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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95]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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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12월 스승 역도산 작고 후 일본프로레슬링협회는 결국 양분됐다. 안토니오 이노키가 신일본프로레슬협회를 창립한다고 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만류였다. 그런데 자이언트 바바까지 일본프로레슬령협회에서 탈퇴, 전일본프로레슬링협회를 창립했다. 여기에 국제프로레슬링연맹까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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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의 제자였던 자이언트 바바·요시무라·나(뒷줄 왼쪽부터), 그리고 안토니오 이노키(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나만 가족이 빠졌다. 승리 자축 파티에서 찍었던 것 같다. 형제보다 더 가까운 동문들이었지만
바바와 이노키는 각각 레슬링 단체를 설립한 후 소원해졌다.


 
동문들은 자신이 만들고 속한 단체에서 내가 활동하기를 바랐지만 난 스승이 창립했던 일본프로레슬링협회에 남기로 했다. 일본프로레슬링협회의 각종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개선할 사항들이 많았지만 이 단체를 탈퇴하지 않았던 것은 스승이 만든 단체이기 때문이다. 그 단체를 탈퇴한다는 것은 마치 스승을 배신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노키와 바바가 만든 두 단체는 서로 경쟁하면서 일본 최고의 프로레슬링 단체가 됐다. 단체가 양분되면 프로레슬링 인기가 떨어질 것이란 생각은 나의 걱정에 불과했다. 이노키와 바바가 외국 선수들을 대거 스카웃한 후 수준 높은 경기를 펼쳐 프로레슬링은 더욱 팬들로부터 사랑받았다.
 
난 일본프로레슬링협회 소속은 버리지 않았지만 필요에 따라 바바가 원하면 전일본협회, 이노키가 원하면 신일본협회 소속으로 출전하곤 했다. 그것은 그들이 적은 개런티를 받고 한국에서 많은 경기를 치렀던 것에 대한 보답 차원이기도 했다.
 
난 두 사람에게 많은 빚을 졌다. 굳이 개런티만의 문제가 아니다. 두 사람은 한국서 경기하면서 참으로 많은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지금은 반일 감정이 덜하지만 두 사람이 한국에서 경기를 치를 때만 해도 반일 감정이 극심했다. 두 사람은 "오오키 선배, 한국서 경기하면 제가 한국을 침략하고 식민지화시켰던 장본인으로 낙인 찍히는 기분"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도 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이노키에게 "왜 밥을 먹지 않느냐"라고 했더니 그는 "한국 사람들에게 욕을 너무 많이 먹어 배가 고프지 않다"라는 뼈 있는 농담을 했다. 그랬다. 한국 팬들은 일본 선수들을 마치 마귀 보듯이 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반드시 꺾어 주기를 바랐다. 박치기 한 방에 바바나 이노키가 나자빠지면 팬들은 무척 통쾌해 했다. 팬들은 나의 박치기 한 방에 일제 강점기로 인해 쌓였던 울분을 씻어 내렸던 것이다.
 
바바와 이노키는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만은 나의 희생양이 됐다. 싼 개런티를 받고 그들이 한국의 프로레슬링 발전을 위해 링에 올랐던 것은 평생 이들에게 진 빚이다.
 
두 사람이 지금도 한국 팬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것은 당시 그런 헌신적 경기를 펼쳤던 덕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 팬들은 일본의 프로축구나 프로야구 등 다른 스포츠 스타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두 사람은 30여 년이 지났는데도 한국 팬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스타다.
 
보고 싶은 바바는 99년 1월 저세상으로 떠났다. "오오키 긴타로 선배"하며 부르던 바바의 굵직한 목소리가 너무도 그립다. 박치기로 인해 생긴 이마의 혹을 얼음찜질하면서 치료하던 바바가 너무도 보고 싶다.
 
이노키는 여전히 20대의 정열로 사는 것 같다. 지금도 레슬링과 격투기 관련 일들을 하면서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이노키에 대해선 사람들마다 평가가 다르지만 이노키는 남자 중의 남자다. 이노키에 대해 "이벤트에 강하다, 말이 앞선다"라는 말도 있지만 난 그를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노키는 나를 끔찍히 챙긴다. 한국에 올 때마다 나를 찾아 안부를 전했다. 그가 "오오키 선배님, 오래 사셔야 합니다"라며 나의 손을 꼭 잡을 때면 진한 동문애마저 느낀다.
 
인생은 그런 것 같다. 나이가 드니 과거의 그 화려했던 영광도 한낱 물거품일 뿐이다. 병실에 누워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면 과거의 추억들이 신기루처럼 날아가고, 그 날아간 신기루를 쳐다보면서 웃기도 하고, 때론 슬픔에 잠기기도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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