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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68]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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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 역도산은 한국을 방문하기 전 한국 정부에 일종의 옵션을 걸었다. 판문점을 간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위험성을 이유로 애초 이를 거절했던 것으로 안다. 그러나 스승은 반드시 판문점을 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한국 정부는 스승의 뜻이 완강해 허용했다.
 
나 역시 이국땅에 살면서 늘 고향을 그리워 했다. 아무리 터프한 스승이라도 스승도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고향 산천을 그리워 하고 형제들을 보고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죽을 때가 되면 자신의 고향을 둘러본다고 한다. 스승은 1963년 12월 죽음의 그림자를 예견했는지 고향은 가지 못하더라고 그 근처에 가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판문점 행을 고집하지 않았나란 생각도 해본다.
 
난 스승이 한국서 누구를 만났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모르지만 비서였던 요시무라는 나와 스승이 동포라서 그런지 내게 만은 상세히 설명해줬다. 스승은 판문점을 갔다온 후 남북의 갈라진 상황이 너무 가슴이 아파서인지 호텔방에서 혼자 양주를 들이켰다고 한다.
 
스승의 판문점 행에는 중정 요원들도 동행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스승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북한경계선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서서 양팔을 벌려 무슨 소리를 크게 질렀다고 한다. 스승은 "형님"이라고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스승은 형을 보고 싶어했다. 형은 스승이 프로레슬러가 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던 것으로 안다.
 
그러나 남북의 철책선은 더이상 스승의 방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스승은 판문점 방문을 통해 민족이 둘로 갈라진 사실을 뼈저리게 통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철책선을 갈라 반드시 남북통일을 실현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스승은 한국을 갔다온 후 북한을 방문, 남북 통일 그리고 북일 수교까지 생각했다. 만약 스승이 북한을 방문했다면 남·북과 북·일 관계가 어떻게 됐을까. 당시 북한에선 스승의 인기가 일본 못지 않았다. 스승이 미국인을 쓰러 뜨린 것은 일본인들만 통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미국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갖고 있는 북한도 미국인을 쓰러뜨린 것에 대해 통쾌히 여겼을 것이다. 더욱이 김일성 주석이 스승의 열렬한 팬이었다. 스승이 북한을 먼저 방문했다면 남한을 방문했을 때보다 더 환대받았을지 모른다.
 
스승은 한국 방문 이후 두마리 토끼를 잡고 싶어 했다. 한·일 국교 수립과 남북통일이었다. 스승은 한국을 갔다온 후 민단과 조총련 간부와 수차례 만났다. 그들과 차 한잔 마시기 위해 만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민족이 갈라진 실상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을까 하면서 해결책을 내놓았다.
 
스승이 내놓은 해결책은 남북을 오가면서 프로레슬링 대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스승은 농담섞인 말로 "남한과 이북에서 레슬링 한번 해보고 싶지 않는가"라며 내 마음을 떠보기도 했다. 스승은 나를 급성장 시켜 한국으로 파견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내가 일본에서 더욱 승승장구 하기를 바랐다. 스승은 이런 것을 오오노씨와 상의했다.
 
그러면서 스승은 김일성 주석에게도 큰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선물은 차였다. 차종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벤츠가 아닌가 싶다. 스승은 차와 함께 김일성 주석에게 극비 서신도 띄웠다. 그 서신 내용이 뭔지는 모르지만 스승이 "남북통일"이란 말을 많이 사용해, 아마도 "남북통일"이라 써서 보냈지 않았나 생각된다.

스승은 남북통일을 위해서 내 한몸 불사르겠다고 했다. 마치 통일의 전사처럼<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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