰려고 라디오를 들어」하며 듣지 못하게 하였다. 극장에 갔는데도 부군이 그냥 문앞에 서서 「우리 집사람, 모릅니다. 속여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했다 한다 자신만이 스승의 죽음을 모른 채 공연에 임했다. 물론 공연하면서 좀 이상한 낌새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극장안이 꽉 찼는데, 먼저 북을 치기로 한 김동준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알아보니 누군가가 국립극장에서 회의를 하고 있노라고 하여 의심없이 지나갔다.

객석 앞쪽에 노인들이 죽 앉아있었는데, 그이들도 소리를 하는 가운데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영낙없다」, 「영낙없어」하는 소리만 내어서 좀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파계시는 동초 선생님을 생각하여 그러려니 했다 한다.

고수를 바꾸는 장면에, 김동준씨가 들어와야 허는디, 이정업씨가 들어오세요, 차례가 아닌디. 그런디, 이분이 우시니라고 북올 못치는 거예요. 그 큰 눈에서 눈물이 뚝뚝뚝 떨어지는 거예요. 제 생각으로는 우리 선생님이 편찮으셔서 제자 발표회에도 못나오고 안 되어서 저러시는 것으로만 생각허고 소리를 계속했지요, 그렇게만 생각했지 타계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어요. 바로 어저께 뵈었으니까요. 어떻든 소리를 마치고 어질더질까지 나왔지요. 인사를 허고 나오니까 이정업 선생님이 북채를 놓고 퍽썩 주저앉더니 엉엉하고 우시는 거예요. 「선생님 왜그러세요?」「갔어」 「누가요?」 「동초가 갔어」그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신발을 벗었는지 신었는지 도 모르고 밖으로 뛰어나갔지요. 웃입은 그대로 선생님 댁까지 갔지요. 그날, 임종도 못허고, 그것이 제일 원통해요. 그래, 항시 선생님에 대한 아쉬움, 그리움, 흡족하게 못모셨던 것, 마음에 걸리고, 가슴이 아프고, 내가 사람 노릇 못했다. 이런 후회만 들어요.

이정업은 열흘인가 뒤에 역시 타계한다. 명창이 죽으면 고수도 하나 돌아가는 법인가. 장군 죽으면 용마도 사라지듯.

이 장에 관하여 앞에 잠깐 언급했지만 사실 이 계획은 오정숙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루는 꿈을 꾸는데, 선생이 평소의 차림인 하얀 두루마기에 단장을 집고는 와서, 「내 방이 누기가차서 못자겠어 불이 안들여」, 이렇게 화가 나서 말을 했다 한다. 그래서 큰아들인 규호 씨와 상의하여 구체화시킨다. 국립창극단의 박후성 단장과 81년 여름 폭양에 금산을 아홉 번 왕복했다고 하니 그 정성을 짐작할만 하다. 이렇게 해서 당시 금산 면장인 박종호 씨와 그 곳 번영회의 도움을 받아 계획을 진행시킨다.

윤달드는 해에 이장하면 좋다고들 하데요. 그해 4월이 윤달이었는데, 묘소를 파보니 육탈이 되지 않고 그대로 있어요. 알콜로 정성스럽게 닦아내고, 다들 이장 안 했으면 큰일날뻔 했다고 허드구만요, 전주 법우사의 국지 스님이 잘 추스려 주셨지요. 그래 금산으로 들어오는디, 그날 비가 억수같이 왔어요. 그런데도 그 자리를 파니 먼지가 펄썩 나드구만요. 그런 걸 명당이라고 그러는지, 이장헌 그날 밤 자는데 다시 선생님이 오셔서 지팡이를 딱 놓고 그대로 누우시면서 「아이고 개운허다. 아이고 고실고실허다, 방이 이래야지」 현몽을 또 한 번 했어요. 이걸 보면 참 미신을 안 믿을 수도 없어요.」

원래 그 유택은 일제 때 신사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신사의 기를 꼭 누르고 있으니 우리 판소리가 번성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이제 오정속의 소리내력을 검토할 차례이다. 그의 소리는 여창답지 않게 아니리가 좋고 청중을 휘어잡는 특징이 있다. 그가 소리의 감각이 있다는 것을 선친이 먼저 짐작하여 알았었다고 한다. 돌이 갓지났을 무렵의 일이었다.

오정숙의 소리내력

선친이 전주거든요, 선친뿐 아니라 조부님 매부터 전주 사셨어요. 대대로, 외가가 진주라서 진주에서 낳았디만 고향은 전주예요. 크기는 소양에서 크고요, 어려서 선친이 저를 업어주고 목마도 태우셨는데, 한 번은 상여가 나갈 때였대요, 경상도 상여소리는 「어화흥 어화홍 어-어 어화홍」하지 않아요. 두 살때인가, 아버님 어깨를 잡고 있는데, 저그서 「어화홍」허니까 아버님 어깨에다 대고 손으로 쳐서 「어화홍」박자를 고대로 집드랍니다. 그래 이놈이 커서 뭐가 될라나, 그러셨대요.

