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2월 초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63년 9월 초 스승의 특명을 받고 세계 챔피언 벨트를 따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지 근 5개월 만이다. 일본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찾았던 곳은 도쿄 시부야에 있는 리키스포츠팰리스타운이었다. 스승 역도산의 꿈과 야망이 살아 움직이던 곳이다.
↑ 스승 역도산 동상에 꽃다발을 걸었다.
레슬링 연습장에 들어서자 저 멀리서 스승이 "야, 김일"하고 금방이라도 부를 것 같았다. 스포츠타운도 주인을 잃었다는 것을 아는지 그 활기 넘쳤던 체육관이 쥐 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체육관을 나왔다. 그리고 체육관 옆 단골집이었던 횟집으로 들어갔다. 여주인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나에게 일본인 여성 이다를 소개시켜 줬던 주인이다. 여주인은 "왜 이제야 나타났느냐? 얼마나 걱정했는데 …"라며 안부를 물었다.
난 "별일 없으시죠"라며 픽 웃기만 했다. 여주인은 "신문에서 세계 챔피언이 된 것을 보았다"면서 "하도 돌아오지 않아 미국에 주저앉은 줄만 알았다"라고 말했다.
난 "스포츠타운은 계속 운영되고 있죠"라고 물었다. 그는 한숨을 푹 쉬면서 "역도산 선생이 죽은 후 모든 게 푹 처져 있다. 프로레슬링 선수 중 일부는 스모를 한다고 짐을 싼 것 같다"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날 저녁 그곳에서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하고 싶었다. 여주인은 나의 처지가 딱했는지 마음을 달래 주었다. 술이 한 잔 한 잔씩 들어가자 가슴속 깊은 곳에서 설움이 북받쳐 왔다. 일본을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동문들 말마따나 '보증인 격인 스승이 없는데 더 이상 일본서 레슬링을 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나의 일본인 첫 사랑 여인 이다가 나타났다. 여주인이 부른 것이다. 그는 내 얼굴을 쳐다본 후 눈물을 흘렸다. 일본서 나의 처절했던 삶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는 나의 손을 잡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가 옆에 앉으니 그래도 막혔던 가슴이 약간이나마 뚫리는 것 같았다.
그에게 "나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 말에 이다는 놀라워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다는 "그렇게 고생했는데 왜 한국으로 가느냐"라며 만류했다. 이다의 따뜻한 말은 나의 마음을 녹였다.
그 다음날 스포츠타운으로 다시 갔다. 안토니오 이노키·자이언트 바바 등 동문들이 운동하고 있었다. 내가 나타나자 모두들 놀라워하면서 반겼다. 그들은 나를 따뜻하게 맞아 줬다. 그들은 스승이 작고한 후 일본프로레슬링의 진로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고, 이미 일본프로레슬링협회장을 영입했다.
난 그들과 나의 진로에 대해 얘기하면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라고 했다. 그들은 극구 반대했다. 일본프로레슬링 흥행을 위해선 내가 필요하다고 했다. 일본프로레슬링협회 임원들도 "스승도 네가 일본서 활약하기를 바란다. 왜 한국으로 가려고 하느냐"며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들은 "과거를 잊자, 미래를 위해서 우리가 함께 뭉쳐야 한다"라고 했다. 그날 그들은 나를 위해 근사한 파티도 열어 줬다. 그리고 그 다음날 도쿄 오타구 이케가미역 근처 혼몬지 묘역에 잠들어 있는 스승 묘지를 찾았다. 스승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던 난 그제서야 스승이 이승의 사람이 아니다란 사실을 절감했다.
난 그 묘지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김일이가 곁에서 지켜 주지 못해 너무 너무 죄송합니다"라며 오열했다. 그리고 챔피언 벨트를 스승 묘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를 깨물었다. 스승의 뜻을 받들어 일본 열도를 다시 흔들겠노라고. 묘지 주변의 까마귀 떼들이 몰려와 내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계속>
[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85]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스승이 작고한 후 난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지만 스승 묘지를 참배한 후 생각을 고쳤다.
''일본 최고의 레슬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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