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6)(xx2)
어느 여름의 태풍
우리의 어릴 적 꿈이 배어 있는 우리 집을 팔고 조그마한 오두막집으로 이사를 가던 날 우리 엄마는 서럽게(?) 서럽게 우셨다. 엄마가 그렇게 목 놓아 울지 않았어도 되었음은 곧 형님께서 새로운 집을 사서 이사함으로 증거되었지만 엄마가 그렇게 울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젖먹이 자식까지 잃어가며 손수 당신들이 지으셨던 집을 팔아야 했던 아쉬움 때문이었을 것 같다.
어쨌던 우리 식구는 허리를 굽혀야만 들어 갈 수 있는 조그마한 방이 2개 있는 오두막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 조그마한 방에는 항상 부락 청년들이 득시글거렸다. 조그마한 책상하나만 놓아도 두 사람이 발을 뻗고 자기에 빠뜻한 그 작은 방에서 우리 청년들은 서로의 살을 부비면서 라면 사내기와 막걸리 사내기 화투도 치고 놀면서 하루 일과를 마치곤 하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하루 종일을 그렇게 보내는 날도 있었고. 모이는 사람의 숫자는 무려 9 ~ 10명. 그 좁은 방이 무엇이 좋다고 날마다 그 곳으로 모였는지!
집이 크면 무엇하고 방이 크면 무엇하리! 아무리 크고 넓더라도 사람냄새가 나지 않은 집보다는 작은 집이나마 사람냄새가 나는 집이어야 한다는 그런 심정으로 엄마는 우리를 그렇게 허락해 주셨을 것이다.
광주에서 여름방학을 맞아서 친구 둘이 찾아왔다.
집은 좁고 하여 먹섬(오동도)에서 야영을 하기로 하였다.
먹섬에서의 야영 이틀 째!
알끝에서 수복이가 수영으로 먹섬엘 건너왔다.
올 때는 수영으로 왔지만 갈 때는 힘에 겨웠는지 우리가 타고 온 배를 타고 가겠다고 한다. 오늘 철수해야 하니 다시 배를 타고 올 것을 약속하고. 그런데 날씨가 심상치가 않다. 꼭 태풍이 올 것 같은 기분이다. 배가 와야 철수할 것인데 조바심응 내며 기다리고 있지만 수복이는 오지 앉는다. 어쩔 수 없이 하루 더 야영을 해야 했다. 친구 둘과 동생, 그리고 나 이렇게 넷.
텐트 끈을 나무에 단단히 묶고 텐트 주위는 배수로를 파는 등 나름대로는 점점 거세어 지는 비바람에 대비하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아침이 될려면 한 참이나 남은 새벽녘에 세찬 비바람으로 인해 텐트가 날아가 버린다. 놀란 우리가 짐을 챙기고 있는데 그 섬에서 주둔하며 멸치잡이를 하는 연소사람들이 배를 대피시키면서 우리의 도움을 청한다. 같이 힘을 합하여 배를 파도가 닿지 않은 곳에 대피시켜 놓고 멸막( 멸치잡이를 하는 사람들이 임시로 거처하며 도구를 보관하고 또 잡은 멸치를 삶고 하는 곳)으로 대피하였더니 이미 그 사람들은 모든 살림살이를 파도가 닿지 않을 정도의 높은 곳으로 대피시켜 놓았다.
세차게 몰아치는 비바람, 모든 것을 삼킬 듯이 하얀 혀를 날름대며 달려드는 파도!
태풍의 위력을 직접적으로 처음 만나 본 친구 녀석들의 얼굴이 질린다.
그러한 채로 날이 점점 밝아 왔다.
멸치잡이 사람들이 철수준비를 한다. 바다에 설치되어 있는 멸치잡이 그물을 조금이나마 안전하게 고정시키고자 그 높은 파도에도 불구하고 배를 띄운다. 달려드는 파도를 요리 저리 피하며 그물을 향해 노를 저어가는 뱃사람들의 노 젓는 실력은 역시나! 였다.
그물을 고정시켜 놓고 되돌아 온 그들이 곧 바로 철수를 하잔다. 그런데 배가 작으니 우리 일곱이 다 타면 위험할 것 같으니 한 사람은 남으란다. 말도 안되는 소리.
“아저씨(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연소의 우리 초등학교 40회 동창인 용빈이의 아버지였다)! 일곱이 타면 위험한 배가 여섯이 타면 안 위험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누구를 여기에 남겨 놓고 가겠습니까! 제가 열심히 노를 저을 테니 같이 타고 갑시다.”하고 사정했더니 그 분도 어쩔 수 없이 승락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들을 남겨 놓고 올 것인가, 동생을 남겨 놓고 올 것인가?
그렇다고 솔직히 나 혼자 남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한 사람씩 교대로 앞에서 노를 젓는 그 분들의 뒤에서 있는 힘을 다하여 노를 따라 젓고 있는 나에게 바람이 몰고 오는 비화살이 살을 파고 드는데도 아픈 줄을 몰랐다. 친구들과 동생은 겁에 질려 꼼짝도 하지 않고 배에 바짝 엎드려 있다. 어렵게 우두 선창에 도착했더니 아! 어떤 배 한 척이 밑바닥이 깨진 채 거센 파도에 이리 저리 밀려 다니고 있었으니 그 배는 수복이가 타고 가 우리집에 알리지 않아 방파제로 돌리지 못한 우리 배였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배가 먹섬에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하시고 배에 대해서는 안심하고 우리만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셨으니 이 노릇을 어찌할꼬!
그 후로 그 친구들은 한 번도 우리 마을을 방문하지 않았다.
금산면 체육대회
금산면의 상주인구가 20,000명 이쪽 저쪽이었던 1970년대의 금산면민의 화합의 장이었던 금산면민체육대회!
