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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변해도 삶의 본질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그들이 일상에서 길어올린 삶의 의미들은 지금 우리에게 뜻 깊게 읽힌다. 

이 작품에서 자식사랑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그 사랑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대목은 무척 인상적이다.

깊은 강물은 소리나지 않는다.

아버지의 사랑은 개울물 처럼 요란스럽게 소리내지 않고
겉은 평온 하지만  강 밑에서는 소용돌이치는 흐름의 가슴깊은 사랑이 있다.

아버님을 뵙지 못한 지 벌써 2년 남짓이다.
지금도 내 가슴을 허비는 것은 아버님의 뒷모습이다.

그 해 겨울, 아버님께선 직장마저 그만두셨을 땐데 별안간 할머니마저 돌아가셨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북경에서 부음을 받고, 아버지와 함께 가려고 그때 아버지가
계시던 서주(序奏)로 갔다. 서주 집은 살림이 엉망인 채 지저분했다. 생전에 단정하셨던
할머니 생각이 왈칵 덤벼와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상고(喪故)와 실직을 함께 당하신
아버님은 그런 경황 중에서도 침착하게 말씀을 하셨다.
"기왕 당한 일을 어찌하겠니? 설마 산 입에 풀칠이야 못 할라고?"

우리 부자가 집에 돌아가 팔 것은 팔고 잡힐 것은 잡혀서 빚을 갚았지만 할머니 장례로
진 빚은 고스란히 남았다. 할머니와의 사별과 아버지의 실직은 참으로 우리의 앞길을
참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헛간 같은 집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께선 남경으로 가 직업을 구해야 했고, 나는 북경으로 가 학업을 계속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남경으로 갔다. 남경에서는 친구의 만류로 하루를 쉬었고 이틑날
오전에 포구로 가 오후에 북경행 기차를 타기로 했다. 아버지께선 볼일로 해서 역에
나오지 못하셔서 여관에 있는 잘 아는 심부름꾼더러 나를 배웅하도록 당부하셨다.
그것도 서너 번씩이나 신신당부하셨다.

그러나 내가 막상 떠날 무렵이 되자 도저히 안심이 안 되시는지 자꾸만 머뭇거리셨다.
사실 그때 내 나이 스물이나 되었고 또 북경에도 벌써 두어 차레나 왕래했던 터라
아버지께서 그토록 염려하실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아버지께선 볼일을 제쳐 놓으시고
친히 나를 배웅하기로 결정 하셨다. 몇 번이나 그러실 것 없다고 말씀 드려도 "아니야,
그깟 놈들이 무얼 해!" 하시며 따라나오셨던 것이다.

우리는 강을 건너서 역으로 들어갔다. 내가 차표를 사는 동안, 아버지께선 짐을 지키고
계셨다. 짐이 많아서 역부에게 돈푼이라도 주면서 옮겨야 했다.역부들과 한바탕 흥정을
벌이셨다. 그런데 닿아빠진 그네들과 흥정을 하시는 아버지 말씀이 시원스럽지 못해
내가 참견을 했다. 결국 아버지의 고집대로 흥정이 벌어지자 역부들은 짐을 실었고,
나는 기차에 올랐다. 아버지는 찻간까지 따라 오르시더니 사주신 자주색 외투를 깔았다.

아버지는 나더러 도중에 짐을 조심하고 감기 안 들게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 판매원을 붙들고 나를 보살펴 달라고 연신 허리를 굽히며 당부하셨다.
나는 속으로 세상 물정에 어두우신 아버지의 순박함을 비웃었다.
그들은 겨우 돈이나 아는 사람들,
왜 그렇게 쓸데 없는 부탁을 하실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도 스물인데 설마 내 일 하나 처리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버지, 인제 들어가셔요."
아버지는 창 밖을 지켜보며 무슨 생각에 잠기시더니,
"얘! 귤이나 몇 개 사올 테니 여기 가만히 앉아 있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플랫폼 저쪽 울타리 밖으로 장수 서넛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저쪽 플랫폼으로 가려면 철로를 건너 했다. 

그런데 그리로 가려면, 이쪽 플랫폼을 뛰어내려서 저족 플랫폼의 벽을
기어올라가야 했다. 그것은 뚱뚱하신 아버지로선 여간 힘드시는 일이 아니었다.
마땅히 내가 가야 할 걸 한사코 당신이 가시겠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었다.
까만 천으로 둥근 모자를 쓰시고, 까만 쾌자에 진한 쪽빛 무명 두루마기를 입으신
아버지는 좀 기우뚱하셨지만, 조심그럽게 허리를 굽히고 플랫폼을 내려가셨다.
그러나 철로를 건너고저쪽 플랫폼을 기어오르실 때의 모습은 여간 힘들어 보이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두 손을 플랫폼 위 시멘트 바닥에 붙이고, 두 다리를 비비적거리며 위쪽으로
발버둥쳐 올라가시다 순간적으로 왼편으로 기우뚱하실 때,
아, 이 아들의 손엔 땀이 흥건했다.나는 그때, 아버지의 뒷모습을 본 것이다. 

나도 모르게 뺨을 적시는 뜨거운 것이 있었다.
나는 얼른 그것을 닦았다. 아버지께 들킬까봐, 그리고 남이 볼까봐 두려웠다.
내가 다시 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 아버지께선 빨간 귤을 한아름 안고 이쪽으로 오고
계셨다. 이번에는 먼저 귤을 홈 위에 놓고, 조심조심 플랫폼을 기어내려와서,
다시 그 귤을 안고 철로를 건너오셨다.
이만큼 오셨을 때 묻은 흙을 툭툭 털면서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곧 밖으로 나가시면서,
"나, 이만 간다. 도착하면 곧 편지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승강구를 내려 몇 걸음 옮기시더니만 다시 뒤를 돌아보시며,
"들어가라. 아무도 없는데... ..." 하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인파에 묻히자,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눈물은 또 한번 쏟아졌다.

요 몇 년 동안, 우리 부자는 각각 타향에서 동분서주해봤지만, 집안은 갈수록 기울어갔다.
젊었을 적에는 살림을 일으키려고 혼자 타관 하늘을 떠돌며 일도 많이 저지르셨지만,
노경에 들어 이렇게 참담하게 되실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또 당신은 쓸쓸한 만년이 주는 괴로움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그래서 사소한 집안 일에 지나친 분노를 토하시기도 하였다.
물론 나에게도 지난날처럼 인자하시기만 하지 않았다. 그러나 뵙지 못한 2년 동안,
아버지는 나의 지난 잘못을 모두 잊으시고 오히려 나와 내 아이들 걱정만 하셨다.
어느 날인가 나는 북경에서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일이 있었다.
'늙은 몸이지만, 그런 대로 지낸다. 다만 어깻죽지가 무거워 젓가락을 들거나 붓을 잡기에 불편하구나.
아마 갈 날도 멀지 않은 모양이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왈칵 솟은 나의 눈물 방울엔 마쾌자에 그 쪽빛 두루마기를 입으신
아버지의 뒷모습이 굴절되고 있었다. 아, 다시 뵐 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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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홍섭 2009.08.13 15:46
    주자청이라는 작가는 베이징대 철학과를 나와 칭화대 교수를 역임. 1928년경(?)에 쓰여진 산문 작품입니다.
    국내에서 여러분에게 회자되던중 박하정님의 번역으로 태학사에 문고판 형태로 출판된 책입니다
    주자청이라는 인물은 다소 생소 할 수 있으나 소품 산문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소개합니다.
     시대나 지역을 떠나 보편적 가치의 진솔함은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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