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역도산과 루 테즈 경기를 회상하는 것은 그 경기가 나의 레슬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난생 처음 빅매치를 보면서 난 스승과 루 테즈를 혼합한 레슬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스승의 투혼과 루 테즈의 고난도 기술을 섞어서 나의 새로운 기술로 발전시키자는 생각이었다.
1957년 10월만 해도 일본에 TV가 있는 가정이 별로 없었지만 만약 TV가 있는 가정이라면 대부분 이 경기를 봤을 것이다. 목욕탕 탈의실.우동 가게.다방.가두 텔레비전 앞에는 장사진을 이뤘다. 나는 이 경기를 링 사이드에서 보면서 전율을 느꼈다. 루 테즈의 벗겨진 옅은 머리카락, 단호한 표정, 수수한 가운에 가려진 강철 같은 육체의 기운. 종이 울리자 루 테즈는 곧바로 헤드록으로 스승의 머리를 졸랐다. 스승은 그런 루 테즈의 빠른 동작과 완급을 조절하는 공격에 맞서 나갔다. 그것이 외외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맹수처럼 덤빈 후 상대를 쓰러뜨렸을 것인데 스승은 신중한 경기를 펼쳤다. 루 테즈의 노련미도 돋보였다. 루 테즈는 스승을 약올렸다. 헤드록을 건 상태에서 스승 안면에 주먹을 날렸다. 스승은 한 대 맞은 후 재빨리 빠져나와 당수를 날렸다. 루 테즈가 나가떨어졌다. 스승의 당수는 돌덩어리도 반으로 쪼갤 만치 그 위력이 대단했으니 루 테즈도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스승과 루 테즈는 용호상박의 경기를 펼쳤다. 경기장에 모인 관중, 전국의 텔레비전 앞에 모인 스승의 팬들은 두 사람이 펼쳐 내는 필살의 비기에 놀라움의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내가 영영 잊지 못할 전설적 장면이 펼쳐졌다. 스승은 몸을 뒤로 젖혀 루 테즈의 다리에 오른쪽 발목을 걸어 백드롭을 방어했다. `백드롭 방어술`이라고 칭할 만한 이 기술은 오래된 스모 기술 가운데 하나인 `가와즈가케`란 것이었다. 미리 생각해 둔 것도 아닌데 이미 몸안에 잠재돼 있던 스모 기술이 번뜩인 것이었다. 난 그것을 보면서 훗날 백드롭을 어떻게 방어해야 하고, 또 빠져나올지를 연구했다. 스승이 루 테즈의 전매특허인 백 드롭을 빠져나오자 루 테즈는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때부터 승기를 잡은 스승은 루 테즈를 마구 공격했다. 스승은 챔피언 중 챔피언이라는 철인 루 테즈를 맞아 한치의 물러섬도 허락하지 않았다. 루 테즈는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결국 이 경기는 61분 풀타임 접전 끝에 무승부로 끝났다. 스승은 곧바로 재도전을 신청했다. 루 테즈 역시 이를 승낙했다. 1957년 10월 중순께로 기억된다. 장소는 오사카로 옮겼다. 오사카 오기초 풀 특설링. 삼만 관중이 꽉 들어차며 재경기가 이뤄졌다. 이 경기 1라운드에서 스승은 루 테즈의 백드 롭과 헤드록에 거의 무너지다시피했다. 하지만 2라운드는 스승이 잇달아 당수를 날려 만회했다. 로프 반동으로 돌아오는 루 테즈를 내리치는 역수평식의 당수가 보기 좋게 명중했다. 이때 루 테즈는 스승에게 주먹치기를 연발했다. 그것이 불씨가 되어 스승은 폭발했다. 3라운드는 루 테즈의 백드롭을 가와즈가케로 방어한 스승이 킥록으로 몰아세웠다. 스승과 루 테즈 모두 링 아래로 추락했다. 결국 이 경기도 1대1 무승부로 끝났다. 나는 프로레슬링의 진수를 보았다. 루 테즈의 밸런스, 스피드, 맺고 끊는 경기 운영 스타일. 이에 굴하지 않은 스승 역시 대단했다. 루 테즈의 헤드록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인간은 누구나 머리를 공격당하면 머리를 공격하고 싶어한다. 루 테즈는 그런 것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상대방이 걸려들도록 했다. 하지만 똑같은 반복적 머리 공격은 상대에게 말려들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상대를 혼비백산시키는 머리 기술은 없을까, 있다면 뭘까? <계속> 정병철 기자
사진=이호형 기자
나의 삶 나의 도전 : 박치기왕 김일 [23]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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