이 행사는 금산면에 상주하는 청년들, 어른들, 아이들 뿐 아니라 금산을 떠나 있던 청년들에게도 가장 관심이 큰 행사였다.
지금 이 나이가 되었어도 격년제로 개최된다는 체육대회에 직접은 못 가보지만 개최 여부와 대회 결과를 확인하곤 하니 당시의 열기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쇠머리 부락은 전통적으로 배구가 강했다. 그 때의 배구를 주도했던 공종안 형님과 키다리 길남이.
이 들의 부모는 몇 번이나 돌아가셨을까?
우리 부락이 배구 종목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그 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객지에 있는 그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고향으로 불러 내려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쓸 수 있었던 방법은 단 하나 「부친사망, 급래 요」! 우체국에서 그들이 소속되어 있는 직장과 학교에 전보로 연락하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그 전보가 무슨 전보인지 알게 되었지만 맨 처음에 그 전보를 받아 본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울면서 울면서 진몰 선창에 내렸던 그들은 기대했던 대로 우승컵을 부락에 안겨주고는 웃으면서 배를 타고 떠나던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요즘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인지라 그 들이 소속되어 있는 곳에서는 그 전보의 진위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다 보니 첫해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중에는 어머니, 다음에는 큰아버지 또 다음에는 큰어머니 또또 다음에는 아버지로 되돌아가곤 하였으니 과연 그 들의 부모는 몇 번이나 .......?
육상의 춘식이, 경주, 종합우승을 놓쳤다고 안타까워 하고 있는데 생각하지도 않았던 마리톤에서 1위를 하여 우리에게 종합우승기를 안겨 주었던 학문, 육상 800m 계주선수 1명이 부족하여 술을 자주 마셔 자신이 없다는 놈을 억지로 출전시켰는데 달린다 것 보다는 굴러간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잘 굴러가 결국 1위룰 하게 했던 원일이. 그 뜨거운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마을광장에서 배구연습을 하고 나서 부녀회에서 만들어 준 콩국수를 먹는 맛이란!
체육대회 당일이면 부락의 부녀회에서 준비한 점심을 온 부락 사람이 같이 먹게 되는데 해마다 되풀이되는 이런 행사를 불평 한마디 없이 해 주었던 부녀회에게 감사를 보내며 이런 것들이 모두 고향(마을)사랑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닭서리
어느 날!
윗 선배님(해식이 형님, 장용 형님, 기두 아제 등등)들이 시합을 하잔다. 우리 팀들과 자기네 팀들이 닭서리를 하여 적게 잡아온 팀이 술 값을 부담하는.
우리는 진몰 모모씨 집에서 통통한 닭으로 2마리를 서리해 왔는데 아뿔사! 선배님들은 우리만 시켜 놓고 자기네들끼리 술 값 부담하기 화투만 치고 있는게 아닌가. 우리가 선배님들의 술수에 속아넘어간 것이다. 이 일이 이렇게만 끝났으면 기억에도 없을 터인데 이 사건은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닭을 잃어버린 모모씨가 지서에 신고를 하여 버린 것이다. 결국 범인이 우리라는 것이 밝혀지고 그 닭을 먹었던 사람들 전체가 1인당 닭 10마리에 버금가는 돈을 갹출하여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모모씨는 우리 부락에서 살지 못하고 어디론가 이사를 하였는데 그 이유가 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또 어느 날!
흥배 형님이 우리가 놀고 있는 우리네 방으로 와서 초소의 전투경찰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말씀하신다.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자기네 닭이 몇 마리 없어 져 그 서리꾼을 잡으려고 부락을 염탐했으나 찾을 수 없어 혹시 하는 마음으로 전투경찰들이 근무하는 초소에까지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같이 어울려 놀고 있는 부락 처녀들 중에 동생인 정화가 있는 것을 보고 불러내어 야단을 쳤는데 그 행위에 앙심을 품은 전투경찰들에게 폭행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요즈음이라면 그냥 상부에 보고하거나 경찰에 신고만 하였어도 아무 탈 없이 순리대로 처리되었을 것을 젊은 혈기로 꽉 차있던 우리는 의분을 참지 못하고 다음 날 직접 폭행을 했다는 전투경찰을 단체로 두들겨 패 놨으니 그 결과가 어떠했겠는가? 다음 날부터 총를 들고 우리 집으로 달려드는 그 전투경찰에게 엄마는 두 손이 닳도록 빌고 또 빌었겄만 결국 사건은 지서로 넘어갔고. 마을 어르신들이 사방에 힘을 써서 어찌어찌 사건은 해결되었지만 잊을 수 없는 일 중의 하나였다. 그 친구는 우리부락 처녀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 풍문을 들은 바 있다.
또 또 어느 여름 날!
채성이 집에서 놀고 있는데 밤 늦은 시간에 후배 순용이가 닭을 한 마리 손에 들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더니 방으로 들어가잔다. 그러더니 그 닭을 아무렇게나 이불 속에 쑤셔 넣고는 불을 끄고 잠을 잔 척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그가 하자는 대로 따라 하는데 조금 있으려니 밖에 누군가가 와서 방안을 염탐한다. 우리가 자는 척 하고 있으니 그 사람도 어쩔 수 없이 물러 갔는데 한참 후 어떻게 된 일이냐 하고 물었더니 술안주나 하려고 진몰에서 닭을 한 마리 서리했는데 주인인 안수 형님에게 들켜 버렸단다. 아니 들켰으면 닭이라도 버리고 달아나지 어쩌자고 그 닭을 꼭 들고 왔을꼬. 사위에게 씨암탉을 잡아 먹인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그 당시에는 고기를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그 닭을 버리기에 아까웠겠지만 결국 그 닭은 우리의 입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땅 속으로 묻히었다. 닭 주인이 우리를 의심하고 주목하고 있는데 감히 닭 끓인 냄새를 피울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안수 형님! 그 때 그 주범은 박순용이었고 우리는 동조범이었답니다. 다음에 뵙게 되면 술 한잔 사겠습니다. 이제라도 자수한 것을 어여삐 여겨 용서하여 주십시오. 서울에서 우리 쇠머리부락을 대표하여 활동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어장정리!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다.
