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의 특산품 김에 대해서 몇 마디 더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김의 셈 단위는 10장을 한 매, 100장을 한 속(톳이라고 함), 10속을 한 통, 100속을 한 개라고 하는데 보통 한 속 단위로 하여 묶는다.
보통의 집에서 하루에 생산하는 김의 량은 두통 내지 두통 반, 조금 많은 집이 세 통이 조금 넘는다.
순전히 자연의 힘에 의하여만 생산해야 했으니 생산량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1980년부터 생산 량이 비약적으로 많아진다).
추운 겨울이지만 한 낮에는 겉옷을 벗어야 할 정도로 따뜻한 건장에서 잘 마른 김은 발장과 분리되 어 한 매 단위로 차곡차곡 쟁여진다. 이렇게 하는 것을 '몰른건장'이라고 했다.
약 한 통 내지 한 통 반 정도의 분량을 한 둥치로 묶어 집에서 통풍이 잘 되며, 습기가 없는 마루 등 에 보관한다.
이러한 둥치가 계속 쌓여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네 부모들은 그 추운 겨울의 그 고생스 러움을 이겨 내시곤 하셨을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와 그 이전에는 김을 일본으로 수출하였다 한다.
그 때는 김을 거의 전량 수협에서 수집하여 수출을 대행을 했던 것 같은데 김을 수집할 때는 검사원이 와서 등급을 매긴다. 수협에서는 언제가 검사일이라고 미리 통보를 해 준다. 보통 한 겨울에 3~4번 정도였다.
이제 검사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까지 힘들게 생산한 김을 예쁘게 결속하여야 한다.
결속이란 김을 100장 단위인 한 속으로 묶는 일로 맞선 보러 나갈 딸을 단장시키는 것 보다 더 정성스럽게 작업을 한다. 그 묶는 띠를 ‘속지’라고 하 였으며 거기에는 생산자 표시를 하게끔 되어 있었다.
먼저 한 매를 반으로 접는다. 이 반으로 접은 한 매를 10개 합하면 한 속이 된다. 그 한 속을 잘 맞추어 접힌 반대부분과 양족 끝을 톱으로 썰어내고 마지막에 강판으로 밀어 반듯하게 다듬어야 한다. 그렇다고 잘 다듬기 위해 많이 썰 어내고 할 수도 없다. 곧, 수협에서 정하고 있는 일정한 크기 및 일정한 무게 이상을 유지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집에는 아주 가벼운 물건의 무게를 달 수 있는 작은 저울이 필수품이었다.
이렇게 한 속, 한 속 결속을 하여 100속, 즉, 한 개가 되면 김을 담기 위하여 만들어진 나무 상자(해우 궤짝이라 하였음)에 담는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게 다 돈이니까.
우리 집은 한 번 결속하면 보통 얼마정도 되었는지 너무 어렸을 때의 일이라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하루의 생산량을 감안하여 추측 하여 볼 진데 두 개(200 속)는 조금 넘었을 것 같다.
오늘은 검사일이다. 맞선보러 나갈 딸처럼 곱게 다듬어 놓은 우리의 김이 검사를 받는 날인 것이다.
김 상자를 지게에 올리 시는 아버지의 얼굴표정이 비장하다. 좋은 등급을 맞아야 할텐데. 아마 딸을 맞선보러 내보내는 심정 이었을 게다.
김의 등급은 제일 좋은 것을 특으로 하여 그 다음이 송, 또 그 다음이 죽, 매 까지의 수출품이 있었고, 나머지는 등외 1, 2, 3으로 나뉘어 7등급으로 되어 있었다. 등외품은 국내에서 소비되어 수출품과는 값이 많이 차이가 났다.
그래서 그 날 특급 판정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검사원을 포함한 수협 관계자 들에게 막걸리 등을 대접하곤 했다.
후에 일본에로의 김 수출이 막히자 값이 많이 하락하였지만 그래도 김은 여전히 우리 부락의 주 수입 원이었으나,
80년대에는 대량생산체제로 바뀌어 김 생산을 계속하는 사람과 포기하는 사람으로 나뉘었고,
계속하여 김 생산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 나다가 언제부터 인가는 우리 쇠머리에서 김을 생산하는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도 서남해안의 일부지역 및 서해안(부안지역)에서는 김을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금산에서 해태자동건조기 및 부류식해태망을 맨 처음 선보인 사람이 신촌의 이재훈씨. 바로 이양호의 아버지이시니 내게는 장인어른 되시는 분이다.
1980년 겨울. 신촌 해태종합처리장에서의 1일 생산량은 평균 2,000속. 수동으로 생산하는 보통의 집에서 20속 정 도를 생산한 것에 비하면 100배 정도인 엄청난 량이었다.
