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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72]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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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됐다"라는 말이 있다. 수년간 고생 끝에 스타가 된 나를 미국에 가서 실감했다. 거리에서 만나는 일본인들은 나를 알아보고 사인을 해 달라고 했다. 그들은 사인을 받으면서 박치기 모션을 취하는 등 다정함을 보였다.
 
한 일본인 팬은 미국에서 이민 생활이 고달프고 힘들었는지 나를 보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한국인이 일본서 차별적 설움을 겪으며 살았듯 일본인도 미국서 그런 설움을 겪으며 살고 있는 것이었다.

이들은 내가 일본서 치른 경기에서 미국 선수들을 박치기 한 방으로 쓰러뜨린 것에 대리 만족을 느낀 듯했다. 스승이 가라데 촙으로 그들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줬듯이 난 박치기로 희망을 준 셈이다.
 
그런데 지금은 LA에 한국인이 많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인을 보기란 쉽지 않았다. 길가에서 마주치는 동양인은 대부분 일본인과 중국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에 오랜 시간 있으니 고국 음식이 그리워졌다. 한국인이 거의 없는데 한국 식당이 있을 리 만무했다. 미스터 모터는 가끔 일본인 식당으로 나를 데리고 가 입맛을 돋우려 했다. 그러나 일본 음식과 한국 음식은 매콤과 얼큰함에서 차이가 있다.
 
난 한국 음식이 먹고 싶어 수소문 끝에 LA 지역 흑인 밀집 동네에 한국인 식당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곳에 가 보니 고려식당 간판이 눈에 띄었다. 난 한국인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지금은 LA 가면 한국 식당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유일한 한인 식당이었던 것 같다.
 
난 본능적으로 가게로 들어갔다. 주인은 한국에서 이민 온 사람이었다. 난 그곳에서 오랜만에 고국의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신토불이란 말도 있듯 비록 고국에서 재배했던 채소와 야채가 아니었지만 고국의 음식을 먹으니 내일이라도 경기를 할 정도로 힘이 불끈 솟는 듯했다.
 
음식을 먹고 있는데 한 사람이 자꾸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는 한참 나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식사를 마치자 다가왔다. 그는 영어로 "혹시 레슬링 선수가 아니냐"라고 물었다. 난 그가 일본인인 줄 알고 일본말로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나의 주특기가 박치기며 최근에 어떤 선수와 경기를 펼쳤는지도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대단하다. 굿" 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가게 주인에게 다가가 한국말로 "저 사람 일본서 굉장히 인기 높은 레슬러"라며 한국말로 대화하는 것이었다. 난 그가 한국말을 하는 것에 귀가 솔깃했다. 모른 척하고 자리에서 일어날까 했는데 이국서 만난 동포는 핏줄이 당기기 마련인 것 같다.
 
난 한국어로 그에게 "한국 사람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예"라고 대답했다. 그는 내가 한국말을 사용하자 놀라는 눈치였다. 그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선생님도 한국인입니까?" "예, 한국인이죠."
 
그는 '박치기 왕'인 내가 한국인이란 사실을 듣고 까무라칠 듯이 놀라워했고, 한편으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나보다 네다섯살 아래였고, 미국 UCLA 대학에 재학하고 있는 유학생이었다. 그는 미국서, 그것도 TV를 보면서 응원했던 레슬러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란 사실이 너무 반가웠는지 나의 후견인이 될 것을 자처했다.
 
그와 레슬링에 얽힌 사연은 너무나 많다. 1970년대 중반 박정희 대통령은 나의 업적을 기려 서울 정동에 '김일체육관'을 지어 줬는데 미국서 교포 사회 건축학회 회장을 역임했던 그에게 김일체육관(현 문화체육관) 설계를 맡겼다.
 
지금은 서울 영등포구 목화웨딩홀 회장인 그는 내가 미국에 경기하러 가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식당서 만났던 인연이 한국 레슬링의 발전을 위해 뜻을 모은 관계로 발전했으니 그것이 인간의 만남이요, 인연인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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