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동네에 한두 대밖에 없는 TV 앞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모여서 숨죽이며 지켜보던 경기가 있었습니다. 춥고 배고프고 내세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던 시절, 거구의 외국인들을 박치기로 쓰러뜨리던 영웅에게 박수를 보내고 기뻐하던 모습을 많은 분들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텐데요.
[시사자키가 만난 사람] 60~70년대 국내는 물론 일본과 미국 프로레슬링계를 휩쓸었던 전설 속의 김일 선수를 모셨습니다.
◎ 사회/정범구 박사>
일본의 전설적인 프로 레슬러였던 조선인 출신 역도산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가 상영되고 있지 않나. 그 영화 속에서 김일 선생님도 두어 번 등장하는데 역도산의 제자였던 분으로서 소감은?
◑ 김일>
나도 영화를 봤다. 영화사에서 연락을 할 법도 한데, 연락을 받은 적이 없어서 실감은 나지 않았다. 스승이었던 역도산은 워낙 미남에다가 체격이 컸다. 처음에 씨름 선수로 있다가 레슬러가 됐기 때문에 흉내를 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영화가 잘 됐다.
여순사건, 6.25 당시 좌익으로 몰리기도
◎ 사회/정범구 박사>
처음에 어떻게 해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됐나. 그 때 여수 14연대, 당시 반란군들이 김일 선수의 고향인 전남 고흥 거금도까지 들어왔었다고.
◑ 김일>
해방이 되고 나서 3년 만에 여순 사건이 일어났고, 또 그 후에 6.25 동란을 겪었다.
그 당시에는 국군이라고 하지 않고, 경비대라고 했다. 나는 친구들에게 경비대에 가야 한다고, 우리도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되자고, 14연대에 입대를 하자는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14연대에 입대를 하려고 했는데, 당시 나는 각시가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나를 열 여섯 살 때 장가를 보내셔서. 그래서 친구들이 너는 집으로 돌아가 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몇 개월 안돼서 14연대를 반란군이라고 하고, 그 당시 경비대, 진압하는 군인을 국군이라고 했다.
그런데 거금도 우리 섬까지 반란군이 들어왔고, 그 중 내 친구들에게 밥을 해먹인 일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군법회의에까지 끌려가게 됐다. 그래서 광주까지 끌려갔는데...
당시 법무관의 모자가 바람에 날려 떨어져서 모자를 주워 먼지를 털어내고 올려놓은 적이 있다. 그것을 보고 법무관이 어떤 종이에 사인을 했는데, 그 사인에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이란 기대를 했다. 결국 그 일을 계기로 내가 석방이 됐다. 그 법무관을 한번 만나고 싶은데 이름도 잘 모르고 찾을 길이 없었다.
또 6.25가 일어났을 때는 고흥까지 인민군이 들어왔다. 그 때는 대구와 부산만 남아있었을 때인데, 또다시 그 일로 좌익 혐의자로 몰려서 생사의 기로에 섰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좌익과 가까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전부 보도연맹이라고 조직했고, 그런 사람들을 일주일에 한번씩 경찰지서에 모았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20년 이상 형을 받았던 사람들은 다 살아남았는데 지방 형무소에서 좌익으로 몰렸던 사람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런 가운데 어떻게 무난히 살아남았지만 도저히 직장을 구할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여수에서 선원들이 많이 오가는 것을 봤다. 그들이 보는 잡지책에서 역도산을 알게 됐다. 일본 사람들은 천황 이름은 몰라도 역도산은 알 정도라고. 역도산이 그 정도로 위대하다기에 한국사람이라면 한번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밀선을 타게 됐다.
조선인 출신 역도산 찾아 일본으로 밀항
◎ 사회/정범구 박사>
결국 일본까지 무사히 도착했는데 동경에서 잡히게 된 건가.
◑ 김일>
국교가 정상화되기 전이니까 밀항 밖에는 없었다. 동경까지는 잘 들어갔는데 출입국 위반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일반 경찰에 수감이 돼서 1년 가까이 있었다.
그 때 마지막으로 역도산 선생님한테 편지나 한번 써봐야겠다 싶어서 편지를 써서 간수에게 줬는데, ‘너 까짓 게 역도산 선생을 어떻게 아냐’고 비웃으면서 상대를 안해주더라.
그래도 어찌 어찌 사정을 해서 편지를 보냈는데, 역도산 선생이 어찌나 유명했던지 ‘동경 역도산’이라고만 썼는데도 편지가 들어갔다(웃음).
내 편지를 받은 선생님은 당시 정권을 잡았던 자민당 부총재 오노 반보쿠에게 내 이야기를 했고, 그 때문에 나는 그 날 바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 때는 일본의 정치가들이 역도산의 경기를 아주 좋아했을 때다.
◎ 사회/정범구 박사>
역도산의 1기 문하생으로 들어간 셈인데.
◑ 김일>
처음 만난 선생님은 너무 무서웠다. 선생님은 날 보고 ‘현해탄을 건너 온 이상 어떠한 고통이 있어도 참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 사회/정범구 박사>
역도산은 그 때 까지도 자신이 조선 출신이라는 것을 안 밝히지 않았나.
