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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 박치기왕 김일 [38]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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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인상은 특이했다. 얼굴이 컸고, 서구적으로 생겼다. 또 턱이 길어 처음 보아도 그의 인상은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체격은 좋았다. 어깨는 떡 벌어졌지만 너무 말라 바람 불면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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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도산 문하생으로 입문한 안토니오 이노키는 나를 친형처럼 잘 따랐고
각종 레슬링 타이틀을 놓고 혈전을 벌였던 후배이기도 했다.


 
저런 몸으로 거친 프로 레슬링을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는 내게 다가와 꾸벅 인사를 했다. '픽' 웃는 모습이 얼마나 순진하게 보였는지. 그가 1960~80년대까지 세계프로레슬링계를 쥐락 펴락 했던 안토니오 이노키다. 지금은 일본격투기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거물중의 거물이다.
 
그와의 만남은 역도산 도장에서 이렇게 시작했다. 난 1958년 이후 지난 30년여간 레슬링 선수로 활약하면서 그와 얽힌 사연은 너무도 많다. '사각의 링'에서 웃고 울었던 그와 애증의 관계는 다음에 좀 더 자세히 얘기하기로 하자.
 
이노키는 스승이 직접 스카우트 한 레슬링 선수다. 어쩜 스승이 외국에서 스카우트한 1호가 아닌가 싶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스승은 1959년도 제1회 월드리그전에서 프로레슬링의 인기를 폭발시킨 다음 1960년초 브라질 원정 경기를 떠났다.
 
그 원정경기에서 이노키를 발견한 것이다. 당시 브라질에서도 스승은 널리 알려졌다. 특히 브라질에 이민 간 일본인들에게 스승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민자들은 늘 서럽기 마련이다. 스승은 그 이민의 설움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브라질 선수와의 경기에서 가라데 촙으로 덩치큰 브라질 거구들을 무너뜨렸다. 당연히 이민자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기로는 안토니오 이노키 원래 이름은 '이노키 간지'였다. 그는 이름을 개명했다. 이노키는 브라질로 이민간 일본인이었다. 그가 브라질로 이민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2차 대전 패전 국가인 일본이 1950년대 중반까지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자 가족들이 이민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가나카와현 요코하마시 츠루미구 출신인 이노키는 11남매의 6남이다. 그는 14세 때 가족과 함께 브라질로 이민갔다. 덩치가 무척 컸던 그는 운동에 소질이 있었다. 어떤 운동을 해도 성공할 것 같았던 그는 브라질에서도 운동선수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브라질 육상선수권대회(주니어 부문)의 원반던지기와 투포환에서 우승, 올림픽 출전을 꿈꿨다. 당시 브라질로 경기하러 갔던 스승은 일본인 교포 소년이 투포환에서 우승했다는 사실을 접했고, 그에게 레슬링에 입문하도록 권했다. 이노키도 역도산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스승의 권유를 쉽게 받아들였다.
 
그와의 추억은 참으로 많다. 그는 역도산 도장에 입문한 이후 부터 나와 한 방을 사용했다. 그가 오면서 여러모로 편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는 밥 짓는 것과 빨래하는 것에 대해 익숙치 못했지만 우린 역할을 양분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의 턱은 참 인상적이었다. 한국식 표현이라면 그런 그의 턱을 '주걱턱'이라 부르지 않던가. 난 그를 주걱턱이라 불렀다. 그러면서 "넌 복싱을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권투 선수가 됐다면 턱이 여러번 부러졌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라며 픽 웃는다.
 
습관처럼 잘 웃었던 그는 나를 친형처럼 잘 따랐지만 그의 속은 야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노키는 입만 열면 "선배 전 반드시 세계레슬링계를 석권하겠습니다"라며 각오를 다졌다. 샌드백을 치면서 혹은 역기를 들때도 세계챔피언을 외쳤다.
 
나의 꿈도 세계프로레슬링을 석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챔피언은 두명이 될 수 없다. 이노키가 그런 말을 하면 난 농담같은 진담으로 "너와 난 훗날, 하나는 하나를 꺾어야 하는 라이벌이 되겠네"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면 이노키는 "선배에겐 져야죠"라고 농담도 했다. 훗날 난 각종 타이틀을 놓고 이노키와 혈전을 벌였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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