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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글 출처 : http://blog.naver.com/swlee8585/220765510787

 

 

 

구한말, 1880~90년대 최고 부자~ 선영홍~!
고흥 최초의 무역왕 ~선영홍~!
 
우무가사리(牛毛加四里)를 팔아서 부자가 된 사람~!
자칭 3만석꾼 상당의 부자라고 했던 그 사람~!
 
그는 1904년 왜 고흥을 떠나서 충북 보은으로 이사를 갔을까?
 
보은에서 134칸의 대저택을 지어 당대에 한반도에서 가장 큰 집을 건축했던 그는 누구인가?

 

 

 

 

선병옥가옥.png

▲  1920년대 한국에서 가장 큰 민간 가옥 (보은 선영홍/선정훈 가옥)

 

 

 

우무가사리~~!


한반도 남해안에 살고 있거나
살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우무가사리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전라도 남해안인 고흥 반도에서 1950년대의 어린 시절을 대부분 보냈기에 아직도 생생히 우무가사리를 잘 기억을 하고 있다.

 

지금 아마도 나이가 60을 넘은 사람이라면 반 투명한 묵처럼 생긴 우무가사리 묵을 잘게 썬
네모난 우무들이나 칼국수마냥 썰어 낸 길죽한 우무 가락에 얼음 쪼가리를 얼기기설기  몇개 집어넣고,
그 위에 냉수를  살짝 부은 후에  콩가루를 한 줌 짜~악 뿌리고

또 밋밋한 맛을 변신시키기 위해서 사카린이나 당원을 넣어서

여름철이면 별식으로 후루륵 후루륵 씹지도 않은 채 그저 냅다 집어 삼켜 먹었던 
그 우무 국~!

 

그 우무의 매끄러운 식감과 그 맛을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무 욕심을 내어 과식을  하는 날에는 여름철이라 잘 걸리는 
설사 때문에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리며 된통 고생을 해 본 적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ㅋ  ㅋ  ㅋ ~~~!)

 

아무튼 우무가 소화가 되지않아서 
그대로 위장에서 대장사이 통로를 고속버스 달리듯이 쪼르륵 미끄럼을 탄 채  
그대로 소화되지 않고 원형대로 쪼르륵 항문의 목적지로 여지없이 배출되어 나오는 
그런 경우를  여러 번 경험을 했을 것이다. (ㅋ ㅋ ㅋ ~~!)

 

 

우무가사리.png

 

그런데 나는 오늘 그 우무가사리를 가지고 중국과 일본에 무역을 해서 떼돈을 벌었다는 

한 고흥 사람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그 우무가사리 덕분에 당대에 만석꾼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그리고 그 이름을  한 10여년간 듣더니, 
 1904년에 고흥 땅에서 만석군 소리를 내 팽가치고 
 어느날 갑자기 온 재산을 걷워서 후다닥 느닷없이 
 충북 속리산 입구에 있는 보은으로 이사를 가버렸다는 이야기 ~~
 고흥반도에서 제일 큰 섬인 금산 섬의 어느 섬 사람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그는 어떻게 해서 고흥반도 해변에 지천으로 깔린 
그리고 천하디 천하게 까지 보이는 그 우무가사리로 그렇게  큰 돈을 벌었을까?

그리고 무슨 연유로 갑자기 어느날 고흥을 떠나 충북 속리산이 있는 보은 땅으로 왜 이사를 가버렸을까?
그리고 그는 왜 그 많은 재산으로 충청도에서 제일 큰, 아니 한반도에서도  
당시에는 칸수가 134칸으로 가장 컸던 저택(?)을 지었을까?
이런 궁금한 이야기를 내가 들은 대로 또는 추측한대로 해 보려고 한다.

 

그런 선영홍~ 그는 누구인가?

내가 선영홍의 이름을 접하게 된 것은 인터넷을 통해서 였다,
지금부터 3년 전,  

서울 실버타운에서 백수(百壽: 100세)를 맞이한 기세훈 박사를 찾아 뵙고 축하인사를 올린 적이 있었다.


기박사는  성리학자 퇴계 이황선생에게 이론적으로 맞짱을 떴던 노사 기정전의 후예로서

그는 전남 장성에 호남에서는 가장 큰 세칭 <기세훈 고택>의 소유자였다.

 

그는 광주 서중 일고의 대선배로서 내 결혼식 때 주례를 해 주셨기에 이따금 나는 그 분을 찾아 뵙기도 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글을 내 블로그 포스트에 쓰기 위해서

자료 수집차 인터넷에서 전국에 흩어져 있는 종갓집이나 고택을 뒤지다가

충북 보은에 있는 <선병국 고택>도 내 눈에 띄게 되었다.

 

특히 선병국의 조부인 선영홍이 고흥 금산에서 만석꾼의 갑부였는데,  

지금부터 약 110여년 전인 1904년에 속리산이 있는 보은으로 이사를 왔다는 사실이

특히 나의 관심을 크게 끌게 하였다..

나는 나름대로 고흥이 배출한 옛 부지들에 대해서는 왠만큼은  대부분 알고 있다고 믿었는데~~


고흥읍 만석꾼 영광집 김정태 만석꾼, 한의사로 자수성가한 신우구 6천석꾼,

삼배 광목 등 보부상으로 돈을 번 서화일 5천석꾼, 도양면과 풍양면 사이의 갯뻘을 간척하여

풍도농장을 설립한 3천석꾼 이상하 등 등~~

 

그런데 아니 선영홍이라고~??  이런 부자도 있었나~~??!!
이렇게 또  한 사람의 거부가 있었다는 사실,
자칭 3만석꾼이라고 말했다는 선영홍 부자~!

 

그 거부는 남해안 고흥 땅에 있는 한 섬에서

하루 아침 훌쩍 떠나 천리 정도나 멀리 떨어저 있는 충청도 보은으로

이사를 와 버렸다는 사실은 나를 무척 당혹스럽게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무척  관심과 흥미를 끄는 이야기였다.

 

왜? 왜? 왜?
그는 고흥을 떠나야만 했을까?
속설처럼 정감록을 믿어서 였을까?
아니면 선씨가문에 전해오는 구전처럼 꿈속의 현인이 이사를 가야된다는 예지몽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을까?

 

선참봉_30.png


나는 작년에 선영홍의 친 손자와  친교를 갖고 있는 고흥 향교에서 전교를 역임했고,

현재 성균관 한림학원에서 전라도와 관련된 고문헌이나 족보 또는 향토사에 대해 자문 등을 해 주고 있는

고흥 출신인 학림원의 연구위원이신 지산 송철현선생을 통해서 그 손자를  찾아 뵙게 되었다.

그는 성균관에 있는 한림학원의 원장을 역임한 선병한(宣炳漢)선생이었다.


그는 8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현재 서울 인사동에서 관선서당(觀善書堂)을 차려놓고

한문학을 전공으로 하는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의 한문관련 논문 작성을 지도하고 계셨다.

 

그의 부친인 선정훈은 1920년대 관선정(觀善亭)이라는 무료 기숙학원을 설립하여

수 많은 한문학자를 배출시켰다는데 아마도 부친의 미진한 뒷일을 도모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선참봉_28.png

 

그는 지난 해 초 여름 날 그의 관선서당 사무실에서 지산선생과 나에게 가감없이 그가 알고 있는 선영홍 조부에 대해서 알고 있는 바를 이렇게 털어 놓았다.

 

그 때 털어놓은 이야기를 알기 쉽게 여기에 정리해 쏟아내 본다.

 

 " 선영홍 우리 조부님은 원래는
섬 사람이 아니여~ 육지 출신이여~ 
저~~ 머시기 고흥반도 도양면  관리부락 태생이라니께."

 

선영홍의 손자인 선병한선생은 약간의 전라도 사투리에다

그 바탕에는 강한 충청도 액센트를 짙게 깔면서 말 머리를  슬슬 풀어 놓기 시작했다.
그는 나와 지산선생이 듣고 있는 가운데 거의 한 시간 동안, 간혹  인터뷰 비슷하게 응해 주었다.


그리고 캠코더에 녹화를 하는 것도 허용해 주었다.

선영홍(이하 존칭생략함)은 구한말 철종 13년인 경신년  9월 9일,

그러니까 1861년 가을에 전남 고흥 도양면 관리 부락에서 출생하였다.
그런데 도양면은  현재 도덕면으로, 녹동은 도양읍으로 개칭되어 부르고 있다.
 
선영홍~그러니까 그는 어린 시절을 도덕면 관리 마을에서 보냈다.
그 시절 관리 부락 남쪽은 오마도가 빤히 보이는  바다를 북어포가 감싸고 있는 갯뻘 해안이었다.

조선 왕실에서 무보수로 마을 사람들을 동원시켜

이 북어포 연안에 언(뚝/제방)을 막아서 일부는 염전으로, 일부는 논으로 간척을 하였다.


그리고 마을 뒷 북쪽은 보성쪽 해안과 함께 U자 형의 득량만을 이루어주는 해안이 또 있었다.
물론 이 쪽 해안의 일부도 염전과 논을 얻기 위해 언(堰/제방)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이런 언을 막아주어서 관리 부락과 문관 지역은

섬이 될뻔한 옛 도양면과 풍양면 당두리를 이어주어서

고흥 반도 속에서 또 다른 도양 반도를 유지시켜 주었다.


아무튼 옛 도양면 관리 부락으로 들어 오는 길에 당두리 문꾸지 길은 호리병의 목 구실을 했다.
만약 당두리의 문꾸지의 길목을 남북으로 파내서 갈라버리면 옛 도양면은 완전히 섬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현재의 녹동을 섬처럼 간주하여

녹동진이 아닌 녹도진이라고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문관마을 삼거리 교차 지점은 겨우 300여 미터의 폭으로

현 도양읍과 도덕면이 섬이 되는 것을 막아주며 남과 북으로 각각 다른 해안을 만들어 주고 있다.

