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였다. 나의 영원한 팬이자 후원자였던 박정희 대통령(당시)이 국내 프로레슬링 붐을 위해 서울 정동에 레슬링 경기와 각종 스포츠 경기를 할 수 있는 전용 체육관을 짓도록 했다. 박 대통령은 내가 서구의 거구들을 쓰러뜨리며 국민에게 '하면 된다'는 정신을 고취시켰기에 그 뜻을 치하해 체육관을 짓도록 한 것이다.
난 그 체육관 설계를 나의 미국 후원회 회장이었던 이춘성씨(현 영등포 목화예식장 회장)에게 맡겼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문화체육관이요, 일명 김일체육관이다. 난 그 체육관 개관에 맞춰 1975년께 일간스포츠에 문하생 모집 광고를 내기도 했다.
김일 체육관 문하생 모집 지원 조건은 신장 180㎝·체중 80㎏ 이상이었다. 그때만 해도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그 다음날 100여 명의 지망생들이 몰려왔다. 일주일 동안 선발 과정을 거쳐 10여 명을 뽑았다.
그때 나의 친동생 김광식, '역발산'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양승희, 그리고 임대수와 이왕표 등 10여 명을 최종 선발했다. 이왕표는 체중 미달이었는데 워낙 레슬링을 하겠다는 의지가 강했고, 눈빛이 살아 있어서 뽑았다.
그가 지금 나의 레슬링 후계자다. 그는 태권도·합기도·유도 등 닥치는 대로 운동을 했다. 체격이 불어나면서 실력도 월등해졌다.
문하생들에게 처음 가르쳤던 것은 맞는 것이었다. 스승 역도산에게 배웠던 매질을 고스란히 제자들에게 되물림했다. 스승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혹독하게 매질했다. "맞기 위해 레슬링을 배우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항변한 후 줄행랑친 문하생도 있었다. 문하생들을 때린 것은 레슬링은 맞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면 링에 올라갔을 경우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제자들이 나의 손을 거쳐 갔지만 이왕표가 기억에 남는다. 이왕표는 2년간 맞기만 하면서 훈련했다. 그 인내의 세월을 보내고 77년 장충체육관에서 일본의 오니다와 데뷔전을 치렀다. 하지만 이왕표는 손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지고 말았다. 이후 이왕표는 스무 번을 내리 졌다. 그렇게 맞고 혹독한 훈련을 했는데도 모두 졌으니 레슬링에서 1승을 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새삼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태현이 아무리 씨름으로 잔뼈가 굵었다지만 한 달도 못돼 프라이드 경기에 출전, 진 것은 당연지사다. 그가 절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경기에서 이길 수도 또 질 수도 있었지만 나만은 지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이왕표는 경기에서 진 것보다 내게 맞은 것이 더 아팠을 것이다. 경기에서 얻어 맞고, 내게서 얻어 터지고 늘 그의 몸은 피투성이였다. 이왕표는 경기가 끝났는데도 맞기가 싫어 라커로 들어오지 않은 경우가 태반사였다. 내게 맞기 싫어 일부러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나 역시 스승 역도산에게 맞기 싫어 라커로 들어가지 않았으니.
이왕표를 한국의 차기 프로레슬링을 이끌 재목으로 보았기에 더욱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그가 첫 승을 올린 것은 일본 오사카에서였다. 국제 대회에 처음 데리고 갔는데 그 무대에서 처음 승리의 단맛을 봤다. 첫 승을 올린 후부터 이왕표는 연승 행진을 거듭했다. 내가 이왕표와 함께 태그팀을 구성해 출전하기도 했다. 이왕표는 야성적 몸놀림으로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모았다.
이왕표와 함께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경기를 펼칠 때인 79년 10월 26일 오전,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다. 오사카 한 호텔로 국제전화가 걸려 왔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작고했습니다." 그 전화를 받고 너무 충격을 받아 말을 하지 못했다. 박 대통령의 작고는 프로레슬링의 몰락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면서 김일체육관을 헌납당했다. 예상했던 일들이었다. 전 대통령은 프로레슬링을 좋아하지 않았다. 70년대 중반 박 대통령이 TV로 프로레슬링을 시청하고 있었는데 당시 경호실에서 근무하던 그가 "각하, 저건 쇼인데 왜 그렇게 열심히 보십니까"라고 말했다가 핀잔을 들었다는 애기를 들었다.
그런 기억이 있었기에 '프로레슬링은 정책적으로 다른 스포츠 종목에 밀릴 수밖에 없겠다'란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프로야구·프로씨름·프로축구가 전두환 정권의 흥행 스포츠로 떠올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