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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93]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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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장영철 발언 파동 이후 한국에선 더 이상 링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특별히 놀거리와 볼거리가 없었던 시절 프로레슬링을 통해 국민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기 위해 귀국했었는데 오히려 국민의 원성을 샀으니 레슬링을 계속한다는 게 무모하게 생각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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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4월 세계 챔피언 마크 루니를 꺾고 세계 챔피언에 오르자

당시 김종필 공화당 의장(오른쪽)이 챔피언 벨트를 채워 준 후 나의 오른손을 들어 주며 축하해 줬다.

김 의장은 후원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상황은 이상하게만 꼬여 갔다. 마치 프로레슬링 지존 자리를 놓고 나와 장영철이 암투하는 것처럼 비쳐졌다. 난 파동 일주일 만에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을 떠나고 싶다"라는 폭탄 선언을 했다. 한국을 떠나겠다고 말한 것은 그만큼 내가 이 사건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 준 것이다.
 
이같은 선언에 팬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정부와 체육단체에서도 곤혹스러워 했다. 그런데 내가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데 대해 반대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일본서도 레슬링 쇼 파동 사건이 있었다. 마음을 다시 고쳐 먹었다. 한국도 언젠가 한 번쯤 겪어야 할 일들이라면 그 사건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본에선 1954년 11월 유도 선수 출신으로 일본 영웅이었던 기무라 마사히코의 발언이 문제가 되면서 프로레슬링 쇼 논쟁이 일었다. 기무라는 "역도산의 레슬링은 제스처가 많은 쇼"라고 했다. 이 말은 팬들에게 무섭게 파고들었다. 기무라의 신화가 살아 있을 때여서 일본 팬들은 프로레슬링보다 전통 무술의 신화를 보고 싶어 하며 기무라가 쇼인 레슬링을 한 방에 잠재우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펼쳐진 스승과 기무라의 진검 승부에서 스승이 기무라를 완전히 압도하며 승리하면서 쇼 논쟁이 사라졌다.
 
스승이 실력으로 쇼 논쟁을 잠재워듯이 나 역시 팬들에게 실력으로 보여 주면 팬들이 프로레슬링이 쇼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다시 경기를 펼치니 체육관은 관중으로 만원을 이뤘다. 흑백 TV가 경기를 중계하고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여 가며 레슬링을 보는 상황에서 쇼 논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고, 팬들의 열기에 묻혔다. 장영철도 자신의 주 특기인 백드롭을 더욱 갈고닦아 쇼 파동 이후 잃었던 명성을 되찾았다.
 
덩달아 일본서도 많은 선수들이 한국에서 경기하기 위해 방한했다. 자이언트 바바·안토니오 이노키·요시무라 등 일본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선수들도 앞다퉈 한국을 찾았다. 난 한국과 일본에서 승승장구했다.
 
마침내 67년 4월 29일 세계 타이틀에 도전했다. 세계레슬링협회(WWA) 챔피언 타이틀을 놓고 장충체육관에서 마크 루니와 격돌했다. 아침부터 체육관 앞은 인산인해였다. 객석은 물론 복도까지 사람들로 꽉 찼다. 미처 들어오지 못한 사람은 밖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루니는 미국에서도 이름난 선수. 그러나 그의 화려한 기술도 박치기 앞에선 무력했다. 챔피언이 된 날. 신문사에서는 호외를 뿌렸다. 링 위에서 챔피언 벨트를 매던 날 내 손을 높이 치켜들어 줬던 사람은 당시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었다.
 
그는 김일후원회장을 자처했다. 그와 함께 나의 가장 열렬한 팬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은 유난히 레슬링을 좋아했다. "어린애들이 레슬링을 좋아하는데 너무 반칙이 많아. 어린애들에게 반칙을 보여 주는 것은 교육상 안 좋아. 김 선수는 경기를 하면서도 아이들에게 모범이 돼야 해."
 
박 대통령의 말을 듣고 난 다음 나는 경기 중 반칙을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우직하게 싸울 뿐이었다. 박 대통령은 나를 곧잘 청와대로 불렀다. 경기를 끝내고 청와대에 가면 육 여사가 직접 음식을 만들기도 했다.
 
"안사람이 자네 주려고 특별히 만든 모양이야." 레슬링밖에 모르는 나는 박 대통령이 내게 신경을 써 준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박 대통령이 나를 아꼈던 것은 한국인도 하면 된다는 것을 보여 줬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눕힐 수 없을 것 같은 거구의 서양인들도 박치기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은 '하면 된다'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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