 

임진왜란 시절에 문관마을 삼거리에는 마차가 통과할 수 있는 기와집 지붕이 있는 출입문이 있었다 한다.
이 문을 원문이라 했는데 일종의 군사적 목적으로 출입을 통제하는 관문(關門) 역활을 했다 한다.
그 관문이 후세에 문관(門關)으로, 그리고 우리말로는 <문꽂이>,

다시 고흥 사투리로  <문꾸지>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리 부락 서쪽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도양목장이 있었고 맨 긑에는 녹도진이 있다.

이 도양목장의 총 책임자는 감목관이라고 불리우는 관리였는데

이 감목관은 당시 흥양군에 있는 10여개 목장을 총 관리했었다.


 도양 목장 땅을 제외한 옛 도양면의 대부분의 논밭과 염전은  조선 왕실 가족이 그 소유자였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이 땅들을 명례궁 땅이라고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곳 이 땅을 둔전토라고도 했다.

 

그래서 관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가 이 둔전토에 매여사는

말하자면 소작인 신세의 농부 가족들이었다,
이 둔전토는 세금이 면제여서 수확량에서 약 30 퍼센트만 왕의 가족인 명례궁으로 상납하고

나머지는 소작인들의 몫이라
그런대로  타 지역의 소작인들 보다는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관리부락은 남해안 해안가라 여름철에는 잦은 태풍과심한 해일 등으로 피해를  크게 입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논 농사나 소금 농사는 흉작이 빈번했고,따라서  그곳 주민들의 삶은 녹녹치 않고  팍팍했었다.
아마도 선영홍의  선조들도 이 둔전토나 염전의 소작인들이어서

그곳에서 삶을 이어나가기가 그다지 여유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영홍의 부친은 선처흠이다.
그리고 선처흠의 생부는 선계종이다.
선영홍의 직계가족을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보성선씨 시조인 선윤지의 15세인
선덕우(宣德祐)는 세 아들
계종(繼宗), 희종(喜宗), 효종(孝宗) 3남을 두웠다.
이들 중에서 장남인 계종도 극민, 처흠, 극제 3남을 출생시켰다.
여기에서 둘째 차남인 처흠이 바로 선영홍의 부친이다.


그런데 선처흠은 생부인 계종을 떠나 막내 숙부인 희종 밑으로 출계, 즉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러니까 선영홍의 부친인 선처흠은 진짜 자기를 출생시켜 준 생부는 선계종(宣繼宗)이고,

족보상 양아버지는 선희종(宣喜宗)이다.

 

그런데 1978년에 발간된 보성선씨 대동보에 따르면

선영홍의 생부인 선계종은 차남인 선영홍을 그의 막내 동생에게 양자로 입양시켰기에 족보상으로 대가 끝나버렸다.
왜냐하면 선영홍의 형과 동생은 둘다 후손을 두지 못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족보상 프로필인 단자에는 형인 극민(克敏)은 독자인 영원(永元)이가 있었으나

조기에 사망하여 후손을 잇지 못했고,
처흠의 막내 동생은 극제(克濟)는 족보상에는  단애(單无)라 되어있다.
아마도 후손이 없어서 단자를 내지 못해 대가 끝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선영홍은 이래 저래 생부인 선계종과 양부인 선희종의대를 이었다고 풀이된다.
 
그런데 왜 생부인 선계종은 세 아들 중에서 둘째인 영홍을 막내 숙부가 되는 선효종에게 출계를 시켜 양자로 삼게 했을까?
 
우선 조보상 각자의 출몰연대를 정리해 보면 다소 그때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희미하나마 그런대로 실마리나 단초를 얻을 수 있다.

 

▲ 선덕우(기미~계축/  1739~1793 :   향년 56세)
                       --(묘) 대분동/ 부인 : 장세환딸 /(묘)~막개리

    ▲계종 (계미~신미/  1763~1811 :  향년 49세)
                계종은 이렇게 세 아들을 두웠다.
              ▲ 극민 ( 생졸 : 미상 )---독자(영원) 후, 후손없음
              ▲ 처흠 (경신~경오/ 1800~1870) ~~>(계출/입양) 효종
              ▲ 극제 ( 생졸 : 미상)---후손 없음

   ▲희종 (갑오~경인/  1776~1814 :  향년  39세)
   ▲효종 (경인~계사/  1782~1833  : 향년 52세)
 

위에 있는 요약 정리를 보면은

선영홍의 부친인 선처흠은 할아버지 선계종이38세에 출생시켰으며,

향년 49세로  차남인 선처흠이 겨우 12살일 때 타계했다.
 
선처흠의 형인 선극민은 아들 선영원을 두었으나 족보에 그는 후손이 없어 단절 상태이다.

그리고. 그의 생몰연대도 묘지의 위치도 미상이다
 
선처흠의 막내 동생인 선극제도 후손이 없었다는 뜻인지 단애(單无)로 적시되어 있다.

아마도 단자를 내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런데 그 역시 생몰연대도   묘지의 위치도  미상이다.
 
더욱이 선처흠의 두 형제, 극민과 극제의 묘소의 위치도 미상인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혹, 그들이 어선을 타고 바다에 갔다가 태풍 등

사고로 해난을 맞아 익사했다면 묘지가 있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을 거라는 합리적 추측도 해 본다.

 

그런데 만석꾼 부자임을 자랑하고

선처흠과 그의 부인 경주김씨가 각각 효행과 열행으로 효열문과 효열각까지 세워진 가문의 족보치고

너무나 허접하게 기록되어 있어 다소 실망스럽고 보기가 민망스럽다.

 

아무튼 선영홍의 부친은 일찌기 12살에 부친을 여의었고,

막내 숙부인 선효종 댁에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결혼하여 세 아들을 얻었다. 
그는 결혼 후에 얻은 세 아들들은 바로 영표, 영립, 영홍이다.
그러니까 선영홍은 선처흠의 세째 아들 막내로 1861년에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가 태어난 곳은 고흥의 한 섬인 금산이 아니라, 고흥반도의  도양면 관리부락이었다.

아무튼 선영홍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자료로서 부친과 세 아들의 생몰연대를 정리해 본다.

 

▲부친 선처흠 ( 경신~경오/ 1800~1870 : 향년 71세)
                                    ★ ~(묘) 고흥군 도덕면
   ▲ 장남      선영표(갑신~무자/ 1824~1888  : 향년 65세)
                                    ★ ~(묘) 고흥군 도덕면
   ▲ 차남      선영립 (경자~갑자/ 1840~1894  : 향년55세)
                      ~~~~~> 출계{입양) 희종의 외아들 선경흠
                                    ★ ~ (묘) 고흥군 금산면
   ▲ 막내       선영홍 (신유~갑자/ 1861~1924 : 향년 64세)
                                    ★~ (묘) 충남 예천군 종삼면


위의 요악을 보면 선영홍은 부친이 환갑이 지나고 이듬 해인 62세에 출생되었다.
그리고 영홍은 겨우 열 살일 때 아버지와 사별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함께 이 세상에 살았던 것은 불과 10년이라는 어린 시절이었다.

 

그 때 형 영표는 37세였고, 출계한 둘째 형인 영립은 31세 여서 그들은 각자 자립했던 나이였다.
이들 묘지의 위치를 보고 판단해 볼 때, 선영홍의 부친, 그리고 형 선영표는 고흥 반도 안 도양면에서 살았고,
둘째 형 선영립과 선영홍 두 형제는 금산면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선영홍은 1904년 45세 때에 금산면에서 충북 보은으로 이주를 했던 것이다. 
선영홍이 금산으로 와 살았던 경위는 이러하다
 


선영홍이 16세에 일찌기
금산면 석정리 돌다리(석교)에 살고 있는 밀양박씨 집안으로 장가를 들었기 때문이다.,
결혼 직후 보리쌀 한 가마니와 벼 세 말을 신혼생활 밑천으로 받아 섬인 금산면으로 들어 왔었다.
아마도 이 장가 밑천은 두 형들이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그 때가 1877년이다.

 

이런 정황을 종합해 보면
선영홍의 어린시절은 매우 고되고 가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손자 선병한선생의 구술에 따르면, 신부는 박병선씨의 딸이며 신유생, 닭 띠로 신랑과는 1861년생인  동갑쟁이였다.

 

그녀는 섬처녀로서 강인한 체력과 노동력, 부지런함을 타고 났었다고 한다.
반면에 신랑은 귀공자 타입의 애띤 모습으로 다소 선비같은 성격의 소유자로 늘 온화한 성품이었으며 그런대로  두뇌회전이 빠른 사람이었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외유내강형이라 할까,

그러니까 말하자면 일단 결심하면 그는 실행에 옮기려하는 실천력의 소유자였다.
아무튼 두 신혼 부부는 금산면 어전리 평지 마을에 있는 조고마한 초가집에서 첫 신혼 살림 둥지를 꾸렸다고 한다.

 

신부 집안도 넉넉치 못하여 겨우 이부자리와 식기들, 그리고 솥단지 정도를  시집올 때 마련해 왔었다.
그러나 신부는 길삼질을 잘하여 동내에서 일감을 많이 얻어 왔기에 두 사람의 입에 풀칠을 하는데는 걱정을 덜어 주었다.


