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 다음 역도산"이라 불리던 스승은 1963년 12월 15일 갑작스럽게 타계했다. 스승은 이달 9일 산노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그때가 월요일이다. 산노병원은 수술할 의사가 없었지만 그런데도 그곳 병원에 간 것은 스승이 선노병원장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 스승 사망 후 2개월여 만에 일본에 돌아온 내가 안토니오 이노키와 악수를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또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큰 병원에서 수술받는다면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고, 천하의 스승이 칼에 찔렸다면 팬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것 같아 극비리에 이 병원에서 수술했다. 스승이 칼에 찔린 것과 수술은 극비리 이뤄졌지만 언론은 귀신같이 이 사실을 알았다.
전치 2주 상처의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스승은 병실에서 레슬링 흥행 대책 회의도 주재했다. 그런데 스승이 갑자기 복막염을 일으켰다. 회진 중 원장이 이를 발견했다. 상태가 악화하면서 재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은 15일 오후 2시 30분 시작, 4시 무렵 끝났다. 수술 후 의사는 "이제 걱정 안해도 된다"라고 말했다.
스승은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해 잠든 상태였고, 의사가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안심시켜 이들은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그때 병원에 누가 남아 있었는지 잘 모른다. 그들이 나간 사이 스승은 호흡 곤란에 고통스러워 하면서 사망한 것이다.
스승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병상 일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난 12월 9일 새벽에 실시한 수술 후 경과는 순조로운 회복 단계였다. 하지만 14일 저녁부터 복막염을 일으켜 일반적 상태가 차츰 악화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15일 오후 2시 30분 재수술에 들어가 4시에 종료됐다. 수혈 등에 의해 약간의 차도를 보였으나 오후 9시 급격하게 쇼크 상태에 빠졌다. 모든 치료 효과도 없이 오후 9시 50분 불행한 전기를 맞았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스승의 사망 원인은 화농성 복막염. 클럽에서의 사소한 시비로 일본 야쿠자의 칼에 찔린 스승은 소장에 상처를 입어 수술을 하게 됐는데 그 부작용으로 돌연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승은 수술 후 회복기에 있었으며 부작용이 일어날 만한 다른 이유가 전혀 없었다.
건강을 되찾고 있던 스승의 갑작스러운 상태 악화와 2차 수술. 과연 이해 12월 8~15일 병원에 입원해 있는 일주일 동안 스승에겐 어떠한 일이 일어났었는가? 수술 후 의사의 특별한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물과 탄산음료는 절대로 마시면 안된다. 그런데 스승이 탄산음료수를 마셨다는 소리를 들었다. 마셔선 안될 수분을 취한 것이 복막염을 유발한 직접적 원인이라 했다.
그렇다면 스승에게 탄산음료를 준 사람은 누구일까? 스승 제자 중 안토니오 이노키가 스승에게 탄산음료를 직접 건네준 사람으로 의심받기도 했다. 수술한 후 갈증을 느꼈던 스승이 이노키에게 "사이다 줘"라고 말하자 이노키가 무심결에 줬다는 것이다. 스승이 그렇게 말하면 누가 거역하겠는가. 나라도 줬을 것이다. 그러나 이노키는 그런 소문에 억울해 했다. 그는 주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병실을 지켰던 스승의 부인(다나카 게이코)도 주지 않았다.
아무도 주지않았다면 스승이 일어나서 그것을 직접 마셨단 말인가? 스승도 의사에게 "탄산음료수를 마시지 않았다"라고 했다. 탄산음료와 직접적 연관이 없다면 복막염은 왜 갑자기 일으켰는가? 스승의 죽음에 대해 일본 의학계에서조차 "복막염이 직접적 원인"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원인이었고 직접적 사인은 아니었다. 당시 재판 과정에서 의사는 "마취제를 보통 사람의 두 배로 사용했다"라고 증언했다. 프로레슬러는 일반인과 다른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마취량을 늘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마취를 했는지 마취 진료 카드는 법정에 제출되지 않았다. 왜 제출되지 않았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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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이노키는 스승에게 탄산음료를 준 사람으로 지목돼 곤혹을 치렀지만
그런 적이 없었다. 이노키의 앳된 얼굴이 순박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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