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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74]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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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한국과 일본인은 서로 선의의 경쟁을 벌였지만 프로레슬링 응원에서만큼은 하나였다. 내가 경기를 하는 날이면 한국과 일본 교포들이 함께 모여 응원에 열을 올렸다. 심지어 중국인들까지 가세했다. 일본·중국인들에게는 내가 한국인을 떠나 동양인으로 비쳐졌고. 그리고 그 동양인이 미국인들을 이기는 것에 대해 일종의 희열을 느꼈기 때문인 듯했다.

 

1963년 12월 9일 세계챔피언에 도전하기까지 난 일주일에 두 번 꼴로 링에 올랐고 그때마다 거의 승리했다. 승리 원천은 바로 한국과 일본 교포들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뒷바라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그들은 나에게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에서 후원회장을 자처했던 한국인 이춘성씨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한마음으로 나를 도와 줬다.

 

12월 7일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미국인 선수를 폴승으로 꺾었다. 이에 따라 미스터 모터와 함께 WWA(세계레슬링연맹) 태그 타이틀 도전 자격을 획득했다. 9월 7일 미국 방문 길에 오른 후 3개월 만이다.

 

대망의 타이틀 도전을 앞두고 8일 저녁 WWA는 LA 한 호텔에서 출전 선수들을 위해 리셉션을 주최했다. 9일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전부 참석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경기에 임하는 각오와 의욕을 다졌다. 우리 상대는 미 서부 태평양 연안을 휘어잡고 있던 랩 마스터 콤비였다.

 

언론은 서양과 동양의 레슬러가 챔피언 벨트를 놓고 맞붙는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보이며. 나의 해머 박치기와 랩 마스터 콤비의 힘 대결이라고 표현했다. 당시 나의 박치기는 미국서도 유명세를 탔다.

미국 프로레슬러들에게 박치기는 약간 생소했다. 그들이 기껏 본 박치기는 브라질 선수들의 밋밋한 박치기 였을 것이다.

내 박치기는 누차 강조했지만 허리를 뒤로 제친 후 받는 것이어서 그 강도와 상대방이 받는 충격이 달랐다. 리셉션장에 모인 레슬러들이 가장 궁금해 한 것은 나의 머리였다. 내일 저녁 맞붙을 상대와 마주쳐도 리셉션장에선 서로가 웃었다. 그리고 농담도 오갔다.

 

미국 선수들은 나에게 다가와 “당신의 머리가 진짜 돌인가”라고 물었다. 난 굳이 “아니다”라고 말할 이유가 없었다. 난 나의 머리를 손으로 톡톡 치며 “돌보다 더 단단하다”라고 확인시켜 줬다. 그리고 “박치기로 돌도 두 개로 쪼갠다”라고 덧붙였다. 그들은 놀라워하며 경계하는 눈치였다.

 

그들은 나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다고 했다. 난 기꺼히 확인해 보라고 응했다. 내가 확인해 보라는 것은 이들에게 나의 머리를 한 번 만지도록 허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진짜 돌인지 아닌지 확인한다며 주먹으로 나의 머리를 쾅 내리찍지 않는가. 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자신이 주먹으로 내리찍은 손이 아프다는 시늉을 하자 다른 선수들도 “얼마나 머리가 단단하길래 아프다냐”며 여기저기 흐트져 있었던 선수들이 순식간에 몰려와 번갈아 가며 주먹으로 가격했다.

 

처음 맞을 때는 모르겠는데 여러 명이 번갈아 가며 머리를 때리자 띵하고 아파 왔다. 그렇다고 인상을 찡그릴 수도 없었다. 나의 오기와 배짱 그리고 박치기 자만심이 부른 화근이었다. 난 그날 저녁 숙소로 돌아갔다가 머리가 너무 아파 얼음찜질을 했을 정도였다.

 

내가 아파하자 모터 선배는 야단쳤다. 경기를 앞두고 머리를 때리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솔직한 심정에선 경기가 일주일 연기됐으면 바랐다.

 

12월 9일 대망의 WWA 태그매치의 날이 밝았다. 그날 긴급 국제전화가 걸려 왔다. 스승(역도산)이 칼에 찔렸다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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