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우리네 인간들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일들은 자기 가족에 대한 기억인 듯 하다.
유년기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희미한 기억과 엄마의 치마자락을 행여나 놓칠세라 꼭 잡고 외가에 가던 기억들이 아스레하다.
그러나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들은 비교적 또렷이 뇌리에 남아 있으니 두서없이 읊어 본다.
하교 길의 금산장날!
우리네 엄마들이 유일하게 분단장하고 꼬까옷 입고 나들이 하는 날이다.
무작정 나들이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나 살아 있음을 알리는 날인 것이다.
어느 누구네 소가 새끼를 낳았다느니, 어느 누가 섣달 여드레에 아들을 여윈다느니, 어느 누가 동짓달 초 삳날에 저 세 상으로 갔다느니, 지나 온 인생사와 다가오는 인생사를 듣고 생각하는 만남의 장소, 전달의 장소였던 것이다.
곧, 통신시설이 발달하지 못한 그 시절의 시골 장날은 우리네 사람들의 사랑방 이상이었다.
5일마다 둔벙치에서 서는 장날이면 우리도 덩달아 좋아서 하교길에 장터를 기웃거린다.
혹시 울 엄마는 오지 않았을가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장터를 기웃거리다가 엄마라도 만나는 운 좋은 날에 엄마가 사 주셨던 1원에 7개하던 풀빵 맛이 왜 그리도 좋았던지!
엄마를 만나지 못했어도 좋았다.
그래도 다른 엄마들의 뒤를 따라 집에까지 오는 날이면 우리네 들 끼리만 오던 때와는 사뭇 다른 어떤 기대가 있었으니까.
초등학교 2~3학년 때였을까?
학교를 갔다 오는 길에 누구의 제안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흥의 상권집(김상권씨가 운영하던 만물상)에서
각자가 못을 하나씩 훔치자고 결의(?)하고 우리는 소심한 배반자라는 오명을 쓰기 싫어 너 나 할 것 없이 못을 하나씩 움켜지고 내달음질 쳤다.
우리의 모의가 성공하였다고 희희낙낙하여 집에들 왔것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곳은 싸늘한 동네 마을회간의 곳간!
우리의 절도죄가 발각되어 동네 어르신들의 재판결과는 전원 구류 1일!
당시 나의 하교 인사가 '엄마, 감재(고구마) 쪘어?'였을 정도로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정지로 뛰어 들어가 엄마가 쪄 놓은 포글포글한 감재로 점심으로 대용했던 시절인지라
당시의 우리들은 유난히도 가죽피리를 잘 불었었다. 급기야 나중에는 가죽피리 불기 시합을 했을 정도 였으니
그 시절의 식생활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합의 일화!
한 번 시작하면 몇 개(?)를 계속할 수 있는가가 시합의 주내용인데 아! 그 때 종구 성 잘하더라. 몇 개? 글쎄 50개는 넘었으니까.
나중에는 지금 못 본지가 30 여년도 더 된 기매가 시합에 임하다가 왈! '오메. 싸 부렀네!'
조르박재(왜 이런 지명이 붙었는지 모르지만 어르신들과 우리 세대는 거기가 어디인지 다 안다)에서는 귀신이 자주 나온다는 풍문 때문에 어린 우리가 혼자 다니기엔 굉장히 무서운 곳이었지만 평평한 공터가 있기에 다마치기 등을 할 수 있어
여럿이 모여 학교에 다니는 우리들의 놀이터로도 이용되는 곳이기도 했다.
어느 날(기도 아제가 중학교 입학 지원서를 제출하고 오다가 우리를 만났으니 내가 5학년 말 쯤일 것이다),
우리(기도 아제, 정화, 쌀밴 그리고 나)가 평소보다 늦게 집에를 오는데
하라패 에서 해가 졌고 조루박재를 지날 땐 사방이 어두어 진 시간이었다.
귀신이 자주 나온다는 그 곳을 지나면서부터는 너 나 할 것 없이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빨리 갈려고 말 없는 경쟁을 하고 있는데
돌연 산에서 '쉬이,쉬이,' 하는 요상한 소리가 계속 나면서 어떤 불이 번쩍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무서움에 떨고 있는 우리는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엄마야 !' 하면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30여 미터 쯤 뛰었을까? 당시는 운동화가 아니라 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시절이라 아뿔싸! 내 고무신이 벗겨져 버린 것이다.