당시에는 바다에서 생산하는 해태(김)가 우리 쇠머리의 주 수입원이었다. 인근연안을 진몰 앞 바다(장사포), 큰 부락 앞 바다(촌전), 따슨금이(온금포), 몰막금이(야막포)로 구분하여 각 호마다 균등하게 배분하여 김을 키우는 발을 설치할 권리(발자리라고 했음)를 인정하였는데 그 발자리의 권리는 매매가 가능하여 일 할만한 식구가 많은 집에서는 그 권리를 사고(발자리를 산다고 했음) 돈이 없거나 일 할 사람이 부족한 집에서는 그 권리를 팔고 하여 각 집마다 각 구역의 발자리의 개수가 정해져 있었다. 또한 선창 부근의 일정구역은 김발을 설치는 할 수 있되 그 숫자가 많지 않아 균둥배분에서 제외하여 매년 부락 차원에서 1년을 단위로 필요한 사람에게 매도하여 부락의 수입금으로 잡았다. 또한 후에는 연소와 우두의 경계지점에 더 깊은 곳까지 개발하여 신간지로 명칭하여 해태생산을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각 집마다 각 구역의 발자리수는 확정되어 있지만 각 구역도 물살의 흐름, 선착장에서의 거리 등의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조금은 좋은 자리와 조금은 좋지 않은 자리가 있어 이것들은 매년 공평하게 추첨을 통하여 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 구역의 집집마다의 발자리의 수와 그 위치가 정하여 지면 일정한 형태로 발목을 박아 발을 설치하여야 하는데 그 발목을 박는 기초작업을 어장정리라고 했다. 그려진 계획도대로 그 집에서 내 놓은 깃말을 박는 일. 이 일을 각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 전체가 각 반별로 한 구역씩 맡아 한 날에 하는 것이다. 이는 부락전체의 협동심을 고취시킬 뿐만 아니라라 시간 및 경비가 절약되는 일석몇조의 효과가 있는 좋은 제도였던 것이다.
1980년부터는 김의 채취에서부터 건조까지를 기계가 하는 시스템이 도입되어 이 지주식 발이 없어지고 부류식 발이 성행하였으므로 어장정리라는 행사는 자연적으로 없어졌지만 마을 사람이 죽으면 모든 개인적인 일을 중지시키고 공동으로 장사를 지내는 일과 더불어 우리 쇠머리의 대표적인 단결된 모습의 하나였다.
수박 깨지는 소리
지금은 고스톱이 화투놀이의 압권이지만 당시에는 그 역할을 삼봉이 하였다.
꾼들이야 섰다판을 즐겼겠지만 우리네 서민들은 그 삼봉으로 담배내기도 하고 술내기도 하고 또한 손가락으로 이마박튕기기도 하였다. 그 삼봉은 표를 받은 사람 중에서 선과 또 다른 한사람 즉 두 사람만이 대결을 하는데 그 묘미는 패를 살 수 있다는 데에 있었다(패를 산다 것에 대한 설명은 길어지기 때문에 생략하고 그냥 요즈음의 고스톱에서의 따블, 따따쁠, 따따따블 제도라고 이해하면 됨).
어느 날 우리는 지금은 고인이 된 창주 성 집에서 이마빡튕기기 삼봉을 하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한결 같아서 처음에는 그냥 한 대, 두 대, 다섯 대, 이렇게 하다가 조금 많이 맞아서 이마가 부풀어 오른 사람은 오기가 발동하여 패를 사고(따블), 되사고(따따쁠), 또 되사고(따따따블)하게되어 이제 한 판만 돌려도 20대, 30대가 예사가 되었다. 이제부터가 문제다. 누군가의 "우리 30대를 계속 튕기기하면 시간만 흐르고 하니까 열대 단위는 주먹으로 때리기로 하자"는 제의에 서로가 좋다는 식으로 달려든다. 그러나 이게 또 문제다. 손가락으로 이마빡튕기기야 그 강도가 아무리 쎄도 문제 될 것이 없었는데(맞은 부분만 벌겋게 부어 오름) 주먹으로 이마빡을 때리면? 창주 성이 성격대로 하투를 치곤하여 많이 맞았는데 이제 문제의 그 판! 신용이가 이겨서 창주성의 이마빡을 두 대인가 주먹으로 때리고 손가락으로 몇 대인가를 때리고 나서 선을 잡았다. 두 번째인 내가 따라 친다고 하니 약이 바짝 오른 창주 성이 표를 사겠단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나는 패를 팔고 구경하고 있는데 그 판을 창주 성이 주먹 한방, 손가락 몇 대를 이겼다. 코를 씩씩불며 때릴려고 달려드는 창주 성을 보고 겁에 질린 신용이가 방문을 열고 도망 갈려다가 불쌍하게도 붙잡히고 흥정에 들어간다. 손가락은 생략하고 주먹만 한 대 맏기로. 창주 성이 일어나서 온 힘을 다해 주먹으로 내리쳤던 곳은 체념한 듯 두 눈을 감고 다소곳이 내밀고 있는 신용이의 이마가 아니라 바로 정수리! 순간 퍽!하는 둔탁한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서 어떻게 잘못된 것 아닌가 하고 신용이의 얼굴을 살피는데 다행히 아무런 문제는 없었다. 난 정말 신용이의 골통이 부셔져 버린 줄 알았다. 창주 성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정말이지 무던한 사람이었다. 막걸리 2되들이 한주전자를 입 한번 때지 않고 마셔버리고는 몇 개 나지도 않은 수염에 흘러내리는 술 방울을 쓰윽 훝으며 여봐라하고 장(?)한 표정을 하면서 안주를 씹던 창주 성아! 어째 거기에도 막걸리도 있고 쐬주도 있지예?