학교는 전혀 다니지 않았고 집근처의 서당에서 한문을 약간 공부했다고 한다. 워낙 깊숙한 마을이어서 학교도 없었거니와, 1930년대 후반의 학교야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그가 판소리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은 열네 살때이다. 아마 해방몇 년 뒤일 터인데, 김연수창극단의 일원이 되어 함께 다녔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동초의 문하에서 벗어난 일이 거의 없다. 다만 전주의 홍정택 선생에게 역사가를 배운 것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고 하였다. 김연수창극단에서 맨 처음 맡은 배역은 흥보의 막내아들 「돌라미」역이었다.그때 열네 살이었는데도 존착해서 여덟아홉 살 정도로 보였다. 그때 김연수의 문하에서 박옥진, 성창순 등과 함께 공부했었다.

열아홉 무렵에 박옥진이 결성한 「삼성」여성국극단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연극에 열중한다. 그 무렴 박옥진은 창극계의 비극의 여왕이라는 별칭으로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함께 활동한 사람으로는 박보화, 조양금 등이었는데 창극을 하다보니 자연 소리는 소홀히 하여 한동안 갈등한 적도 있었다.

서른이 넘어서야 비로소 판소리에 대한 애착이 다시 일어났다. 그 무렵 이리국악원의 김동준 선생이 본격적으로 소리를 좀 하라고 강권하여 새로이 동초 선생을 모시고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 무렵 당시 이리국악원의 총무이던 부군과 만났다. 동초 선생에게 배우기로 작심하고는 돈화문 앞의 종묘에 살던 동초 선생댁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확히 아침 열 시 십 분전이면 찾아 뵌다. 동초는 워낙 꼬장꼬장하여 시간을 어기는 것을 가장 못참아 했다고 한다. 스스로도 약속시간 10분전이면 으레 나가서 기다리다가 약속시간이 딱 넘으면 돌아와버리곤 했다 하니 그 제자가 시간 어기는 것에 대해서는 오죽했겠는가. 쉽게 마음을 트지도 않고 카랑카랑하게 지냈으나 공적으로는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다고 한다.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제자 가르치는 일이었다. 방송국에서 와서 부탁을 할 때, 「나는 제자가 급혀」하고 돌려보내는 것을 오정숙도 여러 차례 목격했다고 한다. 1970년경에 춘향가 한바탕을 떼고, 이리소라단으로 모셔서 흥보가와 수궁가를 한꺼번에 공부했다. 가르치는 욕심도 대단해서 오정숙이 더욱 힘들었다고 한다. 100일을 날을 잡고 하면 그 중에 하루를 빠져서는 안 된다고 엄격한 규정을 만들어 스스로 지켰다한다

오정숙은 특히 실솔성이나 귀곡성은 이제 와서야 그 맛을 느낀다며 동초 선생에게 배웠을 당시가 부끄럽다고 말하기도 한다. 소리가 갈수록 더 어렵다고 말하기도 한다. 언제 신이 났었냐고 물어 보았다. 85년에 베를린에서 열린 호리존테 음악축제에 참여했던 것이 가장 인상적이라고 하며 신바람을 내며 이야기한다.

심봉사가 황성가는 대목을 한 시간쯤 불렀지요. 주최측에서 준비를 철저히 해서 사설을 번역해서 청중들에게 나눠줬대요. 어디서 나무대에 서면 한동안은 떨리는디, 그쪽에 가니까 더 떨리드만요. 한참 지나가니까, 그래도 관중이 좀 뵈이는디, 조용헌 가운데 가사집 넘기는 소린만 싸각싸각 들려요. 그렇게 불러놓고 무대를 내려와서 쉬는디 박수소리가 요란헌 거여요. 빨리 나와서 인사를 받으라고 해서 나가서 인사허고 들어오니까 또 그렇게 박수를 쳐요. 한 이십 분은 장장 기립박수를 받았을 것이요. 그러자 한만영 교수랑 황병기 교수가 앵콜을 받으라고 헙디다. 김동준 선생은 더워서 옷벗고 있다가 허겁지겁 나가서 「어라만수」성주풀이를 불렀디요. 그때야 박수가 그칩디다. 내나라 음악이 내 나라에서 이렇게 환영을 받어야 허는디, 서울에서 이렇게 박수를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그 다음에 베에토벤의 집도 가보고 그렇게 돌아온 것이 기억에 남네요.

