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 칠칠하지 못한 놈?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나무라면서 핀잔을 주는 말로
“에이, 칠칠한 놈 같으니라고!” 했거나
“에이, 칠칠하지 못한 놈 같으니라고!” 했다면
어느 문장이 올바른 문장인가?
물론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뒤의 문장이 올바르다는 것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칠칠하다’의 뜻이 아래와 같으니까.
칠칠하다 - ①나무, 풀, 머리털 따위가 잘 자라서 알차고 길다. ②주접이 들 지 아니 하고 깨끗하고 단정하다. ③성질이나 일 처리가 반듯하고 야무지 다. ④터울이 잦지 아니하다.
곧, 위의 핀잔은 풀이 ③에 반하기에 하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인간들은 십(열)은 정상적이면서 완벽한 의미로 이해하고 그 아래 숫자인 칠(일곱)이나 팔(여덟)이 들어가는 단어는 뭔가 정상적인 것보다는 더 못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엄마 배속에서 열 달을 채 못 채우고 태어난 아이를 칠삭둥이나 팔삭둥이라고 하듯이 말이다. 왜 그러한가 하고 생각해 보니 아마 우리가 십진법에 너무 길들여져 있어서가 아닐까?
그래서 칠칠하다의 사용 예를 살펴보았다.
①의 경우 : 검고 칠칠한 머리
숲은 세월이 흐를수록 칠칠하고 무성해 졌다.
칠칠한 나물을 뜯으려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②의 경우 : 칠칠치 못한 속옷 차림
③의 경우 : 칠칠하지 못한 사람.
그 사람만큼 칠칠하고 일새 바른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다.
이렇게 직접 사용 예를 살펴보면 ‘칠칠하다’가 긍정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도 전체적인 문장 맥락은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어떤 일을 조금만 잘못하거나 실수하면 어른들은 노상 ‘칠칠맞은 놈’이라고 나무랐기에 ‘칠칠하다’가 뭔가가 부족한 사람에게 쓰이는 단어라는 인식이 우리 의식에 깊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노라니 갑자기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의 내용 중에 ‘수필은 청자연적이다’라는 글귀가 생각난다. 그 글은 다음은 이렇게 이어졌던가?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으로 된 것으로, 똑 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가 약간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옆으로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과연 그랬을까?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진 그 이유가 나에겐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였을까?
무엇이든지 완벽을 추구하는 나의 편협한 의식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게 한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곡고화과(曲高和寡)라고 ‘곡이 높으면 화답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을 왜 몰랐던가?
또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모이지 않는다.’는 이치를 왜 간과하였던가?
이제부터라도 나도 ‘칠칠하지 못한 놈’이라는 말을 더 좋아하는 여유를 갖고 싶다.
한편, ‘안절부절’이 부사로 쓰이면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양’으로 풀이되는데 그 형용사는 ‘안절부절못하다’로 맞다고 한다.
위 뜻풀이로만 보아서는 ‘안절부절하다’가 맞아야 하는데 그 반대로 ‘안절부절못하다’를 표준어로 정하고 있으니 우리말이 정말 어렵다 어려워!
안절부절못하다 :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
나의 직업상
1년 중 바쁜 달을 살펴보면 1월, 3월, 5월, 7월이다.
이것들을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1월, 7월, 5월, 3월 순이랄까!
이렇게 바쁜 달에는 그에 비례하여 돈이라도 많이 벌면 좋을 것인데
그나마 여의치 않다고 엄살을 부리면
다른 사람들이 초보자의 한심한 투정이라고 욕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