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 볼모
볼모는 「대립되는 두 세력 사이에 항복, 우호 관계 등을 보증받기 위한 방법으로, 상대쪽 사람을 머무르게 했던 일」인데
①외국의 침략을 받아 항복의 조건으로 왕족‧대신 등을 보내는 경우
②서로 화친하는 사이에서도 상대국의 사신을 억류하는 경우
③서로 우호관계를 맺기 위하여 자진해서 왕족이나 왕자를 상대국에 보내는 경우
④두 국가 사이의 우호관계를 보증하는 뜻에서 볼모를 서로 교환하는 경우 등이 있다.
한국은 예로부터 크고 작은 여러 전쟁이 많았기 때문에, 많은 볼모들이 다른 나라로 갔다.
역사상 볼모로 보낸 예를 보면,
①신라시대에는 402년(실성이사금 1) 내물이사금의 왕자 미사흔(未斯欣)을 일본에, 412년(실성이사금 11) 미사흔의 형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가 박제상(朴堤上)에 의해 본국으로 돌아왔고, 내물왕(奈勿王)은 일본과 교류하기 위하여 왕자 미해(美海)와 사신 박사람(朴娑覽)을 보낸 일이 있고,
②백제는 397년(아신왕 6) 일본과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태자 전지(腆支)를 볼모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③ 후삼국 때 왕건(王建)과 견훤(甄萱) 사이에도 서로 볼모를 보낸 적이 있었고,
④고려시대 몽골과의 전쟁을 끝내면서 강화의 증표로 원나라가 뚤루게(禿魯花:볼모)를 요구해, 왕족과 관원의 자제들을 보내기도 했다.
⑤조선시대에도 병자호란 뒤 항복조건으로 청나라에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鳳林大君)·삼학사(三學士:洪翼漢·吳達濟·尹集) 등을 볼모로 보냈다.
이처럼 나라와 나라 사이의 볼모만이 아니라, 지방 세력을 누르기 위해 호족이나 그들의 자제를 서울로 불러 볼모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신라시대에는 상수리(上守吏), 고려시대에는 기인(其人)이라고 했다.(「역사상 볼모의 예」는 다른 글에서 발췌하였음)
내가 이 볼모를 소재로 하여 글을 쓴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볼모’를 ‘불모’라 잘못 알고 있다는 점을 직시하고자 함이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약소국이었던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볼모를 잡아두지 못하고 매번 볼모를 보냈다는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무언의 외침이다.
한편 위의 ‘볼모’와는 그 의미가 다르지만 화번공주(花蕃公主)라는 단어가 있다. 화번공주는 옛날 중국에서 정략상 이민족의 군주에게 출가시킨 공주를 말한다.
공주란 천자(天子)의 딸이나 황족의 부녀자를 가리키는데 사랑도 없이 정략적으로 이역만리 타국으로 시집간 그 여인네들은 이민족에게 중국문화를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으나, 그 여인네들이 겪었던 인생의 애환을 어떻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오.
화번공주로서 유명한 왕소군에 대하여 설명하고 맺는다.
이름은 장(嬙·檣·牆).
자는 소군. (일설에는 소군이 이름이고 장이 자라고도 한다.)
남군(南郡)의 양가집 딸로 한나라 원제의 후궁으로 들어갔으나,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비관하고 있었다.
당시 흉노(匈奴)의 침입에 고민하던 한나라는 그들과의 우호 수단으로 흔히 중국 여자를 보내어 결혼시키고 있었다.
BC 33년 왕소군은 원제의 명으로 한나라를 떠나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가 아들 하나를 낳았다.
호한야가 죽은 뒤 호한야의 본처의 아들인 복주루 선우(復株累單于)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았다. 이러한 왕소군의 설화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윤색되고, 흉노와의 화친정책 때문에 희생된 비극적 여주인공으로 전하여져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문학에 허다한 소재를 제공하였다.
후한(後漢) 때의 서경잡기에 의하면, 대부분의 후궁들이 화공에게 뇌물을 바치고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황제의 총애를 구하였다.
그러나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이 추하게 그려졌고, 그 때문에 오랑캐의 아내로 뽑히게 되어 버렸다.
소군이 말을 타고 떠날 즈음에 원제가 보니 절세의 미인이고 태도가 단아하였으므로 크게 후회하였으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일.
원제는 크게 노하여 소군을 추하게 그린 화공 모연수를 참형에 처하였다고 한다.
한편, 왕소군의 아름다움을 낙안(落雁)이라고 하는데 ‘왕소군의 미모에 날아가는 기러기가 날갯짓하는 것조차 잊은 채 땅으로 떨어졌다’는 뜻이다.
참고로 정략결혼으로 흉노족의 왕에게 시집간 왕소군을 생각하며 어떤 시인이 지었다는 유명한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 모래땅에 꽃과 풀이 없을 터이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 봄이 와도 봄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요즈음에는 이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이 ‘봄이 와도 봄 같지도 않다’라고 해석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1980년 5월의 봄은 왔으나 군화발이 전국을 휩쓴 정치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위 내용과는 달리 우리 표준국어사전에서는 ‘볼모’를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볼모 - ①약속 이행의 담보로 상대편에 잡혀 두는 물건이나 사람. ②예전에, 나라 사이에 조약 이행을 담보로 상대국에 억류하여 두던 왕자나 그 밖의 유력한 사람.
지난 5월 10일
금산면민의 날 행사에 다녀 온 날 밤부터
고약한 목 감기에 시달리고 있다.
심한 가슴의 통증과 가르렁 거리는 가래 끓는 소리.
이참에 담배를 끊어 말어?
가장 순한 것으로 1일 10개비 정도 피는 기호식품을
건강 때문에 끊는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는 있는 애연가들의 초라한(?) 모습을 보면.
일단 감기가 나을 때까지는 금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