나는 그 때 김 공장의 내부관리를 맡았는데 김 양식장에 대하여는 큰 아크릴에다 김 양식장의 모형(어장도)을 그려서 관리하였다. 김을 채취하는 직원에게서 그 날 그 날의 채취 구역을 보고받아 어장도에 채취일자를 기록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관리가 되지 않았다.
내가 고안한 내 방식대로 계속 그렇게 관리를 하다 보니 이제는 사무실에 가만 앉아 있어도 오늘은 어느 구역 어느 지점에서 김을 채취하고 있는지 알수 있게 되었고, 내일은 어느 구역, 모래는 어느 구역, 그리고 한 번 채취가 끝난 곳은 몇 일 만에 다시 채취가 가능한 지 등 관리가 가 능하여 져 이제는 채취계획을 내가 세워 채취 담당 직원에게 다음의 채취 구역을 지시할 수 있게 되었다.
바다에서 채취하여 냉장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생김도 재고 관리가 필요하지만 공장에서 매일 매일 생산된 마 른김도 재고관리가 중요하였다. 생산된 김을 결속하는 일은 동네의 나이드신 어른들에게 맡겼다. 매일 매일 생산된 수량이 2000속 정도이니 100속 묶음의 박스로도 20여개에 달한다. 혹시 수량에 실수가 있을까 봐 박스포장은 내가 도맡아 했다. 그 결과 나는 훗날 집사람에게서 ‘포장전문’이라는 훈장을 받기도 했으니. 날마다 쌓여가는 박스에는 일련의 번호가 매겨지며 그날 그날의 생산일보에 기록되어 진다.
이제 더 쌓을 수 있는 공간이 없어지면 우리는 그 김을 고흥 수협에 위판을 하여야 한다.
주로 녹동위판소를 이용하였으나 그 어떤 청에 의하여 가끔씩은 대흥위판소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내가 금산을 떠난 1981년에도 김 생산은 호황을 누렸는데 그 다음해 부터는 조금씩 조금씩 삐거덕거렸다.
그 이유는 가족사인 관계로 생략한다.
지금도 둘째처남이 살고 있는 그 공장엘 가보면 그때 내가 만들어서 붙였던 <사무실>이란 표지판과 <냉장실> 이란 표지판이 그 때 그 자리에 그대로 붙어있다.
20년도 훨씬 더 지난 옛 이야기지만 지금도 한가지 우스운 일은 그 때 내가 만들었던 공장의 장부는 복식 부기를 이용한 수준 높은(?) 기록이었는데 글쎄! 부기의 부자도 모르는 겨우 엉터리로 현금출납부나 만들 수 있는 실력의 소유자인 조그마한 건설업자의 경리사원이 내가 만든 그 장부에 대하여 감사(?)를 했단다.
그 장부를 감사했다는 그 시점에 나는 세무서에 근무하면서 그네들이 만들어 놓은 허술한 장부를 조사하 고 다녔는데......
이제 김에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마지막으로 마치고자 한다.
용돈이 궁한 우리들은 그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마루에 쌓여 있는 김 둥치에서 조금씩의 김을 슬쩍하였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도 몇 번인가에 걸쳐 조금(어린 시절이라 20장 이상은 할 수도 없음) 훔쳐 낸 기억 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 마눌님도 겨울방학 중에 집에 와 있는 지네 오빠한테 김을 많이 훔쳐 줬 다고 덩달아 얘기한다. 자기가 부엌 책임자였으니 김이 쌓여 있는 마루에 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었다는 지위를 이용해서. 혹시 내 돈도 나 모르게? 그렇게라도 해서 나 모르는 돈이라도 있으면 엄청 좋 겠는데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어찌 숫자에는 도통한 나의 주머니를 노릴 수 있으리요!
각설하고,
어느 날 김대용 씨(미숙이 아버지)가 바다에서 해우를 해가지고 집에 막 도착 했는데,
그 집 막내동생(당시 20세 이쪽 저쪽의 청년인 김덕용님으로 들었음)이 형님 오신 줄도 모르고 해우 궤짝을 지게에 지고 나오더란다. 영문을 모르는 형이 깜짝 놀라서 “너, 그 것 무엇이냐?”하고 물으니 동생이 지게를 내려놓고 배시시 웃으며 머리를 긁 적거리며 천연덕스럽게 하는 말이 있었으니
“헤에~앤, 들켜버렸네!”
김의 셈 단위는 10장을 한 매, 100장을 한 속(톳이라고 함), 10속을 한 통, 100속을 한 개라고 하는데 보통 한 속 단위로 하여 묶는다.