그러나 신랑은 아토피의 피부병이 있어서 신혼초부터 고생을 했었다 한다.
밖에서 햇볕을 보며 막노동을 하기에는 육체적으로 고통이 따랐기에 
그는 밀무역을 하로 섬에 오는 선상(바다 보부상)을 통해서 중국이나 일본의 상인들과 무역을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을 남보다 일찍 접하고, 그들을 만나 볼 궁리를 조금 먼저 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행히 장가 오기 전에 도덕면 관리에 있는 한문 서당에 5~6년간 다니면서 
천자문과 동문선습을  마스터했기에 이 힌문실력이 향후 그를 고흥 땅의 최초 무역왕으로 만드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그는 결혼한지 한달이 지났을 때 쌀보리 한 가마를 신부 몰래 짊어지고 말없이 가출을 해버렸다.
고흥지방에서는 쌀보리를 줄여서 <보쌀>이라고 부른다.
<보쌀>은 보리밭에서 타작한 겉보리를
물에 축여서 약간 불게 한 후에 절구통에 넣어 절구대로  찧어서 겉보리의 표피를 벗기고
이를 물로 씻은 후에 햇볕에 말린 보리를 말한다.

 

이 <보쌀>을 다시 솥에 넣어 삶거나 쪄낸 것을 
대나무 바구니나 대나무 석작에 보관해서 
매 끼니 때마다 일부를 덜어서 다시 밥을 짓는데, 이 밥이  순 보리밥이다.

이 때 살을 첨가해서 밥을 지으면 혼식 보리밥이 된다.


어쨌든 그는 집을 나간지 일주일만에야 돌아왔다.
화가 치민 신부가 가출한 사유를 따지자 그는 그간 가출해서 했던 일을 이렇게 털어 놓았다.

 

" 여보 말없이 나가서 미안하당깨.
사실은 놀고만 있을 수 없응깨 ~~
중국과 일본을 통해서 무역을 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이잉..

여수나 목포로 가면 중국 상인이나
일본 상인을 만날 수 있다는 데~~`
어디 여행갈 노자돈이 있어야제~`
그래서 저기 명천리 오참봉 할아버지가
돈놀이를 한다기에 돈 좀 빌리로 갔었당깨"

 

부인은 생전에 듣지도 못했고
꿈에서도 보지 못한 중국 사람과 일본 사람을
만나서 장사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혔다.

" 그래~~ 당신 지금 미쳤소?
우어메~~환장해불것이여~~
일 하기싫으면 내가 길쌈이나 논밭 매기 등  해서
품삯을 벌어 올테니, 그라고 먹여 살릴터이니깨

 

자기는 집이나 잘 봐주면 될턴데~이잉
무슨 놈의 바닷 봇짐장사를 한다는 말이요~이잉?"
하면서 신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한 동안 끌끌 차댔다.

 

그러나 신랑 선영홍은 말 재주가 좋아서
조단조단 신부를  이해시켰다.

" 내 말 더 들어 보시오~이잉.
명천리 오참봉 그 영감탱이가
담보 없이 무짠이 큰 노자 돈을 빌려주겠소.
그랑깨 나가 꽤를 내고 뱃짱을 부려서
담보없이 이 노자돈을 빌려왔소,
엣다~~ 이 돈 뭉치 보시요"
하면서 저랑스랍게 자루에 담은 돈 뭉치를 보였다.

 

신부는 난생 이렇게 큰 돈 뭉치를 보고
워메하고 소리를  지르고 나자빠 질려고 했다.

 

" 여보 놀랍소,
다시 조단조단이 자초지종 그 큰 노자돈을
빌려오게 된 그 꽤와 뱃짱 야기를
확 털어 놓으시요 이잉~~!"
그 때서야 신랑은 허허 너털 웃음을 웃으며
남은 뒷 야기를 죄다 털어 놓고
 내일은  여수로 떠날터이니
여행 때 갈아 입을 버선이랑 속옷이랑
준비를 해달라고  했다.

그리도 뒷 이야기는 마저  이렇게 해 주었다.


신랑은 오참봉이 애연가이며
특히 오도엽 궐연을 무척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래서 그는 집을 나왔을 때 짊어지고 나온 보리쌀로
연초를 두 접을 물물교환을 해서 샀다.
그리고 그 연초를 개나리 짐으로 만들어
오참봉이 살고 있는 금산 맨 남 동쪽 해안에 있는
명천리 마을을  찾아 갔다.

 

연초 애연가인 오참봉은 손님이 인사차 들려서 대가 없이
선물로 연초를 준다니까 사랑채에 그 손님을
일단은 잘 모시게  했다.

그리고   하루밤이 지나고서야 안채에 있는 서재로
  불러들여 인사를 받았다.
" 젊은이, 나가 애연가잉께 연초 선물은 잘 받았소.


그란디 어짠일로 날 보로 왔소
그저 무짠히 인사는 아닐터이고 이잉"
" 영감님  사실은 여수에 갈
노자돈이 필요해서 돈 좀 빌릴려고 왔당깨라우"
" 머시기여~~ 돈 꾸어달라고~이잉?
그라면 논문서나 집 문서는 당연히
갖고 왔겄제~~
싸게 싸게 내 보이드라고~이이!"
" 어짤깨라우~~  갖고는 왔는디 보관이
솔찬히 어려울깨라우""
" 머시라고~~우웽?!
시방 자네 나하고 농 따먹기 하자는
수작은 아니겄제~~!"
언능 내놔 보드라고~~"
선영홍은  오참봉 앞으로
빈 두손을 내밀어  벌리면서
이렇게 넉살과 뱃짱을 보였다.


" 아니~~빈 두 손이 담보란 말이여?"
오참봉은 버럭 화를 내며 어서 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  그라요! 참봉님, 제 몸이 담보입니다요.
만일 빌린 노자 돈을 1년안에 못 갚으면
이 집에서 10년간  쇠경없이
노비나 머슴살이를 해 드릴랑깨요.


제 뱃짱과 젊음을  담보로 믿고 5일간 여수에 갔다 올
돈을 제발 빌려 주시요 이잉~~제발요"
오참봉도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
그의 패기와 뱃장을 높이 사서
5일간 노자돈고  체재비를 빌려주었다.

 

 선영홍은 여수 앞바다로 출어를 나가는 중선 배인 어선을 타고 여수로 갔다.
그리고 여관에 들러 수소문한 끝에 중국상인 청상을 만나게 되었다.

 

다행이 선영홍이 결혼 전에 도양 관리부락에 있는
한문 서당에서 천자문과 동문선습을 배웠기에 비록 중국어는 한 마디도 못했지만
상호간에 의사 소퉁 수단으로 한자를 서로 써서 필담을 했다.

 

선영홍은 필담을 통해서 청상인들이
우모가사리(牛毛加四里)를 매집하려는 것을 알았다.
그들 청국 상인들은 청상(淸商), 또는 한상(漢商)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중국 산동성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상해와 마카오 등 중국의 주요 항구 도시도 다나며
그들은 무역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한는 것은 <우무가사리>라고 했다.

 

선참봉_37.png

 


그런데 우무가사리는 조선 것이 최고라고 했다.
조선 우무가사리를 삶으면 회벽용 접착재가


가장 많이 쏟아  나오고, 또  그 질도 가장 우수해서
중국에서는 수요가 많다고 했다.
그래서 그 우무가사리를 원하는 만큼 구해 올 수 있다고 하니까
청상들은 박수를 치면서 좋아라고 이렇게 소리를 쳤다
" 띵호와~!  띵호와!"
"아~~ 우무가사리라~~!!


금산의 앞 바다인 익금 해안과 명천리 해안에는
우무가사리가 널려있지 않는가!!

 

때 마침 일본 대마도에서 온 왜상(倭商)들도 만났다,
그들과도 상담이 한자를 통한 필담(筆談)으로 가능했다.
그들도 우모가사리((牛毛加四里)를 원했다.
우모가사리((牛毛加四里)라~~??!!
일본 상인도  <우무>를 소털을 뜻하는
 우모(牛毛)로 필담을 해서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왜 필요하냐고 물었더니 우무가사리로
한천(寒天) 가루를 만들어 그것을 식재료로 사용하여
요깡이나 푸딩 등 일본식 과자를 만드는 데 필요하다고 했다.
왜상들에게도 원하는 만큼 모와 오계다고 하니까
역시 그들도 좋아하며 박수를 좋아라 소리를 쳤다.


" 요이씨! 요이씨!"


선참봉_40.png

 

 


선영홍은 여수에서 상담을 마치고
5일만에 금산으로 배편 귀환을 했다.
때는 여름철과 초가을의 태풍도 지나고 늦 가을이었다.
그는 평소에는 거들더 보지 않았던
우무가사리의 현장 실태를 보려고 금산 익금리 해안을 둘러 보았다.
지난 태풍으로 더 밀려 온 우무가사리들이
해변의 모래 사장이나 해변가 바위들 사이에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그의 눈에는 우무가사리가 식물이 아니라
돈들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부인 박씨에게 똥돼지 한마리를
사오게 한 후, 이를 잡아서 삶고,
동내 주막에 있는 막걸리를  몽땅 다 사오게 하여
익금리 해변에서 마을 잔치를 벌렸다.
누구든지 와서 돼지고기와 막걸리를 마시라고 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우무가사리 한 바구니를 담아오면 막걸리 한 되고
한 발대를 지고 오면 다섯 되까지 마시게 했다.
보리 밥은 무료로 제공햇다.
마을 사람 50여명이 모여들어 들어 거들어 주었다.
 
이렇게 3일 동안 잔치를 벌려서 중선 배에 네 척에
실을 수 있는 우무가사리 양을 모았다.
이를 잘 다듬고 정리해서 그 후 일주일 가량 쨍쨍한 가을 벼에 말렸다.

그런 연후에  네 척의 중선 배는 여수를 향하여 익금리 북쪽에 있는연소 부두를 떠났다.
여수 부두까지는 한나절이 걸렸다.


