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아파트) 현관에는 3개의 사진 액자가 걸려 있다.
하나는 아들 놈 중학교 입학기념으로 찍은 우리 가족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장모님 생신 때 찍은 우리장모님 배속에서 나온 자식들과
또 그 자식들의 배속에서 나온 자식들이 한사람만 빠지고(내 아들이 군에
가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음) 다 함께 찍었던 사진이며,
마지막 하나는 우리 부모님의 결혼 50주년의 기념행사인 부모님금혼식 날
아직까지 세상에 나오지 못한 내 동생의 둘째(딸)와 셋째(아들)를 제외하고는
그 분들의 직계후손이 전부 모여 찍은 기념사진이다.
(이제는 저세상으로 가신 엄마와 날마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그 사진 덕분이다)
한 부부가 서로 만나 50년을 함께 산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닐진대
우리 부모님은 60년을 함께 사셨다.
그러나 그 60년이 되던 해에 갑작스럽게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져 회혼례(回婚禮)를
치뤄 드리지 못한 것이 지금도 조금은 아쉬웁다.
어머니께서는 그 해 겨울에 병상에 누우시더니 끝내 일어나시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셨으니 금혼식 때 찍은 그 사진이 더욱 더 애착이 갈 수밖에.
쇠머리 우리 집에서 전통 결혼식으로 치루어진 금혼식 장면을 비디오로 녹화하여
지금도 이따금씩 되돌려보곤 하는데 흥겨워하시던 아버지의 모습과 조금은 부끄러운 듯
좋아하시는 어머님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덧 우리의 입가에는 미소가 흐르지만
방송이 끝나고 나면 더욱 어머니가 그리워 지고. 그럼 난 새 색시 마냥 단장한 사진 속의
어머니에게 다가가 말 없는 대화를 나누곤 한다.
요즈음의 젊은 사람들은 자기네 부모님의 회갑이라고 안내장을 돌리고 자기 아들 돌이라고
안내장을 돌리는 등 필요이상의 호들갑을 떠는데 나는 이런 행동들이 선천적으로 싫다.
자기 부모의 회갑이나 자식의 돌은 자기네 가족끼리 오붓하게 모여 축하하고 즐길 일이지
꼭 남에게 알려야 할 일은 아닌 듯 싶은데도 알리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아마 축의금 문제일 것이다.
우리도 부모님의 금혼식 행사를 계획할 때 이 문제가 고민이었다.
형님이 나주에 있는 향교 등을 찾아다니면서 절차를 알아보시는 등 금산에서는 처음으로 시도해 보는
전통 금혼식인데 안내장을 안 보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안내장은 만들되 축의금은 받지 않는다는 문구를 넣는 방법이었고
또 그대로 이행했다. 미처 안내장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축의금 봉투를 내미는 경우가 있었으나
정중히 사양하여 받지 않고 우리가 계획한대로 행사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을
우리는 지금도 떳떳하게 생각하고 있다.
1990년 12월의 어느 날.
우리 집 마당에 푸른 대나무 등으로 만들어진 초례청의 상 위에는 기러기가 한 쌍 앉아 있다.
푸른 대나무는 곧은 절개를 의미하고 기러기는 한번 인연을 맺으면 생명이 끝 날 때까지 짝의
연분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호홀자(결혼식을 진행 시키는 사람)의 낭낭한 목소리에 의하여 금혼식은 시작된다.
신랑 입장!
나이 70으로 비록 조금 늙은 신랑이지만 오늘 만은 가장 행복한 신랑이 얼굴 가득 웃음을
지은 채 당당하게 입장했다.
이어서 신부 입장!
한복으로 곱게 치장하고 연지곤지 찍은 역시 나이 70된 이쁜 신부가 부끄러운 듯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두 딸의 부축을 받으며 나비처럼 입장한다.
사뿐사뿐 입장하고 있는 신부를 바라보는 신랑의 얼굴이 무척 자랑스럽다.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들......
신랑신부 재애배~!
교배례라 하여 신랑신부가 서로 손을 씻고 맞절을 하는 의식이다.
이제 마지막 합근례!
술잔에 술을 따라 서로 한잔씩 권한다. 이는 부부로서의 인연을 맺은다는 의미이고
이어서 표주박으로 다시 한잔씩을 권하는데 표주박은 하나의 박을 둘로 나눈 것이니
부부의 회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카(질녀)의 고천문 낭독에 이어 형님의 가족을 대표한 인사말로 막을 내린
우리 부모님의 금혼식 행사는 실로 우리 금산에서는 처음 시도해 본 뜻 깊은 행사였다고
자부하고 있다.
밤에 가족끼리만 모여 뒤풀이를 하는데
술이 조금은 기분좋게 취하신 아버지께서 자식들에 대한 당부말씀에
이어 부르셨던 노래말 중의 한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꽃도 많지만 그 많은 꽃 중에서 종례화가 제일이더라”
종례는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꼭 그렇게 다정스럽게 사시지는 못 하신 것 같았지만
부부애에 대한 그 깊은 심중을 우리가 어찌 알리요.
요즈음의 아버지는 평소에 잘 못 해드린 것이 늘 마음에 걸리는지
술만 드시면 어머니의 사진을 쓰다듬으며
“나를 두고 어디로 갔는가” 하시며 한숨짓는다.
엄마. 많이 보고 싶습니다.
엄마. 사랑합니다.