서울로 이사간 후 한 번도 못 본 신용이 친구는 잘 살고 있으리라 믿는다.
복쟁이(복어) 낚시!
우리가 어렸을 때는 우리의 아버지들이 거의 1주일 동안 어장을 나가 고기를 잡아 오곤 하였는데 그 시절에는 복어가 독이 있고 제사상에도 올라가지 못한 천한 고기로 인식되어 우리의 식사 대용으로 사용되었다. 쇠파리를 피하여 장대에 높이 달아 삐들삐들하게 말라 갈 즈음 된장에 버물러서 쪄 먹곤 하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그 맛이란 지금의 어떤 요리로도 낼 수 없는 진미였는데. 그러나 어느 때부터 복어가 일본으로 수출되면서부터 kg당 매출단가가 가장 높은 귀한 고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요즘에도 복어요리 하면 최고급요리로 전 날 술을 많이 마셨다거나 어려운 손님을 대접할 경우가 아니면 먹기가 쉽지 않은 요리이다. 이렇게 귀한 복어가 해마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6월초(?) 쯤에는 서해안에서 서식하다가 동해안으로 이동해 가는 길목이 우리 쇠머리 앞 바다 저 멀리 젖뜨기 섬 부근이었으니 그 때가 되면 복어를 잡는 배들로 북새통을 이루곤 하였다. 처음에는 낚시를 이용하여 복어를 잡았으나 인간들의 탐욕은 끝이 없어 나중에는 쇠갈쿠리를 만들어 복어를 낚는 것이 아니라 쇠갈쿠리로 후리는 방법이 이용되었다. 우연히 나도 꼭 한번 그 대열에 합류하였는데 이는 완전히 전쟁이었다. 무거운 쇠갈쿠리를 낚시줄에 매달아 복어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튀위스트를 추듯 줄을 당겼다 풀어줬다 하는 단순동작이 반복되는데 고기가 쇠갈쿠리에 걸리면 죽을 힘을 다하여 낚시줄을 건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이 던져 놓은 줄에 엉키어 고기를 놓친다는 것이다. 물을 밟지 않고 배로만 건너도 오동도에서 연홍도까지 건널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배가 모였던 날, 나는 요행히 정말 요행히 복어 한 마리를 걸어 최대한 빠른 속도로 낚시줄을 건졌으나 애석하게도 서너 척 정도 떨어져 있는 배의 낚시꾼의 줄에 걸리어 그 때 당시의 시가로 4~5만원 정도의 고기를 눈요기만 하고 놓쳐버렸던 기억이 새롭다.
군 제대 후의 우리집.
군에서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한 관계로 첫 휴가를 오지 못한 나는 군 입대후 23개월여 만에 첫 휴가를 나오게 된다. 그 동안 형이 제대하여 복직하고 집을 새로 사서 이사를 하는 등 우리 집도 이제 서서히 정상궤도로 돌아서고 있었다.
34개월의 군생활을 하고 1979년 초 봄 육군병장으로 만기 전역!
이제 나도 무엇인가를 하여야 한다. 공무원시험을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다. 책을 놓은 지 몇 년 만인가?
그러나 공부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우리 집은 형, 나, 동생이 줄줄이 남자라서 동네 청년들의 집합소가 되었던 것이다. 공부를 한다고 그들을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날마다 우리집은 청년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고 술 판이 끊일 날이 없었다. 누군가가 안주감이 생기면 우리 집으로 가져 오고 우리가 술판을 시작하면 그 들을 부르고. 같은 연배의 사람들이 다들 며느리를 보았던 나이의 엄마는 조금은 힘들었 겠지만 3대 독자인 아버지 한테 시집와서 위로 누나 두 분과 우리 3형제를 거뒀다는 뿌뜻함으로 나이를 잊으신 채 우리의 뒷바라지를 즐겨 하셨던 것이다.
원일이가 그랬다나.
우리 집 안 방에서 막걸리를 마시다가 갑자기 바지단추를 풀더니 꿇어앉아 오줌을 싸더란다. 형이 얼른 막걸리 잔으로 받쳤는데 막걸리가 변한 오줌인지라 그 양이 오죽 많을까! 받치고 있는 그릇이 턱없이 적어 한참을 철철 넘치는데도 오줌을 다 쌀 때까지 받치고 있는 그릇을 치울 수가 없었단다.
후기
졸필을 읽으시느라고 수고 하셨습니다.
가능한 한 시간의 흐름에 맞게 쓰고자 하였으나 꼭 그렇게 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읽으신 분들은 꼭 꼭 금산(쇠머리)에 얽힌 추억담을 이어 써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생각나는 대로 이어쓰기를 계속할 것입니다.
이번 한글날을 맞이하여 문화관광부에서 홍보한 내용에 따르면 이어쓰기에 대하여 ‘리플’이란 단어를 지양하고 ‘댓글’이란 단어를 권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앞으로 아무리 net 상의 용어 이지만 잘 못 된 것은 바르게 고쳐 쓰고자 감히 건의합니다.
세계에서 문자로는 유일하게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된 자랑스러운 우리의 한글을 소중하게 가꾸는 것도 우리가 꼭 지켜야 할 의무라 할 것입니다.
어느 여름의 태풍
우리의 어릴 적 꿈이 배어 있는 우리 집을 팔고 조그마한 오두막집으로 이사를 가던 날 우리 엄마는 서럽게(?) 서럽게 우셨다. 엄마가 그렇게 목 놓아 울지 않았어도 되었음은 곧 형님께서 새로운 집을 사서 이사함으로 증거되었지만 엄마가 그렇게 울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젖먹이 자식까지 잃어가며 손수 당신들이 지으셨던 집을 팔아야 했던 아쉬움 때문이었을 것 같다.