부자가 되려면 하늘도 돕는다는 말이 있듯이
네 척의 배가 가는 동안에는 풍랑이 없어 순항을 했다.
게다가 천우신조격으로 배 주변을 습기를 품은 안개가
자주 감싸주어 여수에 도착하여 우무가사리의 무게를
저울에 달았을 때에는 그 무게가 훨씬 더 늘어서
큰 재미를 보았다.

 

중국 청상들로부터 우무가사리를 판 돈을
세어보니 금산에서 논을 30 마지기나 살 돈이었다.
이 돈을 가지고 오니 마누라 박씨가
좋아서 어쩔 줄울 몰라했다.
우선 선영홍은 오참봉에게서 빌린 돈을
두배로 갚았다.
오참봉은 이렇게 말햇다.
" 내 돈 놀이 하면서 담보없이 준 것은
자네가 첨이야.
어때?  나가 사람보는 눈이있담말일세~ 후하하하~"
하고 호탕하게 웃으며 선영홍은 이 담에 거상이 될거라는
덕담섞인 예언까지 해주며 선영홍을 격려를 해 주었다고 한다.


그 후 3년 동안 청상(중국상인)과
왜상(일본상인)들에게 우무가사리를
팔아서 선영홍은 제법 짭잘하게 큰 돈을 모았다.
그는 이제는
청상들처럼 진짜 중국에도 가보고,
중국에서 물건을 사와서 국내 보부상들에게
팔아서  큰 이문을 남기는 바닷 보부상이 되소 싶었다.


이런 바닷 보부상을 선상(船商)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보성선씨의 시조인 선윤지 선조가
중국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어, 사실상 조상이
중국인이라 하여 중국의 청상들과 거래를 할 때
남 보다 큰 신뢰와 신용을 받았었다.
말하자면 우무가사리 덕을 본 것뿐만이 아니라
조상 덕도 단단히 본 것이다.
그래서 시조 선윤지 선조가 왔다는 산동반도에
한 번 꼭 가 보기로 했다.

물론 이문이 남을 물건도
귀국길에 사  올 요량이었다.
청상들과 우무가사리로 거래를 튼지
네 해가 되던 늦 봄에
드디어 청상의 무역선을 얻어 타고 산동반도에 가 보았다.


그러나 수소문을 해도  선윤지 시조와 인척이 되는
선씨들이나 기타 선대들의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한동안 실망하기도 했다.

선참봉_44.png

 

그러나 산동성과 복건성 등을 청상들 따라 다니다가

어마 어마하게 큰  왕죽(王竹) 대나무가 빽빽이
밀림을 이루고 있는 왕대밭을 보고
 장사 아이디어가 번쩍 떠 올랐다.

바로 이를 국내로 수입하기로 했다.


이 왕대를 가지고 가면 금산 앞바다의 갯뻘에
줄줄이 박아서 김을 양식하면 큰 돈을 벌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생각났던 것이다.

사실상 이를 계기로 일제 강점기에
금산 지역은  김을 다량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김_양식1.png

 


금산  주민들은 선영홍을 통해서
김을 일본에 수출하여 큰 소득을 올리게 되었다.
우무가사리에 이어서 김, 고흥 사투리로 해우도
선영홍에게 또 돈 다발을 무더기로 모아왔다.


아무튼 그는 왕대로 뗏목을 만들어서
중국 무역선에 매달고, 그 위에는
한약재, 비단 등과  상해 마카오에서 들어 온
서양 상품들도  수입하여 함께  싣고 귀국하였다.

 

 

그는  곧 이 왕대도 팔아서  짭짤한 부수입을 올렸다.
고흥 반도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이 희귀한  왕대를 사서 굴뚝 연기통으로
사용하는 집들도 꽤나 있엇다.
필자의 조부도 선영홍과 나이가 비슷했고,
또 선영홍이 살았던 도양의 관리 마을 근처에 있는
도양모장의 부 감목관이어서 서로가 친교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필자의 할아버지 집에도 그 왕대의 굴뚝 연기통이 설치되어 있었다.

 

선참봉_51.png

 


바로 아래 사진에서 왕대 연기통은 아마도
선영홍이 중국의 복건성에서  뗏목 배를 만들어
수입해 온 왕대 나무의 하나라고 추정된다.

필자의 조부 이종호는 1855년 생이고,
선영홍으 1861년 생이니까
필자의 조부가 선영홍보다 일곱 살 위였다.


아마도 형님 동생하며 친교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조부 이종호(李鐘鎬)는
사실상 호장과 보인도 역임해서
흥양군에서는 파워가 있는 실세였다.
당대 고흥 부호들인  영광집 김정태 만석꾼,
정치인 서민호의 부친인 서화일 5천석꾼,
한약방으로 자수성가한 신우구 6천석꾼 ,
풍도농장 간척사업가인 이상하 3천석석꾼 등
모두가 친인척 또는 혼척으로  직간접의 인연을 맺고 있었다.

 

선영홍의 손자인 선병한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조부인 선연홍은 고흥 반도 북족에서 제일 부자인
서화일과도 친교를 했다고 했다.

5천석꾼 서화일은 1860년 생이니까 선영홍 보다 한 살 위였다.
사실상 동갑으로 생각하고 말도 터놓고 친구처럼 지냈을 것이다.
그리고 서화일 외동딸인 서금자는 필자의 조부인 이종호의
손자 며눌이가 되었기에 서화일과 이종호는 사돈간이었다.
그러니까 풍도농장의 간척사업가 이상하는 서화일의
사위이며, 동시에  이종호의 손자이기도 하다.
이런 인간관계에서 보면 선영홍과 이종호는 틀림없이
친교가 있었고, 그 결과 왕대 굴뚝도 선영홍으로부터
선물로 받았거나, 또는  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필자의 조부는 역내에는 파워가 있는 실세였으므로
장사꾼인 선영홍이 팔기 보다는 인맥을 형성하기 위해서
선물로 기증했을 거라고 필자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정을 해 본다.

 

 


< 고흥의 땅  부자들과 당대 실력자 >


서화일사진.png
▲ 5천석꾼 서화일 (1860~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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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대 실력가 이종호(1855~1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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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석꾼 김정태(1869~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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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천석꾼 이상하(1898~1987)

 


당대 고흥에서 부자들 중에서
서화일과 선영홍만이 출발이 상업인이었다.
당시 언어로 표현하자면 고흥에서
손이 큰  두  보부상이었다.

그러나 이 두 보부상에서 서화일은 부자로
잘 알려져 왔는데, 그에 비해서 선영홍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부자가 된 후에 1904년에 곧장 고흥땅을 떠나서
충북 보은으로 이주를 해 버렸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선영홍이 한창 우무가사리로'
돈을 벌어 들이고 게다가  김, 소금, 젓갈 등 해산물까지
거래 품목을 늘려서 장사를 넓혀 가던 시기는 약 20년 동안이었다.

그 기간 중에 금산은  8년간 흥양군에서 새로 생긴 돌산군으로   편입되어서
 일시 그는 돌산 사람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돌산군은 1896년에 생겨서 고흥에 속한 나로도 봉래면과
거금도 금산면을 편입시켰다가 일제 강점기인 1914년까지
20년간을 품고 지내다가 그 해에 실시된 행정개편으로 군(郡)의 지위를 잃고
다시 고흥군으로 그 섬들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돌산에서는 한 때 선영홍을  돌산 출신으로 
충청도에서는 상당수 사람들은 그저 당연히 충북 보은 출신으로 여겨 왔었던 것이다.

게다가 고흥 출생지인 도양면과 금산에서는 본명인 선형수로 알려저 있었기에
선영홍은 낯선 이름이었다.

 

그래서 한 동안 선영홍은 고흥에서 잊혀진 인물이었다.
마치 김태식나 천옥자는 본명이라 고흥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었는데, 레슬링 선수 김일, 화가 천경자하면
이를 처음 듣는 고흥인들도 이들이 고흥 출신이 아닌
 낯선 타향인으로
알아 들었던 경우와 매우 유사했었다.
 
 
 
왜 선영홍은 고흥 금산에서 충북 보은으로 이주를 했을까?

 

 

갑자기 우무가사리로 떼돈을 벌어
부자가 된 선영홍은 부를 지키기에도 골몰했다.
그러던 그가 꿈을 핑게로 고흥 금산을 떠났다.
나는  그가 고흥반도의 금산이라는 섬을 떠난 것은
당시의 시대적 환경과 그가 처한 신분 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해 보고 있다.

 

그가 선상, 즉 바다 보부상으로 무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20세가 되던 1880년대 초 부터였다.
1880년대는 조선왕조가 세도정치로 
패망 직전을 행해  멍들어 가고 있었다.

밖으로는 외세의 거친 파도가 밀어닥쳐 오고 있었고,
안으로는  백성들이 학정에 시달려 불평 불만이
 화산이 터지기 직전에
쌓일대로 쌓여서 농축된  용암처럼 언제라도
분출구를 찾으면 금새 터질려고 하던  시기였다.


1985년 경에는  선영홍은 혈기가 왕성하여
무역의 발길을 넓혀서 청상을 따라 산동성을
서너번 다녀왔다. 그는 처음에 보성선씨의 시조인
선윤지가 산동에서 왔다고 들었기에 그 곳에 가서
선씨 일족을 만나면 시조 전의 선대  선조들 묘소를
찾아서  배향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중국 청상(淸商)들에게 자신의 뿌리가 중국이니
거래를 할 때 잘 봐달라는 묵언의 빙표를 달고 싶었다.
그리고 중국이 자신의 뿌리가 있음을 입증하여
중국 상인들과 더 큰 무역판을 벌렸으면 했었다.
그러나 결국 중국에서 선대 조상들의 흔적을 찾거나
선씨 일족을 만나지 못하여 허탈해 하며 귀국했었다고 한다.