다급한 마음에 '내 신, 내 신'하고 외쳤지만 어느 누구 하나 멈춰 줄 생각도 하지 않고 도망 가기에 바쁘다.
나도 벗겨진 신을 되찾을 엄두도 못내고 어쩔 수 없이 아픈 발을 쩔룩이며 뛰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와 하 하 하' 하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당시 망할 놈의 중학교에 다니던 복용이 성 일행이 몰래 숨어 우리를 놀래준 것이었 다.
( 에이! 그 때 달리기 잘하던 기도 아제는 한 번도 쇠머리 달리기 선수에 끼지 못하더라)
그 후유증으로 난 아파 누워 며칠간 학교엘 가지 못했고(결국개근상도 못 받았다), 복용이 성은 울 엄마한테 혼나게 야단맞았다.
그런가 하면 조르박재는 웃기는 추억도 있다.
그 때의 우리는 하교길에 먹기 위하여 등교길에 감재를 가지고 가다가 자기만이 아는 곳에다 숨겨 놓곤 하였다.
그 숨겨 놀 만한 장소가 조르박재에서 하라패 조금 못 간 주변의 산속에 있는 찍근덴나무(요즈음 분재용으로 각광받고 있는 소사) 속이다.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그 감재를 잘도 찾아먹는 사람이 있었으니!
아니 감재만 훔쳐 먹었으면 됐지, 왜 거기에다 응가를 해 놓냐구요? 감재를 집으려고 쑤욱 집어 넣는 손에 잡히는 것은 잘 익 어 물렁물렁한 감재보다도 더 물컹물컹한 그것(?)이었으니 해도해도 참 너무했던 추억이다.
(그 손이 누구의 손이냐구요? 다음에 알려 드릴께요)
지금은 문용이네가 헐어버리고 새로 산뜻한 양옥집을 지어 살고 있는 내 유년 및 초등학교 시절의 우리 집!
손이 귀하여 3대 독자이셨던 아버지가 그 집을 짓다가 그 귀한 아들마저도 잃어버렸다는
당신의 평생에 유일무이하게 성주하여 다시 태어 난 자식들의 숫자만큼을 기념 으로 심으셨다는
다섯 그루의 감나무와 가을이면 주렁주렁 열렸던 대추나무와 사과참배나무 (배가 익어도 사과처럼 퍼랬으나 맛은 별로?)가 있었던 우리 집!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러와 생활하던 그 시절 뒷 뜰에 샘을 깊게 파 집에서도 해우를 뜰 수 있었던 우리 집!
당신에게는 자식보다도 더 귀중했을 그 집을 다시 당신의 자식들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남에게 팔고 오 두막집으로 이사해야만 했던 당신의 아픔이 베어 있었을 우리 집!
이제는 남의 손에 헐어져 형체마져도 남아 있지 않으나 어찌 저희가 그 집을 잊을 수 있고 당신의 그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리요?
그러나 아버지 이제는 잊으십시요. 아버지의 그 뜻이 밑거름되어 오늘의 우리가 있으니까요.
(그 집을 팔고 이사했던 오두막집은 현재 복용이 성이 새로 지어 사용하고 있는 창고자리인데 그 집에서 생활하던 시절의 추억담은 2.청년시절에서 회상하기로 함)
지금은 없어져 버린 동네 공중목욕탕!
겨울이면 끼리끼리 나무들을 주워 모으고 물을 길러 날라 큰 가마 솥에다 물을 채우고 그 물을 데워 목욕할 수 있었던
당시 거금도에 단 하나 뿐(?)이었던 동네 목욕탕.
지금에야 다들 집에서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겨울 내내 목욕을 겨우 2 ~ 3번 밖에 할 수 없었다.
목욕탕이 단 하나 뿐이고 그 때에는 식구 수가 많아 한집에 7~8명 많은 집은 10여명도 넘게 살아 정말 사는 것 같은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몸은 자주 씻지 못하여 불결하고 밤에는 온 가 족이 한 방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자곤 했으니 날마다 우리의 몸을 간질이던 '이'란 놈들이 얼마나 극성을 부렸겠는가! 날마다 속 옷을 벗어 들고 이를 잡던 기억들이 새롭다.
늘앗테(평지)에다가 자가발전기를 설치하여 밤의 일정시간에만 전기공급을 해 주던 그 시절.
