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날려 버릴 것 같은 세찬 비바람과 온 길을 하얗게 뒤덮어 버린 눈은
대나무 비닐우산보다 여린 소년을
아버지와 담임선생님의 엄한 눈길보다 더욱 무섭게 했지만
그러나 학교는 가야만 할 곳이었습니다.
일원이면 몇 개를 먹을 수 있었던 금산 장날의 풀빵과 광고 앞의 호야빵과
그리고 서방 팥죽거리의 팥죽 맛을 잠시나마 잊게 하였지만
그 맛을 오래 간직하지 못하고
소년은 다시 평지 다리께 도라무깡집의 풀빵 맛을 알아야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사시던 집마저도 팔아야 했던 아버지께서
부끄럽지 않으신 마음으로 지으신 문중 제답이
세찬 홍수에 논둑이 터졌을 때
서툰 지게질로 아버지를 돕다가 다친
허리의 통증은 소년을 몇 개월째 자리보전시키더니
어느덧 인생의 동반자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제는 더 도망갈 곳이 없어 내게 왔다가 되돌아간
친구녀석의 시신이 어느 야산에서 발견되었다는 통보를 받고도
직장의 채용시험에서 우리나라의 국시를 반공이라고 쓸 수밖에 없었던
청년은 속으로 속으로만 꺼이꺼이 울면서
논산으로 달리는 입영열차에 몸을 실어야만 했습니다.
김일성을 때려잡고 공산당을 쳐부수자고 악을 쓰며 뒹굴다가
지금의 나보다도 더욱 나이 먹어 보이는 전역특명 받은 고참병의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신고합니다’로 시작한
신참생활은 선임병들의 연애편지 대필로 하루를 마감하곤 했는데
어느 아침 구보 길의 교통사고는
열다섯 달 만의 첫 휴가라는 달콤한 사탕을 먹어보지도 못한
나를 또 다시 여덟 달 동안의 병상으로 밀어 넣었지만
그러나 다시 일어나 달리기는 계속하여야 했습니다.
소채류와 고기류 등을 납품받아 경상북도 병력의 부식을 책임진 부대의
육군병장 김 병장, 고참병장 김 병장은
숨겨놓은 금송아지 한마리도 없는 고향의 집을 그리며
군화 뒤축이 빠진 줄도 모르고 이 공장 저 공장을 뛰어다니면서
모자챙에 그려 넣은 79년 3월의 달력의 숫자 하루하루를 지우고 있었지만
그러나 아직도 가야 할 두렵고도 먼 길이 있었습니다.
‘이 고사장에서 1명이 합격하던지 1명도 합격을 하지 못한다’는
필기시험감독관의 말과 이제 갓 학교를 졸업한 젊은 응시생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나를 질리게도 하였지만
육군병장 김 병장도 녹록하지 않다며 이를 앙다물며 버티고
‘이번 시험에 떨어지면 어떡하겠느냐?’는 애간장 태운 면접관의 질문에
‘내년에 또 도전하겠다’는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떤 길일까요?
6.29선언을 이끌어낸 함성을 함께하다가 수감되기도 하는 등
온갖 영욕의 부침 속에서
이제는 낡아져 가는 육신이지만
아직도 다 못 간 나의 그 길을 가기 위하여
한 밤에도 식지 않은 여름날의 열대야와 씨름하며
오늘도 나는 이렇게 몸부림치고 있나 봅니다.
올 여름에 다시 도져
몇 날을 한의원에 다니면서 침을 맞고 우선해졌습니다.
정말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하고
많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자신을 비우자!
저는 그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실행해 질지는 의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