 

 다시 무역에만 골몰하면서 1888년에  선영홍은 나이가 28세가 되었다.
그 해 늦봄에 첫 아들 정훈을 얻었다.
그는 돈보다 아들을 얻은 기쁨이 더 크다고 자주 말했었다 한다.


선영홍이 고흥 금산 섬을 떠날 때가 1904년이니까 나이는 44세가 된다.


못 해도 우무가사리 등 무역을 한지도 어여 스무 해는 넘었을 것이다.
그 동안  무역을 하느라 한반도 해안에 있는
여수 통영 부산 목포 군산 인천 등도 왕래도 많았었다.

 

특히 중국 일본 상인들과의 거래는 
여수보다는 경상도 통영이나 제주도 서귀포에서 많이 했었다.

한반도 내륙,   특히 고흥 반도의 읍내시장, 과역시장, 유둔시장 등을  위시하여 
벌교, 낙안, 순천, 보성,장흥, 해남 등지에 있는 보부상 객주들을
만나서 거래를 트기 위해 수시로 많이 다녀왔다.


특히 보성은 보성선씨의 관향이므로 더욱 뻔질나게 다녔다.
그런 와중에 큰 재산을 계속 늘어났다.
그러나 그는 고흥을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고흥 금산을 떠나기로 했다.

 

선영홍이 고흥을 떠난 이유는 아마도
(1) 신분 상승을 위한 지역변경을 원했거나,
(2) 동학사상이나 정감록 등 십승지에 대한 믿음을 갖었거나
(3) 또는 가족의 안위와 재산을 계속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도 먼 곳 충청도 속리산 근처인 보은으로 옮겨 갔을거라 일단은  추정해 본다.
 
◆ 선영홍은 과연 신분 상승을 위해서 고흥을 떠났을까?


그렇다. 꼭 이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럴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우리말에   “ 말을 사면 마부도 갖고 싶다”는
속담이 있지 않는가?!.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이 갑자기
출세하거나 부자가 되면 신분을 상승시키고
싶은 욕구가 강해진다. 이것은 인지상정이다.
선영홍도 이제는 무역으로 떼돈을 벌었으니
솔직히 말해서 양반행세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비록 조선시대, 구한말이었지만
고흥반도에서는 여전히 양반행세를 하는
향반들이 있었다.
 
고흥 반도 내륙에는 향교가 있었고,
향교를 중심으로 토반세력인 4대 성씨인
신송유정이 유림을 자처하며 양반행세를 했다.
이들은 상인을 <장사치>라하여 사실상
돈이 많아도 조상이 양반이 아니면
결국 <상놈>으로 매도했다.
 
아마도 선영홍은 이제 땅땅거리며
살 수 있는데 한반도 맨 끝, 그것도
주먹만한 금산 섬에서 일부 유림이나
향반들 마저도 대놓고는 그렇게 못 하겠지만
돌아서서라면 그런 취급을 한다는 것은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고흥의 향반들은 갑지가 졸부가
된 사람들에게 이런 농담을 자주 해 준다.
“워이~마이씨~~
자네가 아무리 부자라 해도
고흥 땅에 사는 한, 지네 뿌리를 알아붕께
상놈은 영원히 쌍놈이여!
그랑께 양반 소리 듣고 싶으면
이렇게 해 불소.
재산 다 싸가지고 산을 3 개 이상
넘어가 살아 불소.
그리고 이웃에 적선을 많이 하소.
그래야 여론이 좋아지네.
 
그란디 한가지 조건이 있네~!
그곳에 가면 3대 동안 이웃과 다투지 말고
좋게 살다가 양반 신세 증거가 들어있는
족보 하나 만들어서 조상이 양반이라고
자주 자랑하면 3대 후에는 향반 대우를
받을걸세 ㅋㅋㅋㅋㅋ
진짜 양반은 아니더라도 우리처럼
시골양반, 그랑께 말하자면 향반 노릇은 할 수 있다네“
 
 
고흥 향반들은 아무리 땅부자이고 돈이 많아도
유교의 필독서인 사서삼경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양반 취급이나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사서삼경을 읽을 줄 알고, 1년에 두 번 지내는
향교 제사 때, 최소한 한번은 다녀와야
유림으로 자처하고, 향반 측에 끼였다.
 
그러나 선영홍은 집안이 가난하여 한문은
많이 배우지 못했다.
17세에 결혼하기 전에 관리부락에 있는
서당을 몇 년 쯤 다녀서 중국 상인을 만나면
겨우 필담으로 의사 교환은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꽤가 많고 눈치가 빨라서 자기보다
한문 실력이 탁월한 사람들과 교제하여 그들의
한문 실력을 빌려서 상담시 필담은 물론,
계약서 작성 등에도
필요한 도움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다행히 선영홍이 부를 제법 모와 부자 소리를 들을 즈음에
그가 살고 있는 섬인 <금산면>에 태풍이나 폭우, 해일,
또는 가믐으로 흉년이 들 때, 수시로 저축된
곡식을 풀어서 난민들을 구제해 주었다.
그리고 때때로 세금도 대납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염전을 만들기 위해서
해안에 갯뻘을 막는 제언사업과 간척사업에도
물질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적선으로 금산면에 거주하는 유림들은
새로 군으로 설치된 돌산군수에게 여러 차례
그의 선행을 알리고 표창을 탄원하기도 했다.
 
고흥군에 속했던 금산면은 18년간 (1896~1914)
잠시 새로 설치된 돌산군에 속했었다.
그러니까 선영홍의 나이가 36세~54세까지
금산면은 돌산군에 속해있었다..
 
떠나 온 금산면은 그가 충북 보은으로
이사를 온 후, 약 10년간
돌산군에 속했다가 1914년에 다시 고흥군으로
원대 복귀하였었다.
그러니까 선영홍은 금산에서 35년간은 고흥 사람으로,
8년간은 돌산 사람으로 산 샘이다.
그리고 여생 28년은 보은 사람으로 살았다.
 
선영홍의 손자 선병한선생이 필자에게 전수해준
10여통의 탄원서 복사본에는 두 가지의 미덕을
빠짐없이 열거하고 있다.
그 하나는 보성선씨 선대 다섯 사람의 충신들을
숭모하는 오충사와
다른 하나는 부친 선처흠의 효행과 모친의 열행으로
임금으로부터 건축을 윤허를 벋았다는 효열각이 있다.
 
이 두 미덕을 통해서
보성선씨 문중과 선영홍 가문은 명문 또는
양반가문으로 인정받으려 애썼다는 흔적이 보인다.
 
먼저 보성선씨의 오충사에 대해서 알아 본다.
오충사란 보성선씨의 시조 선윤지, 선형, 선거이,
 선약해, 선세강을  모시는 사당이다.
이 사당은 조선조 말기 1830년 (순조 30년 10월 9일)에
사액을 받은 사당이다.
당시 조선 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순조 30년 10월 9일 계사 2번째기사 1830년
고 감사 선윤지 등 5세의 사액을 오충이라고 내리다
고 감사(監司) 선윤지(宣允祉) 등 5세(世)의 사액(祠額)을 오충(五忠)이라고 내렸는데,
예조에서 그 후손들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기록을 보면 보성선씨 후손들이 청원을 하였기에
예조에서 이 청원을 순조에게 보고하고
 <오충/五忠>이라는  사액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당시 이를 순조 임금께 건의했던 예조판서는
경기도 가평 출신인 이희갑이었다.
 
선영홍이 태어나기 30년전에 나랏님이
5충신을 공인해줌으로서, 비로서
최소한 보성이나 고흥 지역에서 보성선씨도
향반의 행세를 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
 
흠이라면 고흥이나 보성에 있는 향교 측
유림들이 직접 청원을 하여 <5충>의 사액을
받았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 향교측 유림들도 각자 자기 문중의 충신을
찾아 세우거나, 공인받은 충신들을 모시기에도 여념이 없어
어떤 대가나 특이사항 없이 그저 보성 선씨의 명예만을 위해
앞장서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음은 보성 선씨가 문중의 명예로 내세우는
선영홍의 부모님인 선처흠 내외의
효열각에 대해서  알아본다.
 
효열의 내용이 일부는 전설따라 삼천리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너무 과장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선처흠의 부인인 경주김씨의 열행은
금산 같은 마을에 있는 김차태의 부인인 경주이씨 여인의
열행 내용과  너무나 흡사하여 팩트를 의아하게 만든다.
 
선처흠 내외의 효열각은 금산면 어전리 평지 마을에 있다.
충북 보은 고택 가옥 솟을대문 앞에도 꼭 같은  효열각이 있는데
이것은 금산 효열각 원형을 그 대로 모조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고흥 두원면에서 원형을
그대로  옮겨왔다는 선영홍의
철제 송덕비처럼,   마치 금산에 있었던 것을
그대로  옮겨 와서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철제 송덕비는 선영홍이 고흥군에 있는
두원면, 과역면, 점암면, 영남면의  4개면에 널려 있었던
 논들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는데, 소작인들이 그 고마움을
잊지않기 위해서 1922년에  두원면 비각거리에 불망비를
세워주었다 한다.. 그러나 고속도로 작업으로 길가에 방치되자
 2004년에 보은으로 옮겨 왔다 한다. 
 
그러나  나는 고흥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원형을 옮겨 오지  않고  
똑같은 크기와 모양과 내용으로 모조품을 만들어
보은 고택 앞에 세웠어도
하등 흉될 것이 없을 터인데~~하는 아쉬운 생각을 갖는다. 
선영홍은  이제 고흥 사람이 아니고
충북 보은 사람이 되어버린 것으로 느껴저서~~~아쉽다!
만약  선씨 후손들이, 휴가철이나  볼 일이 생겨서
고흥에 가는 일이 있어 그  현장에 와서 그 철비를 본다면
더욱 더  감동스러울 수도 있을터인데~~~!!
이 모두가 나에겐 신분 상승을 위한 몸짓으로 보인다.
 
