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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89]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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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레슬링 데뷔 이후 영광과 좌절이 교차됐던 해가 1965년이었다. 그해 6월 10일 난 영구 귀국했다. 귀국 전 미국과 일본에서 경기하면서 팬들에게 나의 존재를 각인시킴과 동시에 작별을 알렸다.
 
4월에는 미스터 모터 선배와 함께 한조를 이뤄 북미 태그 챔피언십에 도전, 챔피언 벨트를 획득했다. 63년 12월 WWA 세계 태그 챔피언 등극 이후 1년 4개월 만에 미국에서 다시 챔피언 벨트를 딴 것이다. 미국 팬들은 내가 WWA 세계 태그 챔피언이 되자 운이 좋았다는 식이었지만 북미 태그 챔피언 벨트까지 거머쥐자 그때부터 동양의 한 레슬러인 나를 주목했다.
 
그 다음 열린 두 경기에선 반칙으로 인해 잇따라 패했다.
 
미국 휴스턴에서 열린 세계 헤비급 1위 킬러 카부콕스와 결전을 벌이다가 병에 이마를 맞아 24바늘을 꿰맸다. 그는 나의 박치기에 벌벌 떨면서 보복 차원에서 병으로 이마를 내리찍어 상처를 입혔다.
 
머리 상처가 거의 다 나을 즈음인 4월 말에는 세계 헤비급 챔피언 루 테즈에게 도전했다. 그러나 링 밖에서 날아 온 의자에 머리가 찢어져 분패했다. 내가 다 이긴 경기였는데 누군가 고의로 의자를 던져 나의 머리를 찍는 바람에 지고 말았다. 만약 홈링이었던 일본과 한국에서 경기를 치렀다면 나의 승리가 확실했을 것이다.
 
온몸에 피가 흘러내렸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경기를 치른 나의 투혼에 미국 팬들은 큰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이 경기 후 난 챔피언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렸다. 미국 팬들은 내게 사인 공세를 펼쳤고, 또 할리우드 스타들까지도 나와 만남을 원했을 정도였다.
 
미국서 세 경기를 치른 후 난 한국으로 영구 귀국할 결심을 했다. 한국과 일본이 국교 수립 발표만 남겨 놓았던 6월 10일 귀국했다. 내가 귀국한 12일 뒤 한국과 일본의 국교가 수립됐다.
 
국교가 수립되면서 일본은 더욱 가까운 나라가 됐다. 한국인들도 일본에 밀항할 이유가 없었고, 또 일본인도 한국에 떳떳하게 입국할 수 있었다. 당시 한국에선 국교 수립에 대해 찬·반 여론이 뜨거웠다. 국교 수립이 한·일 관계 재정립이라는 긍정적 면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일제 강점기로 인한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이 격한 상태로 치달았다.
 
그러나 프로레슬링만큼은 '봄바람'이 불었다. 한·일 국교가 수립되면서 프로레슬링계도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내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

 

또 일본 선수들을 한국으로 데리고 오는 데 문제가 없었다. 지금은 축구·야구·배구·농구 등 많은 다양한 종목에서 한국과 일본이 경쟁 관계로 스포츠 맞대결을 펼치고 있었지만 한·일 국교 수립 이전까지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극히 제한적으로 어쩌다가 경기를 갖는 게 고작이었다. 한·일 국교가 수립되면서 스포츠 외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한·일 스포츠 가교 역은 프로레슬링이 맡았다고 할 수 있다.
 
난 한국과 일본을 자주 오갔다. 65년 8월 한국에서 빅매치가 성사됐다. 그때 난 일본의 모리와 대결에서 승리하며 초대 극동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했다.
 
그 경기가 끝나고 며칠 뒤 한국의 레슬러 지존을 가리는 경기가 열렸다. 나와 장영철의 경기였다. 장영철은 한국 레슬링의 독보적 존재였다. 자연스럽게 그와 나의 경기는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도 나 못지않게 인기가 많았지만 인기의 많고 적음을 떠나 그도 승리를 원했고, 나 역시 지고 싶지 않았다.
 
장영철은 한국 레슬러 중 유일하게 레슬링 기술을 다 구사할 줄 알았다. 그의 몸은 돌보다 더 단단했다. 만약 그가 일본서 활약했다면 많은 팬들을 확보했을 것이다. 당시 난 박치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 경기에서만큼은 머리가 아닌 손과 발로 승부를 결정짓고 싶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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