어쨌던 우리 식구는 허리를 굽혀야만 들어 갈 수 있는 조그마한 방이 2개 있는 오두막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 조그마한 방에는 항상 부락 청년들이 득시글거렸다. 조그마한 책상하나만 놓아도 두 사람이 발을 뻗고 자기에 빠뜻한 그 작은 방에서 우리 청년들은 서로의 살을 부비면서 라면 사내기와 막걸리 사내기 화투도 치고 놀면서 하루 일과를 마치곤 하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하루 종일을 그렇게 보내는 날도 있었고. 모이는 사람의 숫자는 무려 9 ~ 10명. 그 좁은 방이 무엇이 좋다고 날마다 그 곳으로 모였는지!
집이 크면 무엇하고 방이 크면 무엇하리! 아무리 크고 넓더라도 사람냄새가 나지 않은 집보다는 작은 집이나마 사람냄새가 나는 집이어야 한다는 그런 심정으로 엄마는 우리를 그렇게 허락해 주셨을 것이다.
광주에서 여름방학을 맞아서 친구 둘이 찾아왔다.
집은 좁고 하여 먹섬(오동도)에서 야영을 하기로 하였다.
먹섬에서의 야영 이틀 째!
알끝에서 수복이가 수영으로 먹섬엘 건너왔다.
올 때는 수영으로 왔지만 갈 때는 힘에 겨웠는지 우리가 타고 온 배를 타고 가겠다고 한다. 오늘 철수해야 하니 다시 배를 타고 올 것을 약속하고. 그런데 날씨가 심상치가 않다. 꼭 태풍이 올 것 같은 기분이다. 배가 와야 철수할 것인데 조바심응 내며 기다리고 있지만 수복이는 오지 앉는다. 어쩔 수 없이 하루 더 야영을 해야 했다. 친구 둘과 동생, 그리고 나 이렇게 넷.
텐트 끈을 나무에 단단히 묶고 텐트 주위는 배수로를 파는 등 나름대로는 점점 거세어 지는 비바람에 대비하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아침이 될려면 한 참이나 남은 새벽녘에 세찬 비바람으로 인해 텐트가 날아가 버린다. 놀란 우리가 짐을 챙기고 있는데 그 섬에서 주둔하며 멸치잡이를 하는 연소사람들이 배를 대피시키면서 우리의 도움을 청한다. 같이 힘을 합하여 배를 파도가 닿지 않은 곳에 대피시켜 놓고 멸막( 멸치잡이를 하는 사람들이 임시로 거처하며 도구를 보관하고 또 잡은 멸치를 삶고 하는 곳)으로 대피하였더니 이미 그 사람들은 모든 살림살이를 파도가 닿지 않을 정도의 높은 곳으로 대피시켜 놓았다.
세차게 몰아치는 비바람, 모든 것을 삼킬 듯이 하얀 혀를 날름대며 달려드는 파도!
태풍의 위력을 직접적으로 처음 만나 본 친구 녀석들의 얼굴이 질린다.
그러한 채로 날이 점점 밝아 왔다.
멸치잡이 사람들이 철수준비를 한다. 바다에 설치되어 있는 멸치잡이 그물을 조금이나마 안전하게 고정시키고자 그 높은 파도에도 불구하고 배를 띄운다. 달려드는 파도를 요리 저리 피하며 그물을 향해 노를 저어가는 뱃사람들의 노 젓는 실력은 역시나! 였다.
그물을 고정시켜 놓고 되돌아 온 그들이 곧 바로 철수를 하잔다. 그런데 배가 작으니 우리 일곱이 다 타면 위험할 것 같으니 한 사람은 남으란다. 말도 안되는 소리.
“아저씨(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연소의 우리 초등학교 40회 동창인 용빈이의 아버지였다)! 일곱이 타면 위험한 배가 여섯이 타면 안 위험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누구를 여기에 남겨 놓고 가겠습니까! 제가 열심히 노를 저을 테니 같이 타고 갑시다.”하고 사정했더니 그 분도 어쩔 수 없이 승락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들을 남겨 놓고 올 것인가, 동생을 남겨 놓고 올 것인가?
그렇다고 솔직히 나 혼자 남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한 사람씩 교대로 앞에서 노를 젓는 그 분들의 뒤에서 있는 힘을 다하여 노를 따라 젓고 있는 나에게 바람이 몰고 오는 비화살이 살을 파고 드는데도 아픈 줄을 몰랐다. 친구들과 동생은 겁에 질려 꼼짝도 하지 않고 배에 바짝 엎드려 있다. 어렵게 우두 선창에 도착했더니 아! 어떤 배 한 척이 밑바닥이 깨진 채 거센 파도에 이리 저리 밀려 다니고 있었으니 그 배는 수복이가 타고 가 우리집에 알리지 않아 방파제로 돌리지 못한 우리 배였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배가 먹섬에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하시고 배에 대해서는 안심하고 우리만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셨으니 이 노릇을 어찌할꼬!
그 후로 그 친구들은 한 번도 우리 마을을 방문하지 않았다.
금산면 체육대회
금산면의 상주인구가 20,000명 이쪽 저쪽이었던 1970년대의 금산면민의 화합의 장이었던 금산면민체육대회!
이 행사는 금산면에 상주하는 청년들, 어른들, 아이들 뿐 아니라 금산을 떠나 있던 청년들에게도 가장 관심이 큰 행사였다.
지금 이 나이가 되었어도 격년제로 개최된다는 체육대회에 직접은 못 가보지만 개최 여부와 대회 결과를 확인하곤 하니 당시의 열기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쇠머리 부락은 전통적으로 배구가 강했다. 그 때의 배구를 주도했던 공종안 형님과 키다리 길남이.