참으로 안타깝고 멋진 일이다 어떤가, 오정숙과 베에토벤. 베에토벤과 오정숙 나는 그 두 사람을 동렬에 두고싶지 않다. 민족음악학에서는 이 두 음악세계를 우열의 문제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어떤가. 이 자리에서 오정숙이 「날이차차」하고 소리의 눈을 내어주면 우리는 곧바로 무릎장단으로라도 심봉사의 서글픈 출발에 박수를 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설령 베에토벤의 로망스 선율이 흘러와도 그것이 내마음 저 깊은 곳까지 와서 닿지는 못하고 그저 폼잡기 좋게 눈을 감을 뿐이다.

이번에는 그의 제자들에 대하여 물어봤다. 맨 앞자리에는 이일주를, 그리고 조소녀, 민소완, 고향님, 홍성덕, 전정민, 김명신을 말한다. 은희진, 윤소인, 강정숙, 박방금, 김경숙등의 낮익은이름들도 보인다. 강선숙, 최영란, 김규형, 김해정 같은 참신한 이름도 보인다. 오정숙은 이들 제자들과도 너무 부럽게 사이가 좋다. 이일주나 조소녀가 소리를 할 때도 반드시 「우리 선생님 오자 정자 숙자」를 넣어 올리는데, 오정숙 또한 제자들을 아낀다. 김규형은 동초 선생의 막내아들이라 한다.

사실 이번의 글을 위하여 이일주와 조소녀에 관한 자료도 준비하였으나, 미쳐 그것을 담을만한 빈칸이 없다. 대체로 이들사이의 사제의 정이 유난히 돈독한 것이 부럽기도 하였다. 피와 살은 안섞였어도 친형제 이상으로 다정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니까.

마지막 질문을 하였다.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가. 그는 서슴없이 말한다.

지금까지 백 일 공부를 일곱 번 했는데 세 번을 더해 열 번을 채우고 싶다. 그것도 우리 선생님 생가터를 구입하여 방도 들이고 정자도 지어, 그곳에 기념 유품도 전시하고 또 거기서 백 일간 소릿공부도 하고 싶다.

금산, 우리가 금산의 하늘을 볼 때 잔뜩 흐려 있었다. 그날 밤으로 폭풍주의보가 내린다고 하여, 마지막 배로 금산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녹동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정말 바다에 비가 내렸다. 한 번 젖어 다시는 젖지 않을 소록도에도.
  

  • ?
    김은숙 2003.07.09 14:49
    동초 김연수 선생님의 아버지 묘가 현재 금산면 석정리 명천부락 일명주루묵에 있다.
    거기에 가보면 옛 어른들의 전설 동촌 김연수 선생의 연수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수있다.
    바로 연수 "굴 이야기다.
    현지에 가보면 바다가 보이는 주루묵 산 능선증심부에 (동초김연수) 아버지의 묘 가 있고,
    그 밑으로 해변가에 동초 김연수 "굴 이라고 하는 바위 절벽이 있다,
    옛날 어른들은 동초 김연수 선생이 국악을 하는 이유가 이 연수 굴 이 있어서 인간 무형문화재가
    될것이라고 전설적 이야기가 있다 .
    여기 연수 굴 에 가보면 괴한 바위가 양쪽으로 절벽을 이루고 있으면 바다의 파도가 이 절벽사이로
    들고 나면서 쿵 쿵 소리를 내면서 북,장구 와 같은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그리하여 동촌 김연수 선생의 음악성은 하늘이 주신 천부적 소질를 타고났다고 하는 전설적 이야기가 있읍니다,
    지금도 금산면 석정리 명천마을에 가보면 어른신들 사이에서는 연수굴에 대하여 전설적 이야기를
    들려 주고는 합니다.
    우리가 동촌 김연수 선생을 모시고 자랑스럽게 생각할때 선생님의 조상을 알고,
    선생님의 연수 "굴 에 대하여 한번쯤은 이야기 하면 좋을것 같습니다.
    하늘에서 선생님을 국악인으로 탄생시겨준 현장을 우리 후선이 길이 보존 일명 연수 굴을 금산의 문화유산으로 보존합시다,
    동촌 김연수 선생님 기념관은 고흥에 건립한다고 하는 소식을 든고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우리 금산에 있는 현장 연수 굴을 자랑합시다 .
    그리고 기념관도 연수 굴 있는 곳이 세웁시다.
  • ?
    김상우 2005.01.01 20:15
    2005년새해 첮날
    좀 더빨리 아랏더라면.

    김은숙님 이런마음 간직한 줄 ...........마을에살고있는 한 사람으로써 매우.........
    열렵고 .부꾸럽내요..........
    혼자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세이..........
    하나씨 알고 배위가봅시다......
    김은숙님 동초 김연수선생님의 선친에묘는 석정리가 않니고(신평리명천마을)에
    선친에묘가있습니다
    사진자료는 명천 바다목장홈에오시면 (묘. 굴 .북.북채)있습니다..........
    사진에 북채는 아람느리 동나무가 굴사이에 끼여 있담니다...매우공교롭게도.
?

동초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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