지금도 고흥 금산에 있는 효열각 안에는
선영홍 내외의 효열 행위를
찬미하는 글이 한자로 음각되어 있다.
 
고흥 문화원에서는 이 효열각을 문화재로 등재하고
또 고흥문화원 인터넷 홈페이지에 한자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올려 놓고 있다.
 
 우선 번역된  
그 내용을 그대로 옮교보면  다음과 같다.
 
◆보성 선씨(寶城宣氏)의 효열(孝烈)을
기리는 정려기(旌閭記) 
금산면 어전리 평지마을 보성선씨

 
천지 성(性)에 사람이 귀한데, 사람의 행실로는
효도보다 큰 것이 없다.
 
신하의 충성, 부인의 열행,
자식의 효도가 함께 나열되어 삼강(三綱)이 되는데,
삼재(三才)의 도에 호응하는 것이다.
삼재가 갖추어지고,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삼강이 밝아야 집안과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것이니,
옛날의 현인들이 이른바
“우주의 기둥이고 백성의 주춧돌이다.”고 한 말이
진실로 여기에 달려 있는 것이며,
훌륭하고 밝은 임금이 칭찬하고 드러내어
정려를 세우는 까닭이 또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선씨의 효열을 기리는 정려문은 상(上)이 즉위한 지
33년이 되던 병신년(1896) 가을에 세운 것이다.
 
선씨는 문충공(文忠公) 휘 윤지(允祉)로부터
충절(忠節)과 문망(文望)으로
당세의 명신(名臣)이 되었는데,
그 경사가 후세까지 미쳐  오충원(五忠院)으로
또한 산양(山陽)에 편액(扁額)하게 되었으니,
선씨의 충성은 이미 우러러볼 만한 것이었다.
(여기서 산양은 보성의 옛 별칭임)
  효자 처흠(處欽)은 문충공의 17세손이다.
효자는 태어날 때부터 순박한 성품을 지녔고,
어려서부터 복종하여 섬기고 봉양하는 것이
한결같이 어른과 같았으니,
대체로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이었다.
 
부친이 일찍이 백내장을 앓았는데,
오랫동안 낫지 않은 채 침과 약으로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매의 눈을 얻어
약으로 사용한다면 바로 고칠 수 있다.”고 하자,
효자가 영마산(靈馬山)에서 울며 빌었는데,
두 마리 흰색의 매가 날아와 앉았다.
 
이에 잡아다가 시험 삼아 써 본 결과
약간의 효력은 있었지만,
아직 완쾌되는 효력은 보지 못했다고 여겨졌다. 
 
이에 시절은 바야흐로 엄동설한이었건만
다시 바람을 맞고 눈보라를 무릅쓰면서
이레 밤낮을 산의 단(壇)에서 경건하게 빌었으니,
반드시 매를 얻기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정성이 지극하면 귀신도 감동시키니,
귀신의 도움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튿날 새벽 과연 다섯 마리의 매가 날아왔다. 
 
그 중 매 한 마리를 잡아다가
단 위에 올린 다음 받아다가 사용한 결과
몇 년 묵은 눈병이 하루 아침에 빠르게 회복되어
완전히 밝아졌으니, 효심이 신명(神明)을
감동시킨 것임을 여기에서 증명할 수 있다.
  효자의 처 경주 김씨(慶州金氏) 또한
효도(孝道)에 감화되어 열성(烈性)을 드러내었으니,
일찍이 효자가 고질병이 들었을 때
허벅지 살을 베어 먹임으로써
그 병이 영원히 나았고,
훗날 죽을 때를 당하여 다시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여서 며칠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아! 그는 열부(烈婦)이니,
참으로 효자의 배필이라고 할 만하다.
  아! 충성, 효도, 열행은
진실로 이른바 하늘의 법이고
땅의 마땅함이며 백성의 행실이다.
 
그런데 선씨의 효도가 위로는
선조의 충성을 계승하였고
아래로는 철부(哲婦)의 열행에 짝하였으니,
천지의 성을 잃지 않아 사람의 도리에
유감이 없었다고 이를 수 있다.
 
이 때문에 성조(聖朝)에서 칭찬하여 드러내어
옛날에 오충원이 있었는데
지금 또 효열의 정려가 있게 되었으니,
어찌 한 고을과 한 지방만을
영예롭게 하는 것에 그치겠는가.
 
진실로 한 시대와 후세에
길이 영광이 있을 것이다.
아! 위대하다.
광서(光緖) 18년(1892) 10월 26일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서상린(徐相隣)은 짓다.
위 효열록 스토리를 읽어 보면
요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  선씨 효열각은  정확하게 언제
             건립되었는가?
  ●  그리고그  효열각 또는 정려문을 세우리는
         왕의 명령, 즉 명정은 언제 있었는가?
           그 근거는 이조실록에 있는가? 


위 효열록에는 1896년(고종33) 가을에 건립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말미에는 이보다 빠른 1892년(고종 29년)에 동부승지
서상린이 효열문을 작성했다고 써있다.
조선실록 고종 33년과 29년 기록에는
선씨 효열각이나 효열문을 건립하라는
왕의 명령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단지 고종 29년에 서상린이 고종이 직접 제수하여
동부승지로 임명한다는 기록만이 보일뿐이다. 
그리고 효열 내용이 너무나  황당하다.
아마도 고종이 황당무개한 전설같은
효열 스토리를 좋아한다면 몰라도
이런 황당한 스토리를 듣고
효자, 열부라고 찬양하는 정려문이나
효열각을 건립하라고 왕명을 내렸단 말인가?!


눈병이 난 부친의 눈병을 고치기 위해서
약을 구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했다는 말이겠지만
문자 그대로 제단을 만들고 이레 동안 기도를 했더니
귀신이 도와서 매 다섯 마리가 제단 위로 날라 왔고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잡아 제단에 제를 올린 후,
이 매 고기와 눈을 요리하여 약으로 삼아 부친께
잡수게 했더니 눈병이 나았다 한다.
고종은 이 황당한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듣고 탄복을 하였단 말인가?


그리고 감격한 나머지 효열각을 세우라고
왕명을 내렸단 말인가?
게다가  선영홍의 어머니인 경주김씨의
열행은 더욱 괴기하다.
아니 너무나 엽기적이다.
허벅지 살을 도려내여 익혀 약으로 먹게하고
그래도 미진하여 손가락을 잘라서 출혈시켜
받아 모은  혈액으로 환자의 생명을 연명시켰다는
이 괴기한 엽기적 스토리를 들고 이 또한 고종은 감탄하고
찬미하면서 효열각을 건립하라고
왕명을 내렸단 말인가?!


그 시대에는 이런 일이 가능하고
  이런 말이 통했단 말인가?!
만약 이렇게 감탄할 만한 효열 행위라면,
그리고 왕명을 내렸다면 그 기록은 어디에 있는가?! 


조선 말기에는 벼슬도 돈으로 살 수 있었고,
정명, 즉 정려문의 교지도 돈으로 살 수 있었다 하니~~`
설마 그럴리야 없겠지만 선영홍의 후손들은
집 자랑이나 간장 자랑, 종갓집 음식 자랑은
잘들 하는데 관련 문헌, 사진, 기록 등을
거의 보존해 오지 않고 있다 한다.
단지 어느 해 홍수로 여러 문서와 사진첩이
유실되었다는 핑게거리만 잘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들었다.


대종가 집이면 대종가 다워야 하는데
무언가 썰렁하다.
심지어 선영홍의 한자 성명도 혼란스럽게 한다.
족보에 선영홍의 <홍/鸿>과  돌산군에 청원서를 낸
청원서의 선영홍의 <홍/洪 >이 서로 다르다.


이것은 어찌되어 이러한가?
아무리 무식한  집안도 족보상 한자는
대부분 틀림이 없다.
 하물며 한문에 익숙한 유생들, 유림들이
작성하여 돌산 군수 앞으로 보낸 청원서에도
 기입된  선영홍의 <홍> 이 <큰물홍/洪>과 <기러기홍/鸿>으로
 각각  다르게 적혀 있다.


조선  말기지만 그래도 도 유생들이나 선비들 사이에서는
통성명을 할 때는 성명에 훈까지 붙여서 했기에
이름 석자의 한자는 거의 틀림없이 서로 주고 받고
기억을 했다.


금산에 거주했던 20 여명이 이름을 연서하여 만든
탄원서가  아닌가?
게다가 금산에서는 최고 부자인 선영홍의
한자 이름을 20여명의 유생들이 헷갈릴 수가
있단 말인가?
혹 한 사람이 대신해서 20여명을 명기하고
청원서를 작성했다면  착오나 실수도 있었겠지만~
 
(참고 사진 추후 삽입 예정)
이번에는 선영홍의 어머니요, 선처흠의 부인인
경주김씨의 효부 열행 스토리와 관련하여 생각해 본다.
이 스토리와 유사한 허벅지 살 도려내고,
손가락 잘라  출 혈시켜 받은 혈액으로 효열비가
건립되었다는 금산면 같은 마을인, 어전리 평지 마을
김차태의 처, 경주이씨의 효열록 이 또한
고흥문화원 인터넷 홈 페이지에서 퍼와 옮겨 본다.
 
참고로 비교해 보면 매우 흥미롭다.
 
정말 섬인 금산에서는 이런 엽기적인 일들이 시리즈로 일어나고
그리고 그 효열로행위가 아무런 의심없이
마을 사람들에게 받아 들여지고 칭송을 받았단 말인가~~`?!
하기야 어려운 한자로 비석에 적혀 있으니
 20여 유생들을 제외하면 그 누가 그 효열을 알기나 했겠는가!
 
