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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 박치기왕 김일 [35]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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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가 많다는 것은 사실이다. 남자에게 여자가 많다는 것은 듣기에 따라 좋을 수도 또 나쁠 수도 있다. 나의 경우에는 어디에 포함되는지 모르지만 나 역시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었다.
 
좋은 것을 굳이 말하자면 동료들의 부러움 대상이랄까? 항상 여자 팬들이 나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 보이지 않게 어깨에 힘이 좀 들어갔고, 으쓱거릴 수도 있었다. 나쁜 것은 악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대표적 소문이 "오오키 긴타로는 여자 관계가 복잡하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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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여성 팬들도 나를 좋아했다.
1963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 헤비급 타이틀 매치에서 이겨 챔피언이 되자 당시 할리우드 배우들이 나와 기념 촬영했다.



난 이런 소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순전히 그들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난 팬으로서 첫 정이 들었던 이다를 빼고는 특별히 여자가 없었다. 문제는 여성 팬들이 많았던 관계로 늘 여성 팬들이 나를 자신들의 사귐 대상으로 해석하는 데 있었다.
 
길가를 지나가다가 여성 팬이 차를 한 잔 하자고 졸라대 어쩔 수 없이 응했다. 잠시나마 그들과 차 한 잔 하며 이런저런 대화의 상대가 대 준다. 또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팬들이 몰려들면 내 밥 값만 지불하고 나오기가 영 껄끄럽다. 가끔이지만 계산도 해 줬다.
 
난 귀찮을 정도로 여성 팬들이 집적거린 경우가 많았다. 그런 그들에게 싫은 티조차 내지 않고 호감을 보여 줬다. 그러면 훗날 이런 소리가 들린다. "나 오오키 긴타로 하고 데이트 했다", "긴타로는 내가 본 남성 중에서 키가 컸고, 내게 굉장히 호감을 나타냈다"는 식이다. 또 일부는 "난 그와 함께 잠자리를 했다. 긴타로는 정말 친절한 남자였다"라고까지 말한다.
 
나의 팬이기에 어쩔 수 없이 악수 한 번 했는데도 그들은 나와 사귀었다는 식으로 말을 와전시켰다. 그러니까 나와 악수한 여성 팬들은 전부 나와 스캔들이 난 여성들인 셈이다.
 
이런 소문은 스승 역도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스승은 야단은 치지 않았다. 다만 여성 관계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은 나중에 화를 입을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것이 좋다"라고 충고해 줬다.
 
스승의 말대로 뒷날 화를 입을 수도 있지만 내가 좋다는 팬들을 매몰차게 외면하지 못했다.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와 스타 레슬러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그것은 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떻게 그들을 모른 척할 수 있겠는가. 내가 만약 일본인이라면 다르다. 일본에서 멸시와 괄시를 받는 조선인인 내가 스타가 됐다. 난 그들의 '영웅'이 되고 싶었다.
 
나에 대한 이런 소문은 현해탄 건너 한국에까지도 퍼져 갔다. 난 그런 소문에 시달릴 때마다 나의 첫 아내(박금례)에게 늘 미안한 생각이 들곤 했다. 집에선 워낙 말이 없고 무뚝뚝한 남편이었다. 아내에게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남자가 살아 가면서 조강지처 가슴에 상처를 남기면 고생한다고 하는데 내가 늙어서 몰골이 초라해지고 병마와 싸우는 것도 아내에게 마음의 상처를 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도 든다. 후회한 적도 많았다.
 
아내는 내가 밀항한 이후 가정을 돌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어린 자식들을 돌봄은 물론 시부모까지 모시고 살았다. 아내는 장남인 내가 어디로 갔는지 연락조차 할 수 없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장례마저 혼자서 치렀다. 난 아버지가 작고한 줄도 몰랐다. 1년여가 지난 1959년 말 그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공도 보지 못했다. 그 많았던 타이틀 벨트 한 번 채워 드리지 못한 나에게 '불효자'란 멍에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 저승에서 아버지 뵐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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