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발언으로 인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서 전 국민이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전쟁의 후유증으로 먹고 살기 바빴던 시절 국민에게 꿈과 희망의 스포츠로 다가선 스포츠가 프로레슬링이었는데 오죽하랴. 그런 프로레슬링을 쇼라고 했으니 이런 사실이 퍼져 가면서 국민이 외면하기 시작했다.
난 장영철이 어느 장소에서 누구를 향해 "레슬링은 쇼"라고 말했는지 듣지 못해 그가 진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내게 "프로레슬링에 찬물을 끼얹는 그런 말을 내가 왜 했겠는가"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왜 "레슬링은 쇼"란 말이 나왔을까? 이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다. 우선 장영철이 경찰 조사에서 "프로레슬링은 각본대로 하는데 오쿠마가 룰을 어기고 너무 심하게 공격을 했다"라고 설명했는데 이것이 "레슬링은 쇼"로 와전됐다는 것이다. 즉 각본대로 한다는 것이 쇼로 해석됐다는 설이다.
비슷한 내용이지만 "레슬링은 반칙이 허용되는 운동이다. 오쿠마가 너무 심한 반칙을 했다. '반칙이 심하다'는 말을 했는데 이것이 쇼로 와전됐다"는 것이다. 이는 장영철이 프로레슬링 반칙에 대해 설명했는데 이것을 기자들이 "프로레슬링은 쇼"라고 잘못 해석했다는 설이다.
그러나 이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장영철은 새우꺾기를 당했고, 프로레슬링에서 새우꺾기는 기술의 한 일종이라 반칙으로 해석하기엔 넌센스다.
또 다음과 같은 설도 있다. 당시 장영철 제자들에 의하면 "장 사범님(장영철)이 난동을 부린 제자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프로레슬링은 반칙을 좀 허용하는 운동이라고 말했는데 그걸 기자들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레슬링은 쇼'라고 적었다는 것"이다. 장영철이 링에서 난동을 부린 제자와 후배들의 구속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오쿠마를 폭행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상이 참작되고 구속은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 장영철이 "레슬링은 쇼"라고 분명히 말했고, 이를 들었던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장영철은 이 사건이 일파만파로 번지자 "절대 '레슬링은 쇼'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며 경찰 조사와 언론을 문제 삼았다.
오히려 "이 사건의 원인은 김일 때문"이라는 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오쿠마를 사주해 "반칙을 해서라도 반드시 장영철을 꺾어야 한다"는 특명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난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다. 내가 오쿠마를 데리고 왔다고 해서 사주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프로레슬링을 잘못 이해하는 소리다. 난 오쿠마에게 "최선을 다해 싸워라"란 말만 했다. 선배가 경기에 출전하는 후배 선수에게 "최선을 다해 싸워라"라고 격려의 말을 하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
오쿠마 폭행 사건은 일본에서도 큰 이슈로 등장했다. 한국 선수들의 난동으로 인해 오쿠마가 부상당하자 일본 프로레슬링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유야 어떻든 이는 스포츠 룰에 벗어난 행동이었다. 일본에서는 향후 한국에서 레슬링을 하기 위해선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우려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났다. 일본 레슬러들은 한국에서 경기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는 개런티 문제가 아니다. 경기 외적 요인이다. 일본 레슬러들은"한국에서 경기하면 우리들이 일제 강점기 주범이 되는 것 같다"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일본 선수가 반칙하면 "쪽바리" 하고 야유를 퍼붓는 것은 약과였고, "죽여라" 란 말이 자연스러운 응원의 한 구호로 등장할 정도였다. 그 다음 일부 과격한 팬들은 병과 이물질 등을 던졌다.
한국 레슬러들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경기에서 졌다면 역적으로 몰렸다. 이런 까닭으로 인해 일본과 한국 레슬러들은 서로 경기하는 것을 꺼려하기도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