이 들의 부모는 몇 번이나 돌아가셨을까?
우리 부락이 배구 종목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그 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객지에 있는 그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고향으로 불러 내려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쓸 수 있었던 방법은 단 하나 「부친사망, 급래 요」! 우체국에서 그들이 소속되어 있는 직장과 학교에 전보로 연락하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그 전보가 무슨 전보인지 알게 되었지만 맨 처음에 그 전보를 받아 본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울면서 울면서 진몰 선창에 내렸던 그들은 기대했던 대로 우승컵을 부락에 안겨주고는 웃으면서 배를 타고 떠나던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요즘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인지라 그 들이 소속되어 있는 곳에서는 그 전보의 진위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다 보니 첫해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중에는 어머니, 다음에는 큰아버지 또 다음에는 큰어머니 또또 다음에는 아버지로 되돌아가곤 하였으니 과연 그 들의 부모는 몇 번이나 .......?
육상의 춘식이, 경주, 종합우승을 놓쳤다고 안타까워 하고 있는데 생각하지도 않았던 마리톤에서 1위를 하여 우리에게 종합우승기를 안겨 주었던 학문, 육상 800m 계주선수 1명이 부족하여 술을 자주 마셔 자신이 없다는 놈을 억지로 출전시켰는데 달린다 것 보다는 굴러간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잘 굴러가 결국 1위룰 하게 했던 원일이. 그 뜨거운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마을광장에서 배구연습을 하고 나서 부녀회에서 만들어 준 콩국수를 먹는 맛이란!
체육대회 당일이면 부락의 부녀회에서 준비한 점심을 온 부락 사람이 같이 먹게 되는데 해마다 되풀이되는 이런 행사를 불평 한마디 없이 해 주었던 부녀회에게 감사를 보내며 이런 것들이 모두 고향(마을)사랑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닭서리
어느 날!
윗 선배님(해식이 형님, 장용 형님, 기두 아제 등등)들이 시합을 하잔다. 우리 팀들과 자기네 팀들이 닭서리를 하여 적게 잡아온 팀이 술 값을 부담하는.
우리는 진몰 모모씨 집에서 통통한 닭으로 2마리를 서리해 왔는데 아뿔사! 선배님들은 우리만 시켜 놓고 자기네들끼리 술 값 부담하기 화투만 치고 있는게 아닌가. 우리가 선배님들의 술수에 속아넘어간 것이다. 이 일이 이렇게만 끝났으면 기억에도 없을 터인데 이 사건은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닭을 잃어버린 모모씨가 지서에 신고를 하여 버린 것이다. 결국 범인이 우리라는 것이 밝혀지고 그 닭을 먹었던 사람들 전체가 1인당 닭 10마리에 버금가는 돈을 갹출하여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모모씨는 우리 부락에서 살지 못하고 어디론가 이사를 하였는데 그 이유가 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또 어느 날!
흥배 형님이 우리가 놀고 있는 우리네 방으로 와서 초소의 전투경찰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말씀하신다.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자기네 닭이 몇 마리 없어 져 그 서리꾼을 잡으려고 부락을 염탐했으나 찾을 수 없어 혹시 하는 마음으로 전투경찰들이 근무하는 초소에까지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같이 어울려 놀고 있는 부락 처녀들 중에 동생인 정화가 있는 것을 보고 불러내어 야단을 쳤는데 그 행위에 앙심을 품은 전투경찰들에게 폭행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요즈음이라면 그냥 상부에 보고하거나 경찰에 신고만 하였어도 아무 탈 없이 순리대로 처리되었을 것을 젊은 혈기로 꽉 차있던 우리는 의분을 참지 못하고 다음 날 직접 폭행을 했다는 전투경찰을 단체로 두들겨 패 놨으니 그 결과가 어떠했겠는가? 다음 날부터 총를 들고 우리 집으로 달려드는 그 전투경찰에게 엄마는 두 손이 닳도록 빌고 또 빌었겄만 결국 사건은 지서로 넘어갔고. 마을 어르신들이 사방에 힘을 써서 어찌어찌 사건은 해결되었지만 잊을 수 없는 일 중의 하나였다. 그 친구는 우리부락 처녀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 풍문을 들은 바 있다.
또 또 어느 여름 날!
채성이 집에서 놀고 있는데 밤 늦은 시간에 후배 순용이가 닭을 한 마리 손에 들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더니 방으로 들어가잔다. 그러더니 그 닭을 아무렇게나 이불 속에 쑤셔 넣고는 불을 끄고 잠을 잔 척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그가 하자는 대로 따라 하는데 조금 있으려니 밖에 누군가가 와서 방안을 염탐한다. 우리가 자는 척 하고 있으니 그 사람도 어쩔 수 없이 물러 갔는데 한참 후 어떻게 된 일이냐 하고 물었더니 술안주나 하려고 진몰에서 닭을 한 마리 서리했는데 주인인 안수 형님에게 들켜 버렸단다. 아니 들켰으면 닭이라도 버리고 달아나지 어쩌자고 그 닭을 꼭 들고 왔을꼬. 사위에게 씨암탉을 잡아 먹인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그 당시에는 고기를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그 닭을 버리기에 아까웠겠지만 결국 그 닭은 우리의 입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땅 속으로 묻히었다. 닭 주인이 우리를 의심하고 주목하고 있는데 감히 닭 끓인 냄새를 피울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안수 형님! 그 때 그 주범은 박순용이었고 우리는 동조범이었답니다. 다음에 뵙게 되면 술 한잔 사겠습니다. 이제라도 자수한 것을 어여삐 여겨 용서하여 주십시오. 서울에서 우리 쇠머리부락을 대표하여 활동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어장정리!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다.