다음은 경주이씨 여인의 효열록이다.
 
전(前) 참봉(參奉) 김차태(金次泰)의 처(妻)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효열(孝烈)을 기리는 비문
금산면 어전리 평지마을 경주이씨

경주이씨효열비.jpg

 

부인은 성이 이씨(李氏)이고
경주(慶州)가 그 본관이니,
보한당(保閒堂) 휘 욱(郁)의 11세손
김원춘(金元春)의 따님이시다.

집안에 있을 때에 가정의 가르침에 훈도(薰陶)되었고,
《예기(禮記)》의 <내칙(內則)> 편(篇)을 즐겨 읽었으며,
 뜻과 행실이 단정하고 의젓하였다.

자라서는 학성군(鶴城君) 김완(金完)의
11세손 김차태(金次泰)에게 시집갔는데,
 시부모를 섬김에 있어 한결같이 옛날의 법도를 따랐다.
시아버지가 일찍이 병이 들어 오래도록 낫지 않아,
백방으로 치료하고 봉양하였으나
 그 효력을 보지 못한 채 점점
위독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부인은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변을 맛보아
혀에 느껴지는 달고 쓴맛으로
 병의 상태를 증험하였고,
이어 허벅지 살을 베어 드시게 함으로써
 연명하여 다소 차도가 있을 수 있었다.
 
시어머니가 늙어 치아가 없게 되자,
부인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시간을 맞추어
고당(高堂)에 올라가 젖을 드시게 하였으니,
 시어머니가 식사를 하지 못하면서도
 몇 년 동안 건강하고 편안하게 사실 수 있었다.
 옛날 최산남(崔山南)의 할머니인 당 부인(唐夫人)이
미명(美名)을 독차지하지는 못할 것이다.1

  나이 28세에 김차태의 병이 위독해지자
북극성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이 대신 죽기를 빌었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입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여
잠시 며칠을 연명하게 하였다.
 마침내 하늘로 여기던 남편을 잃게 되자,
 울부짖으며 몹시 애통한 나머지
 곧 죽고자 하여 밤을 틈타
몰래 따라 죽으려고 계획하였는데,
집안사람들에게 발각되어 계획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생각을 돌리도록 권고하자,
인하여 스스로 생각하기를,
“뱃속의 어린아이는 남편의 남겨진 혈통이다.
보호하고 기르고 잘 가르쳐 집안의 법도를 이루어
 훗날 지하에서 남편을 만나는 것이
바로 나의 직분이다.” 하였다.

이리하여 생각을 바꾸어
부지런히 집안 일을 처리하고
 아들을 가르치고 길러 성취시켜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있게 하였다.
위대하도다! 부인이 선조의 발자취를 이어
후손들을 넉넉하게 한 것이 또한 이와 같았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효열을
 완성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계해 칠월 상순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달성(達城) 후인(後人)
 완운(浣雲) 서광필(徐光弼)은 짓다.
 
보성선씨 선처흠 내외의 효열각 비문은
동부승지 서상린이 1892년에.
김차태씨의 경주이씨 여인의 효열각 비문은
좌승지 서광필이 1863년에 각각 썼다.
 
요즈음의 우리에게는 엽기적으로 보이는
허벅지 살 과 손가락 피의 효도는
선처흠의  부인이 앞 선 경주이씨 여인을
따라하기처럼 보인다.
 
그건 그렇고 작은 섬 마을에서
왜 이런 해괴한 효행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이것은 과연 팩트가 있는 효행인가?
 
막상 현지 금산 그 마을에 가보면
두 비각이 무엇 때문에 건립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이 드믈다.
그들의 효행에대해서도 아는 사람이 없다.
 
만일 사실에 근접한 효행이 있었다면
120~150년 전의 일이니까
효행 마을을 자랑하기 위하여
구전을 통해서도 면면히
지금까지도 전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금산에서 해산물 등으로 갑자기 부자가 되어
명목상 신분 상승용으로 벼슬을 샀거나,
돈을 주고 정려문이나 효열각을 세웠다면
마을 사람들은  굳이 관심도 두지 않고,
그리 오래 기억해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경주이씨 부인의 비문이
선처흠 부인인 김씨여인의 효열 보다
30년 먼저 써젔다.
그래서 보성선씨 김씨여인의 효열을
따라하기였다는 평행이론을 들이대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1978년에 발간된 보성선씨 대동보의 족보에
실린 선영홍  가족들의 단자를 살펴보면
최소한 기록상이나마 명문가문, 이른 바,
<선씨보은 문중>과 관련하여  신분 상승을 위한
상당한 노력이 있었음을 직감할 수 있게 한다.
 
우선 선영홍의 단자를 살펴 본다.
족보에서 <단자>란 각자의 성명, 아호,
생몰연대, 경력, 묘지의 위치를 기록한
내용을 말한다. 요즈음 시셋말로 프로필을 말한다.
 
단자는 그 내용이 통상 길어봤자 10 줄 내외이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은  5 줄 이내이다.
그러나 경력이 화려하거나 가문을 빛낸 사람일 수록
단자의 내용은 길어지고 10 줄을 훨씬 넘는다.
 
그런데 족보를 만들 때, 통상 대동보를 만들 때는
제작 비용이 막대하게 들어간다.
 
단자 수가 많은 대 성씨 족보는 대파의 수가
20 개가 넘고, 소파의 수가 100여개를 넘기 때문에
통상 대동보의 책 권 수는 50여권이 넘는다.
그래서 대동보 편집자들은 단자 내용을 깐깐이
심사하고 그 기록 내용이 사실인지를 따진다.
그리고 단자의 내용을 줄이려고 한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편집과 제작에 참여한 사람이나, 대동보 제작에
거금을 희사한 사람이 내놓은 단자의 내용은
팩트를 덜 따지고 그 내용이 길어도 그 대로 실어 준다.
그래서 이런 긴 내용에는 사실이 아닌 내용,
사실은 있어도 과장, 왜곡하여 실리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화려하지도 않는 경력이 길게 나열되어 있다.
 
 
이래서 대동보  제작시 과대  비용과 단자 모집과 편집의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따라서  보통 30년에 한번씩 대동보를
발간한다.
 
아무튼 선영홍의 족보상 단자의 길이는 32 줄 이다.
그의 부친인 선처흠은  31 줄이다.
그의 장남 선정훈은  45 줄이다.
 
반면에 선영홍의 조부 선효종은 단자가  10 줄이다.
 그의 증조부인  선덕우는 단 3 줄이다.
 
여기에서 가족의 단자 길이에 영향을 준 사람은
선영홍의 장남인 선정훈으로 추정된다.
 
선영홍이 고흥에서 한 때 갑부가 되었고,
충 북 보은으로 이주하여 당대에
한반도에서 가장 큰 대 저택을 소유하게 된
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소 도움이 될 줄도 모르는
선영홍 부자의 단자만을  살펴 보기로 한다.
 


◆족보의 단자로 본 선영홍은 누구인가?

 


족보상 한자의 이름은 영홍(永鸿/기러기홍 )이다.


고흥 금산에 있을 때, 그 곳 유림들이
돌산군수에게 보낸 청원서에는 한자 이름이
영홍(永洪/큰물홍 ) 또는 영홍(永 鸿/기러기홍)으로 헷갈리게 나 온다.
그리고 본명인 <형수/亨洙>도 나온다.
자는 형수(亨 洙)라고 햇다.
나는 이 이름이 본명이고, 영홍은 보명, 족보상 이름인데
후손들이 본명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조선조 말기 고종시대에 대원군이
족보에 항렬을 잘 표기하여 각 문중에서
선후대간에 구분을 잘 하여 선대를 잘 못 대우하는
경거망동을 삼가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래서 그 후에, 아마도 1910년 전의 선대 조상들도
본명은 자로 적고 본명에서 한개의 한자와 항렬의 한자를
결합하여 새로운 족보명, 즉 보명으로 기록하는  것이
족보 편집시의  관행이었다.


따라서 족보에서 선대 조상들이 형제들이
족보상 자가 동일한 한자가 들어 있어
비공식 항렬처럼 보이면 이 자는 대부분
본명, 원래의 자기 이름이다.
어던 경우는 어릴 때 아명이라 하여,
사실상 원명을 애둘러 표기하기도 한다.
나는 지난 7년간 족보를 연구해 왔기에
나름대로 설명한 것이지 통설은 아니다.
이야기가 새 나갔는데 다시 선영홍의 단자로 들어간다.


선영홍은 앞서 언급했듯이  영립, 영표, 영홍 3형제이다.
각자의 자는 형삼, 형칠, 형수이다.
이것은 바로 그들의 원명이고, 영립, 영표, 영홍은
족보명임을 말해 준다.


필자의 경우도 선친 3형제의 족보명은
순우, 재우, 화우이나 원명은 영순, 영대, 영화이다.
족보명에서 <우/雨>는 항렬이고, 원명에서 각자 한자씩
순, 대, 화를 빌려와서 족보 항렬 <우/雨>와 결합하여 족보명을 만들었다.


필자가 속한 경주이시 애일당공파보도
<보성선씨 대동보>가 발간된 1978년도
같은 해여서 족보명의 작명 배경은 비슷하리라 생각된다.


선영홍의 출생일은 강화도령 섬 총각이
갑자기 왕이 되어 철종이란 왕명으로
 임금 노릇을 한지  13년이 되던
1861년인  신유년 음력으로 12월 25일이었다.
타고난 성격은 순수했고, 덕성도 있고,
효심도 많아서 남에게 배풀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이웃 동네 사람들이 추위에 떨고,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물심으로 도왔다.
그래서 그의 시혜를 찬양하는 비석도 세워졌다.
그 비문은 당대 문장과 의병활동으로 유명한
행주기씨  송사 기우만이 선영홍의 행적을
작성하여 비문을 삼았다.


