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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84]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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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의 사망을 둘러싼 의혹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양산됐다. 언론은 마치 특종 경쟁이라도 하듯 '역도산 사망 미스터리'를 적었고, 이로 인해 갖가지 억측과 추측이 쏟아졌다. 그런 기사를 보면 스승의 죽음에 "어떤 음모가 있었는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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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차고 손을 들어 팬들에게 답례하는 스승 역도산의 당당한 모습이다.
1963년 9월 세계 챔피언 도전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 난 다시는 스승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는 스승의 사망 원인과 사인에 대해 속시원히 밝혀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복막염의 원인이었던 탄산음료를 누가 왜 줬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탄산음료 얘기가 나왔느냐는 점이다. 누군가 줬고 마셨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준 사람도 마신 사람도 없다.
 
또 과다 마취로 사망했다면 어느 정도 마취를 했었는지 밝혀져야만 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구두상으로 과다 마취가 원인이었다고 지적됐을 뿐 의료 일지를 살펴봐도 어느 정도 과다 마취였는지 드러나지 않았다. 사실 이런 이유 때문에 억측과 추측이 음모론으로 확대 재생산된 점이 없지 않다.
 
스승의 사망과 관련, 외부론도 있다. 이는 민족 문제다. 스승은 민족 문제에 날로 관심을 가졌다. 특히 스승이 김일성에게 고급 외제차를 선물하고, 1963년 1월 한국을 극비 방문했던 것을 보더라도 스승은 조국 통일을 갈망했던 민족주의자로 변신해 갔음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스승은 남·북 공동으로 프로레슬링 대회를 서울과 평양에서 개최코자 했다. 나아가 스승은 1964년 동경 올림픽에 출전하는 북한 선수단들의 경비를 제공키로 했다. 때문에 남·북이 화해하고 통일되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의 보이지 않는 세력들이 미국의 CIA와 짜고 누군가에게 스승을 살해토록 교사했다는 설이다.
 
이는 재일교포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긴 채 일본인으로 영웅의 자리에 올랐던 그가 조국으로 눈을 돌리던 바로 그 순간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데에 초점을 맞춘 국제 정세와 맞물린 해석이다. 당시 스승이 남북 화해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긴 미국이 암살을 교사했다는 것이다.

비이성이 지배하는 국제 사회에서 실제로 국가 권력이 개입하는 음모와 공작이 판쳐 온 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점에서 스승이 희생양이 됐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어디까지나 음모론적 추측에 불과한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흥미를 갖고 그럴 듯한 얘기라고 공감하고 있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너무나 급작스럽게 스승이 작고했기 때문에 이런 억측과 추측이 나돌았고, 나아가 암살설로 번진 것이다. 난 여기서 스승의 죽음에 대해선 얘기를 접고자 한다. 의혹들이 풀리지 않고 더욱 눈덩이처럼 불어만 갈 것 같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스승의 사망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할 수 없다는 점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미국에 가지 않았으면, 아니 일찍 일본에 건너왔으면 제기됐던 의혹들에 대해서 "이건 아니고", "그건 맞다"라는 식으로 명쾌한 답변을 제시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난 이제 살 날보다 죽을 날이 가깝다. 살아 생전 남들에게 부탁은 잘하지 않았지만 최근 일간스포츠를 통해 스승을 찌른 그 무라타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보도를 접했다. 난 그를 만나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라도 만나고 싶다. 듣자하니 무라타는 스승의 묘지를 남몰래 찾는다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참회하며 살기 때문에 남몰래 가는 것이 아닐까.
 
난 그에게 돌을 던지고 싶지 않다. 지난 세월을 살아오면서 용서만이 가장 좋은 미덕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한국인들은 일제 강점기 때문에 일본에 대해 피해 의식이 많다. 스승이 일본 야쿠자의 칼에 찔려 사망에 이른 것에 대해 대단히 분개하고 있다. 그렇지만 무라타가 용서를 구하면 43년간 맺힌 한이 풀릴 것 같다. 나아가 한국과 일본 양국 모두에 또 다른 화합의 장이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난 그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래서 무라타도 그 속박에서 영원히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진짜 만나고 싶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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