당시에는 바다에서 생산하는 해태(김)가 우리 쇠머리의 주 수입원이었다. 인근연안을 진몰 앞 바다(장사포), 큰 부락 앞 바다(촌전), 따슨금이(온금포), 몰막금이(야막포)로 구분하여 각 호마다 균등하게 배분하여 김을 키우는 발을 설치할 권리(발자리라고 했음)를 인정하였는데 그 발자리의 권리는 매매가 가능하여 일 할만한 식구가 많은 집에서는 그 권리를 사고(발자리를 산다고 했음) 돈이 없거나 일 할 사람이 부족한 집에서는 그 권리를 팔고 하여 각 집마다 각 구역의 발자리의 개수가 정해져 있었다. 또한 선창 부근의 일정구역은 김발을 설치는 할 수 있되 그 숫자가 많지 않아 균둥배분에서 제외하여 매년 부락 차원에서 1년을 단위로 필요한 사람에게 매도하여 부락의 수입금으로 잡았다. 또한 후에는 연소와 우두의 경계지점에 더 깊은 곳까지 개발하여 신간지로 명칭하여 해태생산을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각 집마다 각 구역의 발자리수는 확정되어 있지만 각 구역도 물살의 흐름, 선착장에서의 거리 등의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조금은 좋은 자리와 조금은 좋지 않은 자리가 있어 이것들은 매년 공평하게 추첨을 통하여 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 구역의 집집마다의 발자리의 수와 그 위치가 정하여 지면 일정한 형태로 발목을 박아 발을 설치하여야 하는데 그 발목을 박는 기초작업을 어장정리라고 했다. 그려진 계획도대로 그 집에서 내 놓은 깃말을 박는 일. 이 일을 각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 전체가 각 반별로 한 구역씩 맡아 한 날에 하는 것이다. 이는 부락전체의 협동심을 고취시킬 뿐만 아니라라 시간 및 경비가 절약되는 일석몇조의 효과가 있는 좋은 제도였던 것이다.
1980년부터는 김의 채취에서부터 건조까지를 기계가 하는 시스템이 도입되어 이 지주식 발이 없어지고 부류식 발이 성행하였으므로 어장정리라는 행사는 자연적으로 없어졌지만 마을 사람이 죽으면 모든 개인적인 일을 중지시키고 공동으로 장사를 지내는 일과 더불어 우리 쇠머리의 대표적인 단결된 모습의 하나였다.
수박 깨지는 소리
지금은 고스톱이 화투놀이의 압권이지만 당시에는 그 역할을 삼봉이 하였다.
꾼들이야 섰다판을 즐겼겠지만 우리네 서민들은 그 삼봉으로 담배내기도 하고 술내기도 하고 또한 손가락으로 이마박튕기기도 하였다. 그 삼봉은 표를 받은 사람 중에서 선과 또 다른 한사람 즉 두 사람만이 대결을 하는데 그 묘미는 패를 살 수 있다는 데에 있었다(패를 산다 것에 대한 설명은 길어지기 때문에 생략하고 그냥 요즈음의 고스톱에서의 따블, 따따쁠, 따따따블 제도라고 이해하면 됨).
어느 날 우리는 지금은 고인이 된 창주 성 집에서 이마빡튕기기 삼봉을 하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한결 같아서 처음에는 그냥 한 대, 두 대, 다섯 대, 이렇게 하다가 조금 많이 맞아서 이마가 부풀어 오른 사람은 오기가 발동하여 패를 사고(따블), 되사고(따따쁠), 또 되사고(따따따블)하게되어 이제 한 판만 돌려도 20대, 30대가 예사가 되었다. 이제부터가 문제다. 누군가의 "우리 30대를 계속 튕기기하면 시간만 흐르고 하니까 열대 단위는 주먹으로 때리기로 하자"는 제의에 서로가 좋다는 식으로 달려든다. 그러나 이게 또 문제다. 손가락으로 이마빡튕기기야 그 강도가 아무리 쎄도 문제 될 것이 없었는데(맞은 부분만 벌겋게 부어 오름) 주먹으로 이마빡을 때리면? 창주 성이 성격대로 하투를 치곤하여 많이 맞았는데 이제 문제의 그 판! 신용이가 이겨서 창주성의 이마빡을 두 대인가 주먹으로 때리고 손가락으로 몇 대인가를 때리고 나서 선을 잡았다. 두 번째인 내가 따라 친다고 하니 약이 바짝 오른 창주 성이 표를 사겠단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나는 패를 팔고 구경하고 있는데 그 판을 창주 성이 주먹 한방, 손가락 몇 대를 이겼다. 코를 씩씩불며 때릴려고 달려드는 창주 성을 보고 겁에 질린 신용이가 방문을 열고 도망 갈려다가 불쌍하게도 붙잡히고 흥정에 들어간다. 손가락은 생략하고 주먹만 한 대 맏기로. 창주 성이 일어나서 온 힘을 다해 주먹으로 내리쳤던 곳은 체념한 듯 두 눈을 감고 다소곳이 내밀고 있는 신용이의 이마가 아니라 바로 정수리! 순간 퍽!하는 둔탁한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서 어떻게 잘못된 것 아닌가 하고 신용이의 얼굴을 살피는데 다행히 아무런 문제는 없었다. 난 정말 신용이의 골통이 부셔져 버린 줄 알았다. 창주 성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정말이지 무던한 사람이었다. 막걸리 2되들이 한주전자를 입 한번 때지 않고 마셔버리고는 몇 개 나지도 않은 수염에 흘러내리는 술 방울을 쓰윽 훝으며 여봐라하고 장(?)한 표정을 하면서 안주를 씹던 창주 성아! 어째 거기에도 막걸리도 있고 쐬주도 있지예?
