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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65]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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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이 프로야구로 한국인의 자존심을 드높였다면 난 프로레슬링으로 한국인의 기개를 세웠다. 1960년대 재일 한국인이 일본에서 당했던 설움과 차별은 당하지 않았으면 모른다.

 

난 장훈이 프로경기에 출전하는 날이면 역도산도장 문하생들과 어울려 경기장을 찾곤 했다. 장훈이 타석에 들어서면 우익 성향이 강한 관중은 어김없이 이런 식으로 야유한다. "우~우~우~, 조센진 돌아가라, 돌아가라." 여기에 안타를 치고 타자를 불러들이면 "조센진, 마늘 냄새난다. 조센진에게 안타를 허용하다니, 다음엔 반드시 조센진은 잡아야 한다"는 등 민족과 개인 감정을 건드리는 수많은 야유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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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초 여름철 하계 훈련을 갔을 때다.
역도산 문하생인 우리는 동경 인근의 한 해안가로 훈련을 갔었는데 그물을 잡아당기며 힘자랑을 하곤 했다.
그때 고기를 배가 터지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맨 앞이 나다.


 
그런 소릴 들을 때면 난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나와 함께 경기장에 온 안토니오 이노키와 요시무라 선배와 '털보' 맘모스 등은 "그런 소리에 신경 쓰지마"라고 한마디씩 거들지만 그런 그들의 위로로 기분이 풀릴 리 없다. 관중석에서 민족을 비하하는 소리를 들으면 솔직히 그 관중에게 달려가 한 방을 날리고 싶은데 당사자인 장훈은 오죽했겠는가. 장훈은 나를 만나면 "언제쯤 그런 소릴 듣지 않겠습니까"라며 푸념 섞인 말을 한두 번 내뱉은 적이 아니다.
 
나도 그런 차별적 언사를 받았던 기억이 많다. 경기를 하기 위해 링에 오르면 "조센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더러는 "조센진, 힘내라"고 하기도 한다. 나를 프로레슬러로는 인정하지만 조센진은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일본 선수를 일방적으로 이기자 "조센진에겐 이겨야 해"라는 고함이 터져나왔다. 난 그런 차별적 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힘이 솟았다. 그리고 그 분풀이를 상대에게 했다. 허리를 뒤로 제친 후 더 힘껏 박치기를 터뜨렸다.
 
만약 일본인들의 차별적 야유를 가슴에 담고 있으면 병이 된다. 경기와 동시에 그런 소리를 잊는다. 잊는 것을 습관화하며 살았다.
 
장훈도 마찬가지였지만 차별과 설움을 이기기 위해선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난 일요일에 장훈과 역도산도장에서 마주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장훈은 도쿄에 원정 와 우천 관계로 경기가 열리지 않으면 어김없이 도장에 나타나 체력 훈련을 했다. 나 역시 체력 훈련하러 도장에 가면 장훈과 만났다.
 
그때만은 신바람이 나 훈련했다. 그리고 훈련이 끝나면 인근에서 맥주 한잔을 마시는 것도 훈련 일과 중의 하나였다. 이국에서 동포를 만나 맥주 한잔 마시는 것은 너무 기분이 좋다. 우린 반드시 성공하자고 서로를 격려했다.
 
우린 서로가 그 약속을 지켰다. 1961년 이후 장훈은 최고 타자 자리를 굳혔고, 난 프로레슬링 선수로 입지를 다져 갔다. 1961년 이후부터는 거의 3일에 한 번꼴로 링에 올랐다. 또 1962년에는 200여 차례 링에 올랐다. 솔직히 밥 먹고 링에만 올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 열 번 링에 오르면 한 번 패할까 말까 할 정도로 막강했다.
 
내가 연승 행진을 하면서 스승 역도산은 내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때 스승은 나와 자이언트 바바·안토니오 이노키를 차세대 스타로 육성하려는 계획을 세워 놓았다. 그들도 나와 함께 거의 매일 링에 오르다시피 했다.
 
말이 이틀에 한 번꼴이지 몸이 골병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린 몸이 쑤시고 찢어져도 아프다는 표정 한 번 짓지 않고 링에 올라갔다. 스승은 우리 세 사람 중 한 명이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 나면 세계 챔피언에 도전케 하고 또 후계자로 키울 작정이었다. 스승은 가끔 나를 불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는 말을 하곤 했다. 마음의 준비란 극한의 상황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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