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역도산은 루 테즈와 경기가 무승부로 끝난 것에 대해 대단히 분개했다. 충분히 이길 수 있었던 경기였는데 두 경기 모두 무승부를 기록했으니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스승은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것이다.
주변에선 세계 최고 레슬러 루 테즈와 무승부를 기록한 것만 해도 잘 싸운 거라고 얘기했지만 소용없었다. 스승은 일본 심장부에서 루 테즈를 보기 좋게 꺾고 명실 공히 세계 레슬링계를 완전히 평정하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무척 아쉬워했다.
↑ 역도산 문하생들이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나다. 일본 프로레슬링계에 큰 한 획을 그었던 이들은 때로는 링에선 적수로,
스승은 말하지는 않았지만 왜 루 테즈가 `철인`이고, 그가 세계 최고 레슬러인지 깨달았던 것 같았다. 다른 선수 같았으면 스승의 당수와 킥 록에 걸렸으면 십중팔구 나자빠졌을 것이다. 루 테즈는 역시 철인답게 끄덕없었다. 노련미, 고난도 기술, 강.약을 조절할 줄 아는 경기 운영. 마치 늙은 백여우 같이 루 테즈는 스승의 마법에 걸려들지 않았다.
그 해도 지나갔다. 세월이 흘러도 나의 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밥하고, 빨래하고, 운동하고, 선배들따라 이 경기장 저 경기장 순회하는 것이 전부였다. 링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꿀뚝 같았던 1958년 5월경. 역도산체육관에 입문한 지 1년을 갓 넘겼을 무렵이다.
어느 날 스승이 나를 불렀다. 대뜸 "너 경기 준비해"라고 말했다. 그 말뿐이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어디서 경기를 하는지도 말해 주지 않았다. 느닷없이 경기하라는 말을 듣고 난 후 그 상대가 누군이지 무척 궁금했다.
스승 밑에는 수십 명의 문하생들이 있었다. 대표적 문하생은 요셉 토르코.미야지마 토미오.아베 오사무.다쿠이 여쿠.다나카 요네타로.미야지마 토미오.아베 오사무.다쿠이 야쿠.와타나베 사다조.가네코 다케오 등이었다. 모두가 선배들로서 프로레슬링에 입문하기 전 아마추어 레슬링.유도.스모.역도 등의 경력을 갖고 있었다. 난 막연히 그 중 한 명과 경기를 펼치겠지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상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첫 경기인 만큼 반드시 이기고 싶었다.
내가 상대를 알았던 것은 경기 일주일 전이었다. 첫 상대는 조 히구치(蝶桶口)로 선배였다. 나이는 따져 보지 않았지만 두세 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레슬링에도 일찍 입문, 이미 중견급 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조 히구치는 유도로 잔뼈가 굵었다.
일부러 그랬지는 모르겠지만 스승은 첫 상대를 강자와 배정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그와 대결해서 이길 수 있을까 걱정도 했다. 하지만 결전에 나선 이상 그동안 배운 기술을 총동원, 반드시 그를 꺾고 싶었다.
나의 첫 경기는 동경의 한 경기장에서 오픈 게임 형식으로 치러졌다. 아무리 오픈 게임이었지만 연습 삼아 링에 오르는 거하고, 관중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링에 오르는 거 하고는 질적으로 달랐다.
체육관에 들어서자 조명에 비추어진 링이 묘하게도 선명한 풍경처럼 들어왔다. 그리고 관객석의 술렁임. 학생과 양복을 입은 관객들이 나만 꿰뚫어지게 쳐다보는 것 같았다. 비록 경쾌한 테마 뮤직에 따라서 링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마음만은 가벼웠다. 험난한 프로레슬링에 내딛는 첫걸음이었다. 그때는 가운도 입지 않았다. 검정색 팬티 차림에 목에는 수건만 걸친 채 올라갔다.
조 히구치는 입술을 찡그리며 나를 반 죽여 놓을 것 같은 기세로 느릿느릿 올라왔다. 그의 눈에는 내가 애송이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약간 벗겨진 이마, 비꼬듯 웃는 모습이 영 기분 나빴다. 될 수 있으면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워밍업을 하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윽고 `땡`, 1라운드 공이 울렸다. 조 히구치는 `너 쯤이야` 생각하는 듯 코뿔소처럼 돌격해 들어왔다.
<계속>
정병철 기자
사진=이호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