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
70cm급 감성돔 세 마리만 낚게 해 달라고 기원하면서 우리(둘째 처남과 가형)는 낚시를 하였다.
그러나 생각만큼 고기가 입질을 하지 않는다. 겨우 손바닥만한 것 예닐곱 수 낚는 것으로 마쳤다.
기대한 만큼은 잡지 못했지만 고기 한 마리도 낚지 못하고 내가 챔질한 고기를 손맛이나 봐야겠
다고 릴을 감았던 형님에 비하면 나는 장어 두 마리를 내년에 다시 보자며 방생까지 했으니 그만
하면 족한 것 아니겠는가!
오후에는 다시 쇠머리에 들러 오랜만에 마을에서는 가장 친했던 길남이와 고향을 지키고 있는 성
식이 등과 동생들 몇몇을 만나 한 잔의 술과 옛이야기로 꽃을 피웠지만 다들 어려운지 생각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았다.
추석 날.
오전에 차례를 드리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신흥 고모님(아버지의 바로 밑 동생)을 뵈러 갔다.
이제는 늙으셔서 치매끼마저 있지만 그래도 고모는 오빠를 만나고 자기 핏줄들을 보니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신다.
상대적으로 건강하신 고숙님은 고모의 뒷치레에 열부상을 받아야겠다고 하는 등 그 고충을 늘어 놓으신다.
귀가 어두워 잘 듣지 못한 아버지는 같은 연배의 어른들의 근황을 묻고는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안타까워하
신다. 그러는 동안 가족(핏줄)과 부부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오후.
병옥이와 같이 당신의 모교인 금산초등학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정년퇴임하시고 저 세상으로 가신 동촌의
김종호 선생님의 사모님을 찾았다.
정말 나라는 놈은 한심하다.
선생님께서 돌아 가셨다는 사실을 이렇게 늦게서야 알게 되다니!
그렇게도 나를 예뻐하셨는데.
나보다도 훨씬 공부를 잘했던 여러 사람들이 있었는데도 그들을 다 물리치고 나를 영광스런 수석졸업자로
만들어 졸업생을 대표하여 졸업장을 받게 해 주셨는데.
반가워하시는 사모님의 안내로 선생님의 묘소에서 선생님께 잔을 따르니 정말이지 감회가 깊다.
선생님께서 ‘철용이, 병옥이 이놈들 왔구나’ 하시며 껄껄 웃으신 것 같다.
선생님, 늦게 찾아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내년부터는 잊지 않고 찾아 뵙겠습니다.
(선생님을 찾아 뵙고 싶은 사람은 제게 연락하면 자세히 안내해 드리겠음)
당신께서 담임을 맡으셨던 우리 6학년 2반은 내가 급장이었고 병옥이가 부급장이었나?
2학년 때부터 5학년 때까지는 반 편성을 다시 하지 않고 그대로 올라갔고 6학년이 되어서야
반 편성을 다시 했기 때문에 2~5학년 때의 급우들과 6학년 때의 급우들이 잘 구별은 되지
아니하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내가 기억하는 한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이미 고인이 된
쇠머리의 수승이와 금진의 남연희(상하촌 김기덕 선배의 처)정도는 같이 왔으면 참 좋았겠다.
내년 추석에 또 찾아뵐 것을 약속하고 잘 계시라는 인사를 드리는 우리를 사모님께서는 꼭 안아주셨다.
또 그날 오후!
우원에게 전화를 했더니 지금 광주라며 자기는 못내려 갔으니 대신 자기 집에나 한번 들르란다.
병옥이와 함께 우원이 집엘 들렀더니 강금자 여사가 반갑게 맞아준다.
조금 있으려니 득수, 태진이 등등의 41회 후배 몇 사람이 들이닥친다.
우원이가 전화를 한 모양이다.
다들 반가운 사람들이었지만 특히나 태진이가 반가웠다.
태진이는 내가 왜 그런지 그 의미를 알 것이다.
오랜만에 태진이의 누나인 금숙이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반가운 이름이고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지만 너무나 오랜만의 대화라 그런지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
못하였다. 잘 있느냐? 보고 싶다. 동창회 때라도 빠지지 말고 참석하여 만나자 하는 의례적인 인사말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결코 많지 않았다.
아마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이 부족하였나 보다.
밤.
병옥이와 함께 금산중학교에 있는 테니스 코트장을 찾았다.
기상천 재광금산면향우회장과 재민 성, 송훈 선배, 갑술이 친구 양호 처남 그리고 재규 후배 등이
열성이시다.
모르는 후배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게임 후에 회식처인 식당으로 초대되어 한 잔씩 돌리니 낮부터 전작이
있는지라 크게 취한다.
혹시나 실수가 있을까 봐 양호에게 눈짓하여 병옥이와 같이 살며시 그 자리를 빠져 나와 신촌 처가집으
로 가서 또 한 잔!
얼마나 취하였는지 병옥이는 신도 벗지 못한 채 현관엘 들어섰단다.
술좌석이 파하고 우리 마눌님이 병옥이를 동생의 집에까지 태워다 주었는데
신촌에서 산 담배를 집에 도착할 때까지 담배갑을 못 뜯었다나.
마지막 날.
이제 연휴의 마지막 날로 오늘은 다시 광주로 되돌아가야 한다.
해마다 당신의 남편 제삿날과 추석절에는 아들들과 딸들, 며느리들과 사위들 그리고 손자와 손녀들이 와서
노는 것을 보는 재미로 은근히 기다려 지신다는 장모님과 우리들 때문에 처갓집(친정)에도 못 가는 둘째 처남과
처남댁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이제 우리는 떠나야 한다.
녹동의 선착장에서 광주의 우리집까지는 2시간 30여분이면 갈 수 있으니 다리만 놓아졌다면 신촌 처가에서도
3시간이면 족히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못내 아쉬어 하시는 장모님을 뒤로 하고 우리는 아침부터 서둘러
야 한다. 왜?
다들 알고 있듯이 금진 선착장에서 배에다가 차를 실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둘러 출발했지만 도착하니 차가 신금
마을 초입까지 늘어서 있다. 지난해 추석에는 주유소까지 밀려 있어 3시간 정도를 기다렸는데 이번에는 연휴가
길어 조금 빨리 출발한 사람도 있고하여 2시간을 기다렸다.
언제까지 이래야만 하는 것일까?
당초의 계획대로 2007년 말에는 완공되어 2008년 추석에는 차로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그래도 3번의 추석이 남아 있는데.
아무쪼록 모든 사람이 힘을 합하여 아무런 사고없이 계획대로 공사를 끝내 우리 고향 거금도를 찾고 싶을 때는
어느 때나 찾아 올 수 있는 그런 곳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녹동행 카페리호에 몸을 싣고 올 연말에 다시 찾아 올
거금도여 안녕.
추석은 잘 보내셨는지오?
장문의 글 읽고 감탄감탄합니다.
기억력이 좋기로는 저도 빠지지는 않지만
형님의 기억력에 그만 혀를 내두릅니다.
초등시절부터 바로 엊그제의 일까지 파노라마를
보고 있노라니 문득 저도 초등시절 중등시절
아껴주셨던 선생님들이 기억납니다.
아직은 생존해 계시지만 도리를 못한 저에 비해
형님은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병옥형님과 재미있게 보내셨군요.
혹 저도 병옥형님을 뵙게될지 기대했었는데
형님께 빼앗겼습니다.
농담이고요 보람있는 명절을 보내시고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오신 형님
이제는 이곳에서의 계속적인 활동 기대합니다.
10월의 시작입니다.
우리 파이팅하게요.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