하나는 아들 놈 중학교 입학기념으로 찍은 우리 가족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장모님 생신 때 찍은 우리장모님 배속에서 나온 자식들과
또 그 자식들의 배속에서 나온 자식들이 한사람만 빠지고(내 아들이 군에
가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음) 다 함께 찍었던 사진이며,
마지막 하나는 우리 부모님의 결혼 50주년의 기념행사인 부모님금혼식 날
아직까지 세상에 나오지 못한 내 동생의 둘째(딸)와 셋째(아들)를 제외하고는
그 분들의 직계후손이 전부 모여 찍은 기념사진이다.
(이제는 저세상으로 가신 엄마와 날마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그 사진 덕분이다)
한 부부가 서로 만나 50년을 함께 산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닐진대
우리 부모님은 60년을 함께 사셨다.
그러나 그 60년이 되던 해에 갑작스럽게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져 회혼례(回婚禮)를
치뤄 드리지 못한 것이 지금도 조금은 아쉬웁다.
어머니께서는 그 해 겨울에 병상에 누우시더니 끝내 일어나시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셨으니 금혼식 때 찍은 그 사진이 더욱 더 애착이 갈 수밖에.
쇠머리 우리 집에서 전통 결혼식으로 치루어진 금혼식 장면을 비디오로 녹화하여
지금도 이따금씩 되돌려보곤 하는데 흥겨워하시던 아버지의 모습과 조금은 부끄러운 듯
좋아하시는 어머님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덧 우리의 입가에는 미소가 흐르지만
방송이 끝나고 나면 더욱 어머니가 그리워 지고. 그럼 난 새 색시 마냥 단장한 사진 속의
어머니에게 다가가 말 없는 대화를 나누곤 한다.
요즈음의 젊은 사람들은 자기네 부모님의 회갑이라고 안내장을 돌리고 자기 아들 돌이라고
안내장을 돌리는 등 필요이상의 호들갑을 떠는데 나는 이런 행동들이 선천적으로 싫다.
자기 부모의 회갑이나 자식의 돌은 자기네 가족끼리 오붓하게 모여 축하하고 즐길 일이지
꼭 남에게 알려야 할 일은 아닌 듯 싶은데도 알리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아마 축의금 문제일 것이다.
우리도 부모님의 금혼식 행사를 계획할 때 이 문제가 고민이었다.
형님이 나주에 있는 향교 등을 찾아다니면서 절차를 알아보시는 등 금산에서는 처음으로 시도해 보는
전통 금혼식인데 안내장을 안 보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안내장은 만들되 축의금은 받지 않는다는 문구를 넣는 방법이었고
또 그대로 이행했다. 미처 안내장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축의금 봉투를 내미는 경우가 있었으나
정중히 사양하여 받지 않고 우리가 계획한대로 행사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을
우리는 지금도 떳떳하게 생각하고 있다.
1990년 12월의 어느 날.
우리 집 마당에 푸른 대나무 등으로 만들어진 초례청의 상 위에는 기러기가 한 쌍 앉아 있다.
푸른 대나무는 곧은 절개를 의미하고 기러기는 한번 인연을 맺으면 생명이 끝 날 때까지 짝의
연분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호홀자(결혼식을 진행 시키는 사람)의 낭낭한 목소리에 의하여 금혼식은 시작된다.
신랑 입장!
나이 70으로 비록 조금 늙은 신랑이지만 오늘 만은 가장 행복한 신랑이 얼굴 가득 웃음을
지은 채 당당하게 입장했다.
이어서 신부 입장!
한복으로 곱게 치장하고 연지곤지 찍은 역시 나이 70된 이쁜 신부가 부끄러운 듯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두 딸의 부축을 받으며 나비처럼 입장한다.
사뿐사뿐 입장하고 있는 신부를 바라보는 신랑의 얼굴이 무척 자랑스럽다.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들......
신랑신부 재애배~!
교배례라 하여 신랑신부가 서로 손을 씻고 맞절을 하는 의식이다.
이제 마지막 합근례!
술잔에 술을 따라 서로 한잔씩 권한다. 이는 부부로서의 인연을 맺은다는 의미이고
이어서 표주박으로 다시 한잔씩을 권하는데 표주박은 하나의 박을 둘로 나눈 것이니
부부의 회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카(질녀)의 고천문 낭독에 이어 형님의 가족을 대표한 인사말로 막을 내린
우리 부모님의 금혼식 행사는 실로 우리 금산에서는 처음 시도해 본 뜻 깊은 행사였다고
자부하고 있다.
밤에 가족끼리만 모여 뒤풀이를 하는데
술이 조금은 기분좋게 취하신 아버지께서 자식들에 대한 당부말씀에
이어 부르셨던 노래말 중의 한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꽃도 많지만 그 많은 꽃 중에서 종례화가 제일이더라”
종례는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꼭 그렇게 다정스럽게 사시지는 못 하신 것 같았지만
부부애에 대한 그 깊은 심중을 우리가 어찌 알리요.
요즈음의 아버지는 평소에 잘 못 해드린 것이 늘 마음에 걸리는지
술만 드시면 어머니의 사진을 쓰다듬으며
“나를 두고 어디로 갔는가” 하시며 한숨짓는다.
엄마. 많이 보고 싶습니다.
엄마. 사랑합니다.
<우리 부모님의 금혼식>을 마지막으로 쇠머리의 추억을 일단 마칩니다.
지금까지 읽어 주신 향우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
혹시 저의 글로 인하여 명예가 손상되신 분이 있다면 용서하십시요.
글의 의미를 이어 가다보니 뜻하지 아니한 문제가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사족을 달았습니다.
다음에 시간이 허락되면 더욱 좋은 글을 써 보려고는 하나 솔직히
내공이 달려 그렇게 될지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여행기나 간단한 멘트는 계속하여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