보통의 집에서 하루에 생산하는 김의 량은 두통 내지 두통 반, 조금 많은 집이 세 통이 조금 넘는다.
순전히 자연의 힘에 의하여만 생산해야 했으니 생산량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1980년부터 생산 량이 비약적으로 많아진다).
추운 겨울이지만 한 낮에는 겉옷을 벗어야 할 정도로 따뜻한 건장에서 잘 마른 김은 발장과 분리되 어 한 매 단위로 차곡차곡 쟁여진다. 이렇게 하는 것을 '몰른건장'이라고 했다.
약 한 통 내지 한 통 반 정도의 분량을 한 둥치로 묶어 집에서 통풍이 잘 되며, 습기가 없는 마루 등 에 보관한다.
이러한 둥치가 계속 쌓여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네 부모들은 그 추운 겨울의 그 고생스 러움을 이겨 내시곤 하셨을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와 그 이전에는 김을 일본으로 수출하였다 한다.
그 때는 김을 거의 전량 수협에서 수집하여 수출을 대행을 했던 것 같은데 김을 수집할 때는 검사원이 와서 등급을 매긴다. 수협에서는 언제가 검사일이라고 미리 통보를 해 준다. 보통 한 겨울에 3~4번 정도였다.
이제 검사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까지 힘들게 생산한 김을 예쁘게 결속하여야 한다.
결속이란 김을 100장 단위인 한 속으로 묶는 일로 맞선 보러 나갈 딸을 단장시키는 것 보다 더 정성스럽게 작업을 한다. 그 묶는 띠를 ‘속지’라고 하 였으며 거기에는 생산자 표시를 하게끔 되어 있었다.
먼저 한 매를 반으로 접는다. 이 반으로 접은 한 매를 10개 합하면 한 속이 된다. 그 한 속을 잘 맞추어 접힌 반대부분과 양족 끝을 톱으로 썰어내고 마지막에 강판으로 밀어 반듯하게 다듬어야 한다. 그렇다고 잘 다듬기 위해 많이 썰 어내고 할 수도 없다. 곧, 수협에서 정하고 있는 일정한 크기 및 일정한 무게 이상을 유지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집에는 아주 가벼운 물건의 무게를 달 수 있는 작은 저울이 필수품이었다.
이렇게 한 속, 한 속 결속을 하여 100속, 즉, 한 개가 되면 김을 담기 위하여 만들어진 나무 상자(해우 궤짝이라 하였음)에 담는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게 다 돈이니까.
우리 집은 한 번 결속하면 보통 얼마정도 되었는지 너무 어렸을 때의 일이라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하루의 생산량을 감안하여 추측 하여 볼 진데 두 개(200 속)는 조금 넘었을 것 같다.
오늘은 검사일이다. 맞선보러 나갈 딸처럼 곱게 다듬어 놓은 우리의 김이 검사를 받는 날인 것이다.
김 상자를 지게에 올리 시는 아버지의 얼굴표정이 비장하다. 좋은 등급을 맞아야 할텐데. 아마 딸을 맞선보러 내보내는 심정 이었을 게다.
김의 등급은 제일 좋은 것을 특으로 하여 그 다음이 송, 또 그 다음이 죽, 매 까지의 수출품이 있었고, 나머지는 등외 1, 2, 3으로 나뉘어 7등급으로 되어 있었다. 등외품은 국내에서 소비되어 수출품과는 값이 많이 차이가 났다.
그래서 그 날 특급 판정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검사원을 포함한 수협 관계자 들에게 막걸리 등을 대접하곤 했다.
후에 일본에로의 김 수출이 막히자 값이 많이 하락하였지만 그래도 김은 여전히 우리 부락의 주 수입 원이었으나,
80년대에는 대량생산체제로 바뀌어 김 생산을 계속하는 사람과 포기하는 사람으로 나뉘었고,
계속하여 김 생산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 나다가 언제부터 인가는 우리 쇠머리에서 김을 생산하는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도 서남해안의 일부지역 및 서해안(부안지역)에서는 김을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금산에서 해태자동건조기 및 부류식해태망을 맨 처음 선보인 사람이 신촌의 이재훈씨. 바로 이양호의 아버지이시니 내게는 장인어른 되시는 분이다.
1980년 겨울. 신촌 해태종합처리장에서의 1일 생산량은 평균 2,000속. 수동으로 생산하는 보통의 집에서 20속 정 도를 생산한 것에 비하면 100배 정도인 엄청난 량이었다.