엄마와 아버지는 그 전깃불 밑에서 해우를 치루고(김에서 파래를 추려 내는 작업) 나는 공부(?) 를 한다.
시계가 없던 시절이니 시각이 얼마가 됐는지는 밤하늘의 별을 보고 유추한다.
그러나 오늘도 어김없는 시간을 알려 주는 고마운 이가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전기불의 깜박거림!
전기불이 서너번 깜박깜박인다. 11시다.
이제 조금 있으면 단전하오니 못 다한 일은 마무리하 라는 신호임과 동시에 시간을 알려 주는 유일한 몸짓인 것이다.
그래도 우리네 부모들은 잠을 청하지 못하고 남포불을 준비하여 잔업을 끝내야 했다.
그때 그 전기불의 공급은 새벽에 해우 를 뜨는 우리네의 생활에 그야말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라디오도 귀했던 그 시절!
라디오는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집집마다 안 방에서 실시간의 뉴스는 들을 수 있었다.
집집 마다에 설치해 놓은 라디오 수신기. 아마 국가에서 홍보용으로 설치하였지 싶지만 당시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누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네 해대는 어나운서의 흥분된 목소리만 기억난다.
여름이면 쌔카맣게 탄 몸을 또 태우려고 갱본으로 향하는 수많은 동네 사람들!
그런데 왜 나는 한사코 수영을 하지 않았을까?
남들이 하는 수영을 밖에서 부러운 듯 바라보며 나 혼자 할 수 있었던 것은 여자애들이 잘하는 공기놀이.
지금도 그 것 만큼은 우리 또래의 어느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억지로 나를 물로 밀어 넣으려는 큰 누나를 물어 뜯어가며 한사코 버텼 던 나의 행동을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 나는 남 몰래 해우 발에 메는 부자를 몇 개 묶어 몸에 감고 매일 하나씩 줄여 나가는 피나는 연습을 통하여 수영을 익혔으나
그것도 계속하지 않으니 지금은 또 물에 들어가면 몸뚱이라도 뜰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다행히 수 년에 걸쳐 수 영장에 나가 수영실력을 뽐내고 있는 마눌님이 곁에 계시니 그 분에게서 수영을 꼭 사사하련다.
지난 7월에 엄마의 산소에 들르고자 우두엘 갔더니 광장에 마을회관이 새로 지어져 있었다.
가게에 복용이 성이 마을 어르신들과 앉아 계시기에 인사드리고 상황을 물었다.
늦게서야 사실을 알고 뒤늦은 성의를 표했지만 준비없이 갔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약주 한 잔씩을 권하고 '다음 기회가 있겠지' 하면서 뒤돌아 왔지만 광장을 씨멘트로 포장해 버린 것에 대하여는 영 개운치가 않았다 . 멀리 객지에 사는 내가 무어라고 할 말은 없지만 그 광장이 어떤 곳인가?
그 광장은 우리의 어르신들이 뛰어 놀았고 우리네가 뛰어 놀았고 또 우리의 후손들이 뛰어 놀
마치 어머니의 젖가슴같이 포근한 마음의 고향인 곳이다.
해가 졌어도 아직도 못내 아쉬어 집에 들어가지 않은 우리를 향해 그냥 집에서 누구야 하고 부르면 들을 수 있던 곳,
삼팔선을 그려 놓고 비행기를 그려 놓고 뛰어 놀던 곳,
다마치기를 하고 못치기를 하고 줄넘기를 하고 숨 바꼭질을 하고 연을 날리던 곳,
짚으로 만든 배구공으로 배구를 하고만 있어도 그 어떤 절대자도 그 안에는 들어 올 수 없었던 약속(질서)의 광장,
마을 축제 땐 함께 모여 꽹과리를 치고 장구를 치고 북을 치며 강강술래를 할 수 있었던 곳,
그러기에 한 평생을 사시다가 저 세상으로 가 시는 어르신들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가던 곳이 아니었던가!
이제 그 정겨웠던 추억의 놀이터가 마을회관과 시멘트로 포장되어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구나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의 잘못된 느낌일까?
물론 젊은 사람들이 다들 도회지로 떠나고 광장을 광장답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없기에 그런 결정이 났겠지만
그래!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고 집집마다에서 애기들의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울리는
우리 마을이 우리 쇠머리가 된다면 그까짓 마을회관을 다른 곳으로 못 옮기랴, 시멘트를 못 파 내랴!
너그러운 양해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