서울로 이사간 후 한 번도 못 본 신용이 친구는 잘 살고 있으리라 믿는다.
복쟁이(복어) 낚시!
우리가 어렸을 때는 우리의 아버지들이 거의 1주일 동안 어장을 나가 고기를 잡아 오곤 하였는데 그 시절에는 복어가 독이 있고 제사상에도 올라가지 못한 천한 고기로 인식되어 우리의 식사 대용으로 사용되었다. 쇠파리를 피하여 장대에 높이 달아 삐들삐들하게 말라 갈 즈음 된장에 버물러서 쪄 먹곤 하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그 맛이란 지금의 어떤 요리로도 낼 수 없는 진미였는데. 그러나 어느 때부터 복어가 일본으로 수출되면서부터 kg당 매출단가가 가장 높은 귀한 고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요즘에도 복어요리 하면 최고급요리로 전 날 술을 많이 마셨다거나 어려운 손님을 대접할 경우가 아니면 먹기가 쉽지 않은 요리이다. 이렇게 귀한 복어가 해마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6월초(?) 쯤에는 서해안에서 서식하다가 동해안으로 이동해 가는 길목이 우리 쇠머리 앞 바다 저 멀리 젖뜨기 섬 부근이었으니 그 때가 되면 복어를 잡는 배들로 북새통을 이루곤 하였다. 처음에는 낚시를 이용하여 복어를 잡았으나 인간들의 탐욕은 끝이 없어 나중에는 쇠갈쿠리를 만들어 복어를 낚는 것이 아니라 쇠갈쿠리로 후리는 방법이 이용되었다. 우연히 나도 꼭 한번 그 대열에 합류하였는데 이는 완전히 전쟁이었다. 무거운 쇠갈쿠리를 낚시줄에 매달아 복어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튀위스트를 추듯 줄을 당겼다 풀어줬다 하는 단순동작이 반복되는데 고기가 쇠갈쿠리에 걸리면 죽을 힘을 다하여 낚시줄을 건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이 던져 놓은 줄에 엉키어 고기를 놓친다는 것이다. 물을 밟지 않고 배로만 건너도 오동도에서 연홍도까지 건널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배가 모였던 날, 나는 요행히 정말 요행히 복어 한 마리를 걸어 최대한 빠른 속도로 낚시줄을 건졌으나 애석하게도 서너 척 정도 떨어져 있는 배의 낚시꾼의 줄에 걸리어 그 때 당시의 시가로 4~5만원 정도의 고기를 눈요기만 하고 놓쳐버렸던 기억이 새롭다.
군 제대 후의 우리집.
군에서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한 관계로 첫 휴가를 오지 못한 나는 군 입대후 23개월여 만에 첫 휴가를 나오게 된다. 그 동안 형이 제대하여 복직하고 집을 새로 사서 이사를 하는 등 우리 집도 이제 서서히 정상궤도로 돌아서고 있었다.
34개월의 군생활을 하고 1979년 초 봄 육군병장으로 만기 전역!
이제 나도 무엇인가를 하여야 한다. 공무원시험을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다. 책을 놓은 지 몇 년 만인가?
그러나 공부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우리 집은 형, 나, 동생이 줄줄이 남자라서 동네 청년들의 집합소가 되었던 것이다. 공부를 한다고 그들을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날마다 우리집은 청년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고 술 판이 끊일 날이 없었다. 누군가가 안주감이 생기면 우리 집으로 가져 오고 우리가 술판을 시작하면 그 들을 부르고. 같은 연배의 사람들이 다들 며느리를 보았던 나이의 엄마는 조금은 힘들었 겠지만 3대 독자인 아버지 한테 시집와서 위로 누나 두 분과 우리 3형제를 거뒀다는 뿌뜻함으로 나이를 잊으신 채 우리의 뒷바라지를 즐겨 하셨던 것이다.
원일이가 그랬다나.
우리 집 안 방에서 막걸리를 마시다가 갑자기 바지단추를 풀더니 꿇어앉아 오줌을 싸더란다. 형이 얼른 막걸리 잔으로 받쳤는데 막걸리가 변한 오줌인지라 그 양이 오죽 많을까! 받치고 있는 그릇이 턱없이 적어 한참을 철철 넘치는데도 오줌을 다 쌀 때까지 받치고 있는 그릇을 치울 수가 없었단다.
후기
졸필을 읽으시느라고 수고 하셨습니다.
가능한 한 시간의 흐름에 맞게 쓰고자 하였으나 꼭 그렇게 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읽으신 분들은 꼭 꼭 금산(쇠머리)에 얽힌 추억담을 이어 써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생각나는 대로 이어쓰기를 계속할 것입니다.
이번 한글날을 맞이하여 문화관광부에서 홍보한 내용에 따르면 이어쓰기에 대하여 ‘리플’이란 단어를 지양하고 ‘댓글’이란 단어를 권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앞으로 아무리 net 상의 용어 이지만 잘 못 된 것은 바르게 고쳐 쓰고자 감히 건의합니다.
세계에서 문자로는 유일하게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된 자랑스러운 우리의 한글을 소중하게 가꾸는 것도 우리가 꼭 지켜야 할 의무라 할 것입니다.
거금도 싸이트에 최고의 장문으로 1등 당첨되었으니 내일 모레 까지 서울있는 거금도
싸이트 본사에 상받으러오소.......
금산면체육대회,수박깨지는소리...참 남의 얘기가아니구먼 나도 다 해본 가남이있네그려...
군에있을때 8월12일쯤 "어머니 위독"하고 간보가왔는데 주임상사가 어머니가돌아가셨다면 1주일
휴가가 가능한데 위독이라는 말은 인정못한다고 흥 하고 돌아서 버리더라고.......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 요세사 오신분들이 (달그림자,무적)이렇게 많은 보따리를
풀어놓을줄이야.......아뭏든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