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쑥한 양복 차림의 한국인들이 다녀가면 스승 역도산은 오오노 반쿠보와 따로 만났다. 일본의 대표적 우익 정치인이었던 오오노는 스승의 레슬링 후원자였다. 두 사람이 만나서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달여 만에 그 내용을 알았다.
스승은 1963년 1월 7일 약혼식을 올린 다음날인 8일 어디론가 황급히 출장을 갔다. 대개 레슬링 경기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서면 간편한 세미 정장 차림이지만 그날따라 스승은 마치 파티장을 가는 복장이었다.
스승은 집을 나서기 전 나를 불렀다. "나, 한국에 간다. 절대 비밀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난 그 말을 듣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난 스승이 한국을 방문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난 스승이 왜 한국에 가는지 궁금했다. 경기하러 간다면 한국인인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경기하러 가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왜 한국에 가는 것일까. 난 모기만한 소리로 스승에게 물었다. "한국은 왜 가시는지요?" 스승은 "차차 알게 된다"란 말을 한 후 "더 이상 묻지도 말고, 아는 척도 하지 마라"고 거듭 강조했다.
스승의 한국행은 한·일 막후 교섭을 위해서란 소리를 들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국교가 수립되지 않았다. 36년 동안의 일제 강점기로 인해 양국의 국교 수립은 순탄치 않았다. 한국 정부든 일본 정부든 그 숨통을 틀 수 있는 막후 해결사가 필요했다. 그 해결사가 스승이었다. 스승은 당시 박경일 문교부 장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 방문에는 비서였던 요시무라 요시오만 수행했다.
외형상 문교부 장관의 초청이었지만 사실은 중앙정보부 초청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스승은 당시 서울을 방문하면서 중앙정보부 관계자와 군부 인사들을 만났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김재춘씨다. 또 거물급 정치인 김종필씨도 포함됐다. 스승은 이외에도 대한체육회를 비롯한 스포츠 단체 관계자 임원들도 만났다. 아마도 1964년 동경 올림픽 참가 협의를 위해서라 생각된다.
난 당시 스승의 한국행을 전해듣고 개인적으론 이런 의문점을 가졌다. 스승의 고향은 이북 함경도다. 그렇다면 스승이 이북을 먼저 방문할 줄 알았는데 왜 한국을 먼저 방문할까?
스승이 한국을 찾았을 때는 한국전쟁이 휴전된 지도 10년이 흐른 해다. 남북한 이데올로기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때다. 북측으로선 스승을 먼저 초대해 체제 싸움에 선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도 스승이 한국을 먼저 찾았던 것은 정치적 이해와 당시 시대적 상황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스승도 한국으로 가기 전 어디로 먼저 갈지 많이 고민했지만 결국 한국행을 먼저 택했다.
스승이 남한을 먼저 방문한 것은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한국 정부는 다양한 채널을 동원, 스승의 한국 방문 성사를 위해 애썼다. 스승이 한국을 먼저 방문토록 중간 노릇을 했던 사람이 오오노다. 한·일 교섭을 위해서였다. 오오노의 강력한 천거로 인해 스승은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한국행을 택했다.
스승은 한·일 간 국교 정상화와 관계 회복을 위해 숨은 스파이 노릇을 했다. 스승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판문점을 방문했던 것으로 안다. 스승은 남북의 허리가 잘린 그 판문점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때 스승은 북한도 방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나아가 한·일 교섭은 물론 남북 통일을 위한 막후 노릇을 한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 <계속>
[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67]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 김종필 자민련 전 총재(왼쪽)와 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오른쪽)과 함께 나란히 찍은 나.
김 전 총재는 나의 후원회장도 역임했으며 1960년대 국내 프로레슬링 발전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스승은 김 전 총재와도 만나 한·일 수교 막후 교섭 역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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