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 전지
『숙종은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당시 소의(昭儀)였던 장씨와 가까이 하여 왕자 균(昀:景宗)을 낳자, 1689년(숙종 15) 1월 균을 원자로 봉하였다. 이에 따라 소의 장씨는 희빈에 오르고, 세자책봉은 불가하다고 상소한 송시열은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으며 나머지 서인들도 유배되어 권대운(權大運) 등 남인(南人)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己巳換局). 이 해 5월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올리자 서인 박태보(朴泰輔) 등 80여 명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1694년(숙종 20) 서인의 김춘택(金春澤) 등이 다시 인현왕후의 복위운동을 일으키자 인현왕후의 폐출을 후회한 바 있던 숙종이 남인을 몰아내고 인현왕후를 복위시켜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은 뒤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일이 발각된 장희빈은 오빠 장희재(張希載)와 함께 죽음을 당했다.』
위 글은 장희빈에 대한 두산백과사전에 올라 있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더 간략하게 요약하면
『장희빈은 조선 후기 숙종의 빈(嬪)으로 왕자 균(景宗)을 낳아 세자에 봉해지자 희빈에 올랐다. 이후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왕비가 되었으나 이를 후회한 숙종이 다시 인현왕후를 복위시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가 취선당 사건으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것이다.
혹 황진이라면 모를까 첩인 어머니 때문에 노비로 살다가 왕의 총애를 받아 신분이 상승된 장녹수나 소의의 신분에서 왕자(후일 경종이 됨)을 낳아 일약 왕비로 신분이 상승한 장희빈에 대해서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내가 장희빈을 글의 소재로 삼은 이유는 TV연속극에서 보았던 장희빈이 죽는 장면, 곧 몸은 포승줄에 꽁꽁 묶여 있었지만 머리를 마구 흔들며 한사코 사약을 거부하는 장희빈에게 억지로 사약을 먹이는 그 장면을 며칠 전에 언뜻 보았기 때문이다.
관심이 없었을 때는 결코 보이지 않았던, 온갖 원망과 회한에 피눈물을 흘리며 온 몸으로 저항하는 그녀의 입에 맞물려 있던 막대기 두 개!
그것이 바로 오늘의 소제목인 ‘전지’이다.
처음 이 단어를 접했을 때는 단어의 풀이 그대로 ‘아이들에게 억지로 약을 먹이려 할 때 위아래 턱을 벌리어 물리는 막대기’ 정도로만 이해하여 글의 소재를 찾기 어려웠는데 그 장면을 본 순간, ‘바로 저것이다!’라는 희열과 함께 장희빈을 글의 소재로 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감을 따는 데 쓰는,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막대’인 ‘전짓대’도 줄여서 ‘전지’라고 한다는 것을 밝히며 맺는다.
전지 - ①아이들에게 억지로 약을 먹이려 할 때 위아래 턱을 벌리어 물리는 막대기 따위의 물건. ②전짓대
전짓대 - 감을 따는 데 쓰는,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막대.(준말 : 전지)
예보대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남해안은 더하다는데.........................
다들 피해 없게 대비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