나는 그 때 김 공장의 내부관리를 맡았는데 김 양식장에 대하여는 큰 아크릴에다 김 양식장의 모형(어장도)을 그려서 관리하였다. 김을 채취하는 직원에게서 그 날 그 날의 채취 구역을 보고받아 어장도에 채취일자를 기록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관리가 되지 않았다.
내가 고안한 내 방식대로 계속 그렇게 관리를 하다 보니 이제는 사무실에 가만 앉아 있어도 오늘은 어느 구역 어느 지점에서 김을 채취하고 있는지 알수 있게 되었고, 내일은 어느 구역, 모래는 어느 구역, 그리고 한 번 채취가 끝난 곳은 몇 일 만에 다시 채취가 가능한 지 등 관리가 가 능하여 져 이제는 채취계획을 내가 세워 채취 담당 직원에게 다음의 채취 구역을 지시할 수 있게 되었다.
바다에서 채취하여 냉장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생김도 재고 관리가 필요하지만 공장에서 매일 매일 생산된 마 른김도 재고관리가 중요하였다. 생산된 김을 결속하는 일은 동네의 나이드신 어른들에게 맡겼다. 매일 매일 생산된 수량이 2000속 정도이니 100속 묶음의 박스로도 20여개에 달한다. 혹시 수량에 실수가 있을까 봐 박스포장은 내가 도맡아 했다. 그 결과 나는 훗날 집사람에게서 ‘포장전문’이라는 훈장을 받기도 했으니. 날마다 쌓여가는 박스에는 일련의 번호가 매겨지며 그날 그날의 생산일보에 기록되어 진다.
이제 더 쌓을 수 있는 공간이 없어지면 우리는 그 김을 고흥 수협에 위판을 하여야 한다.
주로 녹동위판소를 이용하였으나 그 어떤 청에 의하여 가끔씩은 대흥위판소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내가 금산을 떠난 1981년에도 김 생산은 호황을 누렸는데 그 다음해 부터는 조금씩 조금씩 삐거덕거렸다.
그 이유는 가족사인 관계로 생략한다.
지금도 둘째처남이 살고 있는 그 공장엘 가보면 그때 내가 만들어서 붙였던 <사무실>이란 표지판과 <냉장실> 이란 표지판이 그 때 그 자리에 그대로 붙어있다.
20년도 훨씬 더 지난 옛 이야기지만 지금도 한가지 우스운 일은 그 때 내가 만들었던 공장의 장부는 복식 부기를 이용한 수준 높은(?) 기록이었는데 글쎄! 부기의 부자도 모르는 겨우 엉터리로 현금출납부나 만들 수 있는 실력의 소유자인 조그마한 건설업자의 경리사원이 내가 만든 그 장부에 대하여 감사(?)를 했단다.
그 장부를 감사했다는 그 시점에 나는 세무서에 근무하면서 그네들이 만들어 놓은 허술한 장부를 조사하 고 다녔는데......
이제 김에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마지막으로 마치고자 한다.
용돈이 궁한 우리들은 그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마루에 쌓여 있는 김 둥치에서 조금씩의 김을 슬쩍하였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도 몇 번인가에 걸쳐 조금(어린 시절이라 20장 이상은 할 수도 없음) 훔쳐 낸 기억 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 마눌님도 겨울방학 중에 집에 와 있는 지네 오빠한테 김을 많이 훔쳐 줬 다고 덩달아 얘기한다. 자기가 부엌 책임자였으니 김이 쌓여 있는 마루에 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었다는 지위를 이용해서. 혹시 내 돈도 나 모르게? 그렇게라도 해서 나 모르는 돈이라도 있으면 엄청 좋 겠는데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어찌 숫자에는 도통한 나의 주머니를 노릴 수 있으리요!
각설하고,
어느 날 김대용 씨(미숙이 아버지)가 바다에서 해우를 해가지고 집에 막 도착 했는데,
그 집 막내동생(당시 20세 이쪽 저쪽의 청년인 김덕용님으로 들었음)이 형님 오신 줄도 모르고 해우 궤짝을 지게에 지고 나오더란다. 영문을 모르는 형이 깜짝 놀라서 “너, 그 것 무엇이냐?”하고 물으니 동생이 지게를 내려놓고 배시시 웃으며 머리를 긁 적거리며 천연덕스럽게 하는 말이 있었으니
“헤에~앤, 들켜버렸네!”
그래도 내 기억력을 믿고 감히 썼습니다만 혹시 틀렸으면 연락 주십시요.
바로 잡을께요.
쇠머리 사람네들!
점점 내공이 딸리네요.
다음 한 회(8회)까지는 준비되었으나 9회와 10회를 어찌 채울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