◑ 김일>
안 밝혔는데 뒤에 알아보니까 스모 협회에 호적등본이 다 와 있었고, 한국 사람이고, 함경남도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는데, 국민들에게는 쉬쉬했다. 일본이 백인들에게 얼굴을 못 들고 있을 때 사각 링에서 백인들을 KO시켜버리고, 일본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니까.
◎ 사회/정범구 박사>
역도산은 일본 사회에서도 자신이 조선 출신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는데, 한국에서 건너온 김일 선생에게 특별히 따뜻하게 대하거나 다른 제자와 다르게 한 것이 있나.
다쳐 꿰맨 상처 또 때리며 박치기왕으로 단련시킨 스승
◑ 김일>
역도산은 내게 매우 엄하게 연습을 시켰다. 연습이나 시합을 하다가 머리나 무릎이 다쳐서 병원에서 상처를 꿰매 오면 상처가 난 자리를 무조건 다시 때려서 그 자리가 다 터졌다. 하여튼 무서운 양반이었다.
그러다가 63년도 9월 중순에 LA에서 WWA 시합을 하려고 미국에 갔는데, 가기 전날 선생님이 자신의 오픈카를 태워줬다. 그 당시로는 기가 막힌 차였다. 또 우리는 감히 갈수도 없었던 ‘히메’라는 고급술집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술 한잔 하라고 주시는데 선생님을 따라간 이상 무슨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싶어서 한국식으로 돌아서서 고개를 돌리고 먹는 척을 하면서 그 술을 전부 배에 쏟았다. 권총이면 모르겠지만 칼로 선생님에게 누군가 무슨 일을 저지르면 방어해야겠다 싶어서.
챔피언이 되던 날 스승은 떠나가고
◎ 사회/정범구 박사>
김일 선생이 미국에 가서 챔피언이 됐지만, 만약 그 시합에 가지 않았더라면 역도산이 술집에서 그렇게 야쿠자에게 칼을 맞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시는 것 같다.
◑ 김일>
때로 그런 생각을 많이 해 본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 필요도 없는 이야기가 됐지만.
내가 챔피언이 된 날 역도산 선생이 칼에 맞았다. 선생을 후원하던 신문사인 도쿄 스포츠에서 12월 13일에 전화가 와서 선생님이 완전히 회복이 됐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틀 후 15일에 선생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 사회/정범구 박사>
역도산 영화를 보면 역도산이 칼에 찔린 후 돌아가시기 전에 김일 선수가 병상에서 병문안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그 때 LA에 계셨던 건가.
◑ 김일>
실제 나는 LA에 있었다. 나는 선생님 돌아가신 것이 항상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 때도 울었지만, 내가 미국에 가지 않았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 살아계셨을 때는 도쿄 재벌과도 맞선다고도 하고, 그런 사고가 없었으면 벌써 정치가가 됐을 분인데.
◎ 사회/정범구 박사>
김일 선수하면 박치기 왕이었는데, 박치기는 누구에게 전수를 받은 건가.
◑ 김일>
나는 유도로 치면 꺾기를 아주 좋아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이 나에게 박치기를 하라고 했다. 그 말씀 한마디에 박치기를 하게 됐다. 선생님 손이 굉장히 컸다. 그 손으로 골프채며 재떨이로 머리를 때렸다. 거기에 맞으면 머리가 핑핑 돌 정도다. 선생님은 그렇게 박치기를 하라고 나를 단련시켰다.
◎ 사회/정범구 박사>
그러다가 한국에 완전히 들어온 때가 65년경이었나?
◑ 김일>
64년도 텍사스에 있다가 잠깐 한국으로 나왔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일본 사람들이 그 회사의 주권을 전부 잡고 있을 때인데, 역도산 제자들 사이에 파벌이 생겨서 안토니오 이노끼가 한 파를 만들고 바바하고 요시마시가 한파를 만들어서 서로 나에게 와달라고 사정을 했다. 언제는 필요 없다고 쫓아냈던 사람들이... 결국 선생님이 만들어 놓은 회사로 갔는데 말도 못할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다.
◎ 사회/정범구 박사>
그 길을 간 것에 대해 후회한 적은 없었나.
◑ 김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운명이었다면 선생이 안 돌아가셨어야 한다. 내 운명은 선생님에게 달려있었으니까. 안돌아가셨으면 이시하라 신타로 선생이 당선되듯이 역도산 선생은 전국에 표가 있으니까 그 정도는 나왔을 것이다.
◎ 사회/정범구 박사>
역도산은 일본에서 스모 선수를 하다가 프로레슬링을 창설해서 돈도 많이 벌지 않았나. 김일 선수도 한국에 들어와서 프로 레슬링 붐을 일으켰는데 그 때 수입은 좋았나.
