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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98]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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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박 대통령의 서거는 레슬링이 사양길의 운명을 맞았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출범했다. 프로레슬링의 흥행 열기는 식지 않았지만 암울한 그림자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80년 5월 한·일 친선 태그매치는 계엄령을 피해 제주도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는 스승 역도산의 차남 모모타 미츠오가 선수로 나섰다. 콧수염의 그는 현재 일본 최고의 레슬링 프로모션 노아프로레스 부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이 경기에서 난 동생 광식과 조를 짜 일본의 다카시-이노우에 조를 꺾고 우승했다.
 
사흘 뒤 마산으로 장소를 옮겨 3인 태그매치가 열렸다. 한·일 양팀에서 3명씩 출전해 승부를 겨루는 것이었다. 한국에선 나·광식·이왕표가 나섰다. 일본에서는 이노우에·아시하라·하마구치가 나왔다. 이 경기는 3판 양승제였는데 1승 1패를 한 뒤 막판 내가 박치기로 마무리했다. 이것이 사실상 나의 최후 링 무대였다.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프로레슬링은 TV 화면에서 사라졌다. 대신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화면을 메웠다. 81년 재단법인 김일후원회도 해산됐다. 69년 박 대통령의 하사금 2억원으로 재단법인 '김일후원회'가 설립됐다. 초대 회장에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씨가 취임했다. 김종필 국무총리도 후원회장을 역임했다. 이 후원회는 나를 후원하는 재단법인이라기보다 레슬링 발전을 위한 단체였다. 그런데도 신군부는 이를 해산시켰다. 서울 정동 김일체육관은 문화체육관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로 미루어 짐작할 때 한국 프로레슬링의 몰락은 어쩌면 신군부의 등장과 관련이 있었다. 몰락의 원인은 또 있다. 한국 프로레슬링은 너무 나에게만 의존했다. 내가 나이가 많아 링에서 내려오면서 대체할 만한 스타도 나오지 않았다. 81년 컬러 TV 보급과 함께 프로스포츠가 출범한 야구·축구 등이 활성화하면서 국민은 프로레슬링을 외면했다.
 
사각의 링에서 내려온 난 한동안 방황했다. 80년대 중반부터 수산업에 뛰어들었다. 강원도 속초에 수산회사도 차렸다. 일본을 상대로 명란젓·미역·김 등을 수출했다. 그러나 3년도 버티기 어려웠다. 어획고가 준 데다 현금 유통도 제대로 안됐다. 지금 생각하면 프로레슬링으로 잔뼈가 굵은 내가 수산업에 손댄 것부터가 무리였다. 하는 일마다 되지 않았다. 레슬링으로 인한 후유증과 함께 사업 실패에 따른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90년대 초 속초 앞바다에서 한 언론사의 요청으로 진돗개와 함께 사진을 찍고 서울로 돌아와 타워호텔에서 인터뷰를 했다. 그때 쓰러졌다. 뇌졸중이었다. 겨울 바다의 찬바람이 화근이었다.
 
그후 지금까지 병마와 싸우고 있다. 사람들은 당시 내가 왜 한국을 떠나 일본의 병원을 전전했는가 궁금해 하기도 한다. 당시 난 한국에 있을 처지가 되지 못했다. 사업 실패로 인해 돈마저 바닥이 났다. 한국에서 평생 남을 도왔고, 또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내가 인생 말년에 '실패자'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을 듣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일본 수산물 거래처였던 규슈가이산(九州海産)의 이케다(池田) 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일본으로 갔다. 그의 도움으로 도쿄 적십자병원·오사카 시립병원·규슈 나카무라병원·후쿠오카 시립요양병원을 전전했다. 이케다 사장과 일본 후원 관계자들은 나를 도와줬지만 더 이상 그들에게 신세를 지기가 너무도 미안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고생만 시켰던 아내의 사망 소식까지 접해야만 했다.
 
일본은 제2고향과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타국이기에 투병 생활은 외롭기만 했다. 93년 말 후쿠오카의 한 시립요양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스님 한 분이 나를 찾아왔다. 사형수 석방 운동을 벌였던 삼중스님이었다. 삼중스님은 박정수 한국일보 사회부장과 논의한 후 그곳까지 왔다고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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