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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86]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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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 역도산 묘지를 참배한 후 머릿속 잡념을 모두 훨훨 날려 보냈다. 스승이 작고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에 돌아간다면 그동안의 고생이 물거품이 되고 가슴속에 영영 한으로 맺힐 것 같았다. 스승 작고 후 동문들로부터 들었던 서운했던 감정도 가슴속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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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이언트 바바와의 경기는 늘 박빙이었다. 경기 중 점프를 한 후 이마를 받았지만 끄떡없었다.
그의 맷집은 대단했다.


 
그들과 함께 다시 일본프로레슬링 부활을 위해 힘을 합치기로 했다. 일본에 온 지 사흘 만에 다시 신발끈을 동여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프로레슬링 경기에 출전, 팬들에게 화끈한 경기를 보여 주는 것이다.
 
스승 제자 중 가장 먼저 세계 챔피언이 되면서 나의 인기와 주가도 치솟았다. 동문들이 레슬링 흥행을 위해 나를 간절히 원했던 것도 세계 챔피언이란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박치기는 흥행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다른 선수들의 레슬링 기술이라 해 봤자 꺾기·조르기·보디슬램 정도였다. 그러나 난 이런 기술뿐만 아니라 박치기까지 보태어 그만큼 팬들은 흥미와 박진감을 두세 배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레슬링 흥행을 위해 나를 비롯한 동문들은 때론 동지로, 때론 적으로 링에 올랐다. 당시 일본 레슬링계의 흥행은 나·자이언트 바바·안토니오 이노키·요시무라·맘모스 등이 좌지우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바바와 이노키 그리고 나는 '역도산 3각 편대'라 불렸다.

이노키도 한층 성장해 갔다. 순진한 이노키는 링에만 오르면 난폭하고 무법자가 됐다. 바바도 더욱 괴물로 변해 갔다. 스승이 작고하기 전까지는 스승 1인 독주였다면 이젠 여러 명이 물고 물리는 접전을 벌여 팬들은 자신에 맞는 선수를 선택해 응원할 수 있었다. 동문들도 팬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와 기량을 더욱 갈고 닦았다.
 
바바와 나의 대결은 흥미진진했다. 바바와는 삼십여 차례 경기를 벌였던 것으로 기억 난다. 그와의 경기는 늘 박빙이었다. 그와 경기를 앞두면 언론은 16문킥과 박치기의 대결이 펼쳐진다며 대단한 흥미를 보였다.
 
사실 웬만한 레슬러들은 나의 박치기 세 방이면 나자빠졌는데 바바는 워낙 힘이 좋은 거인이라 그런지 그렇지 않았다. 기억으론 열 번 이상을 받아도 끄떡없었다. 그의 뚝심과 참을성은 대단했다. 한 번은 이마를 받았는데 그는 손으로 이마를 닦더니 픽 웃는 것이었다. 받을 테면 받아 보라는 제스처였다.
 
계속 이마를 받았지만 여전히 끄떡없었다. 그후 그의 반격이 시작됐다. 로프로 던져 반동으로 튀어나오는 나를 향해 그의 큰 발이 날아와 복부를 강타했다.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는 보디슬램으로 나를 매트에 내동댕이쳤다. 나의 패배였다.
 
링에선 적수였지만 경기 후 라커에서 만나면 우리는 다정한 선·후배가 됐다. 그는 "선배, 머리가 너무 아파요. 링에서 얼마나 참은 줄 아십니까? 제발 세게 받지 마세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패자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난 속으로 '다음에 너의 이마에 혹이 수십 개 나게 해 줄 테다'라고 다짐했다.
 
쇼맨십이 강했던 이노키는 내가 박치기 한 방을 날리면 온갖 아프다는 시늉을 다했다. 박치기 한 방에 링 밖으로 떨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는 경기 전 "오늘만은 박치기 좀 하지 마세요"라며 애원 섞인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링에 오르면 인정 사정이 없었다.
 
일본 열도를 돌면서 이런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펼치다 보니 레슬링은 다시 흥행가도를 달렸다. 레슬링 경기장은 늘 만원이었다. 특히 나와 바바·이노키 등이 한 팀을 이뤄 미국 선수들과 맞붙는 날이면 경기장 열기는 하늘을 뜨겁게 달구었다. 팬들은 역도산 제자들이 링에서 펼치는 현란한 기술을 만끽하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내가 일본서 맹활약을 펼치자 한국의 언론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 출신 레슬러 김일 일본 열도 뒤흔들다"란 기사가 소개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말쑥한 정장 차림의 한국인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한국 중앙정보부 소속 요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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