◑ 김일>
좋았지만 좋다고 해서 혼자 주머니에 넣을 수도 없는 거고. 일본에서 그간 팬이 조금 생겨서 돈을 빌릴 수 있는 정도의 신용은 있었다. 그래서 잠실에 땅을 살까 생각도 했지만, 그 때 굉장히 한해가 심했다. 당시는 공장도 없었고, 농사가 최고였는데 비가 안와서 양수기를 사서 정부에 기증을 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양수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물로 양수기를 만들 때라 많이 만들어봤자 50대였다. 선생님 돌아가시고 나니까 욕심도 아무 소용이 없고 나도 농민의 아들로서 그래야 된다 싶어서.
◎ 사회/정범구 박사>
한때는 일본에 활어를 수출하는 수산업도 하지 않았나.
◑ 김일>
그걸로 망했다. 수산업이라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일인데. 내가 고향이 섬이었기 때문에 수산업이 머리에서 안 떠나서. 수산업이라는 것은 미리 다 돈을 주고 잡아 오면 받는 식이 돼서 못 잡았다 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한 때는 속초에 명란공장을 크게 지어서 일본에 수출도 했다. 배가 8척이나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세운 김일 체육관, 전두환 대통령 당시 문화 체육관으로
◎ 사회/정범구 박사>
레슬링 할 때는 박정희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고.
◑ 김일>
박대통령은 원체 레슬링을 좋아하셨다. 한번은 전두환 대통령이 군포에 여단장으로 있을 때인데, 동생 전경환씨와 함께 인사를 하러 간적이 있었다. 그 때 전 대통령이 ‘각하. 레슬링은 쇼인데 뭣하러 보십니까’라고 했다가 박대통령한테 혼이 난 일이 있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있을 때인데 그 말을 들어 보면, 그 때도 전대통령이 청와대를 왔다갔다 한 것 같다.
◎ 사회/정범구 박사>
박정희 대통령 당시에는 체육관도 지을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다는데,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체육관을 빼앗긴 것 아닌가.
◑ 김일>
전두환 대통령은 레슬링을 쇼라고 생각을 한 것 같다. 정동 MBC 옆에 김일체육관이라고 있었는데, 김일 체육관은 없어져 버리고 문화 체육관이 됐다.
◎ 사회/정범구 박사>
실제로 현역 생활에서 은퇴하신 것이 언제인가?
◑ 김일>
박정희 대통령이 79년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80년도에 전두환 대통령이 대통령을 하면서 프로레슬링은 완전히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80년대 들어서서 시합을 안하고 TV 중계를 안하니까 자연히 소멸되다시피 했다.
진돗개 동상에 얽힌 사연
◎ 사회/정범구 박사>
고향에 김일 선수의 공덕비와 기념관이 설립됐다고 하는데.
◑ 김일>
한번은 박정희 대통령께 사정을 한 적이 있었다. ‘내 고향은 섬이고 김이 많이 생산되는 곳인데 전기가 아직 안 들어온다. 컴컴한 부두에 전기불이 들어오면 많이 발전될 것’이라고 했는데, 바로 조사를 해서 전기가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내게 아주 기막히게 좋은 선물을 많이 했다.
◎ 사회/정범구 박사>
그 옆에 진돗개 동상이 같이 있는 이유는?
◑ 김일>
초등학교 때 우리 집에 아주 이쁜 개가 한 마리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개 껍질로 방한모자 같은 것 만든다고 해서 개도 공출을 했다. 집 근처에 큰 다리가 있는데 거기에서 개를 목을 졸라 죽였다. 거기로 잡혀간 우리 개가 집으로 다시 도망쳐 왔는데, 그 사람들이 또 잡으러 쫓아오니까 개는 내가 자기를 아끼는 줄 알고 나한테 안기고, 잡으러 온 사람들은 줄을 들이대고 그 개의 목에 걸라고 난리를 쳤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개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고, 개도 희생자다 싶어서 삼중 스님한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조그만 비석하나 세워주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조그맣게 세우게 됐다.
◎ 사회/정범구 박사>
선생님은 지금보다 어려운 시절을 몸소 겪으며 살아왔는데. 요새 이 어려운 시대에 어렵다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말씀 한마디 해주신다면.
◑ 김일>
내가 좋은 말을 할 자격도 없지만, 나는 일정 때 먹을 것이 없어서 소나무 껍질까지 먹어봤다. 요즘 우리나라가 엄청나게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 사이가 너무 먼 것 같다. 좀 좁혀져야 하는데. 대통령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이 간섭을 해서 해결해 줄 것으로 믿지만, 그런 것을 보면 우리들이 겪은 것보다 더 험한 것 같다.
▶진행:정범구박사
2004년 12월25일 "cbs 시사자키 오늘과내일"에서 방송된 자료입니다.
당시 자료를 다운받아 계정에 업로드 해놨는데 게시판에 왜 올려놓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늦게나마 올립니다.
위에 올린것은 사진몇장과 함께 동영상으로 편집해 놓은것이고 mp3파일은 아래 링크에서 다운받아 저장 또는 휴대하시면 되겠습니다.
여건이 되시면 12월17일 체육관 개관식때 육성을 들려주시면 더 좋을것 같습니다.
http://www.mediafire.com/?vw4dn8byc5r872n
어느신문에 김일체육관 개관식 기사가 오늘 새벽에 실렸습니다.
[호남] 고흥 거금도에 '김일 체육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