계사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1893년)
무역상을 했던 선영홍이 무인이 되려고
무과의 무술 시험에 합격~~?!
다음해에 보은으로 이사를 가야하는데
언제 무술을 연마해서 무과시험을 보았을까?


이것은 팩트가 없는 신분 상승용 또는
족보 장식용 경력으로 보인다.
하기야 당시에는 돈이 있으면
벼슬을 팔고 살 수 있었다하니 그렇게 알고 넘긴다.


무술년에는 참봉이란 직위로 관리를 했다.(1898년)
그 후  보은으로 이사를 온 지 5년이 지났다.
충청도도 양반을 따지는 곳이라 이제는 슬슬
<참봉> 정도의 벼슬을 하고 있다는 신분 과시용
타이틀이 필요했을 것이다.


전남 고흥 섬에서에서 1000리나 떨어진
속리산 근처 보은으로 왔는데
벼슬을 증명하는 문서를 매입해서 사실로
주장한들 누구 따지겠는가?
이것 역시 신분 상승용 겸 족보 치장용 경력이다.


선영홍이 처음 보은에 와서 그의 아들 정훈과 함께
134칸 자리 대저택을 건축하자 보은 향교에서는
비록 조선 왕조가 망하고 일제시대라하더라도
너무한다고 비난이 많았다 한다.
특히 개인 집에는 원기둥이 아니라
4각 기둥으로 건축해야하는데 이를 무시했다고
시비를 걸어 오기도 했다 한다.


이런 향교측을 무마히기 위해서 또는 압도하기 위해서
사실상 사설 향교격인 관선정을 건축하여
무료 기숙 조건으로 장학생을 모와서
한문 등 사실상 유교 교육을 시켰다.
이것 역시 한편으로는 신변 상승을 위한 자선사업으로 보인다.


이 선행사업을 주관한 사람은 선영홍의 장남인
선정훈이었다. 이 일로 관선정 기적비와
선정훈 송덕비가 보은 저택 앞에 세워지게 되었다,
이 일은 선영홍 가문을 <보은문중>으로
불리우게 할 수 있는 선행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또 , 갑진년에는 통정대부, 동부승지,중추원의관,
경연 참찬관, 가선대부 비서경을 지냈다.(1904년)
와~~~! 이건 너무한다!
보은으로 이사를 해 와서 할 일도 많았을터인데
그 해에 너무나 많은 벼슬을 획득(?)했다.


선영홍은 갑자년 정월 9일에 타계했다.
물론 족보에는 타계가 아니라 족보 용어로
<졸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묘지는 충남 서천군 종천면 신검리 덕산에 있다.
이 묘지 기록은 바로 선영홍이 사망한 후,
장남 선정훈이 그의 부친 단자를 제출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아들 정훈이 부친 선영홍을 너무 치장시켜~~
그러니까 이것은 신분 상승을 표하려다가
오히려 선친을
민망하토록 보이게 한 경우이다.


고흥군 금산면 대흥리 마을에 그의 공덕을
기리는 기념비와 춘추정이라는 사당이 있다.
첫부인은 밀양박씨 박병선의 딸이다.


남편 선영홍과 같은 해인, 신유년 1861년에 출생했다.
그리고 갑신년 3월 5일에 타계했다. (1944년)
묘지는 경북 상주군 화북면 동관리에 있다.


우웽~~!!
첫부인의 묘지가 왜 멀리 경북에 있을까?
무슨 사유가 있길래~~~??
유교가문, 양반의 문중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는 법인데~~
알다가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1978년에 대동보 작성시에는 그곳에 있었지만~~
요즈음은 가족 납골당이 유행인데 지금도
그곳에 있다면 이것은 명문가문에게는
흠이  되는 일이 아닌가. 
살아서 이혼을 하지 않았다면 죽어서
유골이라도 합장을 못 해 줄 이유가 있었단 말인가?
손자 선병한선생의 면담시 선영홍은 조부인 선정훈과 함께
대동상회를 만들어서 중국에는 상해, 단동에, 그리고 국내에는
전국에 걸쳐 10개의 지사를 관리했다고 들었다.


서울에 계실 때는 서울에서 조부를 모시는
한 여인도 있었다고 고백해 준 바 있다.
그러니까 경상도에도  대동상회의 지사가 있었을 것이다,
족보를 보면 둘째 아들 선남훈의 묘지도
경상남도에 있다.


혹시 차남과 함께 경상도에서 살다가 작고한 것이 아닐런지~~
그러나 대갑부 선영홍이 선산도 없었단 말인가?
왜 부인과 차남의 묘지가 연고가 있는 고흥 땅이나
충북 보은 땅이 아니고 경상도에 안장시켜 두고 있었을까?
속말로 뼈대있는 가문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일이다.


물론 뒤에서 언급하려는 사항이지만
선영홍은 정감록이나 동학사상을 신봉했기에
굳이 선산을 가리지 않고 전국에 걸쳐서
숨겨진 명당을 찾다보니 그렇게 된 것일까?

 


◆  족보 단자로 본, 선영홍의 장남인
     선정훈은 누구인가?


보성선씨 대동보에서 단자 설명이
가장 길다란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선영홍의 장남인 선정훈이다.
단적으로 그는 보성선씨 중에서 <보은문중>을
중흥시킨 사람이다.
사립 교육기관인 관선정도 설립하고  운영하여
수 백명의 인재들에게  무료 기숙의 교육을 시켜주었다.


그리고 보성에 있는 <오충사>의 중건사업에도
재정적인 지원에 아낌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개인적 흔적으로
유일하게 증명 사진 한장을  달랑 남겼다.
이 사진은 보은 고택의 문화 해설사인
류재관 선생이 나에게 제공해 준 사진이다.

 

선병국사진.jpg


(선정훈~! 자는 우현 ( 友鉉  )이고 호는 남헌(南軒 )이다.
아마 정훈은 족보명이고, 본명은 우현(友鉉)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동생들인 준훈과 동훈의 자(字)가
각각 낙현, 덕현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의
본명도 준훈은 낙현(樂鉉),  동훈은 덕현(德鉉)일 것이다.
선정훈은 고종 무자년인  1888년, 음력으로 3월 14일에 출생했다.


부친 선영홍의 나이는 그 때 28세였다.
그는 거인 지사형의 걸출한 인물이었다.
지력이 총명하여 비범했다.
그리고 부모에게 효도했고 형재간에 우애도 있었다.
그는 멀리 장시간 날려고 하는
봉황의 기상을 지녔었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더욱 큰 가산으로 늘렸다.
충북 보은 하개리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을 최상의 즐거움으로 알았다.
친구와 손님도 많아서 언제나 이들을
초대할 때는  시와 술로서 잘 접대하였다.


 또한 관선재를 건립하여 훌륭한 선생들을
초빙하여 많은 인재를 육성했다. 
모든 비용은 본인이 부담하였다.
말하자면 무료 사립 기숙 학교를 운영했다.
그리고 전남 보성에 있는 오충사 사당  건물을
복원하는데도 거금을 기부했다.


그리고 실전 상태에 있는 중시조 참판공의
묘소를 찾는데도 헌신적인 노력을 경주했다.
엣 족보들을 섭렵하여 경기도 탑립동에
매몰 상태에 있는 선조의 묘지에서
문인석과 묘비를 발굴하여 새로 단장했다.


그는 일생을 성실하게 살아 온 분이다.
1903년 계묘년 음력으로 3월 18일에 타계했다.
묘소는 보은 하개리에 있다.


▲   그 의 첫부인은 김해김씨 김지현의 딸이다.
▲   둘째 부인은 함양조씨 조창규의 딸이다.
        1899년 출생이고 신축년이 타계했다.
▲    셋째부인은 문화유씨 유흥신의 딸이다.
          1908년 출생했고, 술신년에 타계했다.
▲    넷째부인은 초계변씨이고 1902년에 출생했고,
         술신년에 타계했다.
 ▲    다섯째 부인은 한양조씨이며,
         1907년에 출생했고, 정미년에 타계했다.


당시 부자들이나 양반들은 부인이
3~5명은 보통이었다.
그 당시는 재력이 있는한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자손이 많은 것은 가문을 융성시키는데
커다란 인적 자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선정훈은 부인이 많아서 족보에만도
무려 14명의 아들들을 기록시켰다.
병우, 병국, 병준, 병진, 병곤, 병한, 병윤,
병규, 병칠, 병돈, 병구,  병식,
병헌,  병하가 그들이다.
내가 만나보았던 선병한 선생은
바로 선정훈의 여섯번째 아들이다.

 


◆   선영홍은 혹시 동학사상이나 정감록 등
      십승지에 대한 믿음 때문에
      전남 고흥 섬에서 충북 속리산 인근 보은으로
      이주를 간 것은 아닐까?


선영홍이 17세인 아들 정훈이를 대리고
한반도 남단에 있는 금산 섬에서
한반도 중심부에 박혀잇는 속리산 근처의 
충북 보은으로 이주를 해 온 것은 1904년이다.
그의 나이는 40대 중반을 접어들던 때였다.
그 때 그는 네 아들을 두고 있었다.
장남인 영훈을 비롯해서 11세인 남훈,
4세인 준훈, 갓 돌을 지난 막내 동훈이 있었다.


아들 중에서 둘짼가 셋째는 고흥에 두고 왔다는
설도 있는데 왜 남겨 두고 왔을까?
장남은 왠만큼 다 컸지만
만약 다른 세 아들은 아직 어린이들인데
이런 어린 식솔들도 다  이끌고 이주를
딘행해야만 했던 것은 그가 애써 모은 재산과
그 재산 보다 귀중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서 였을까?


선영홍의 꿈에 한 신선이 나타나서
빨리 이사를 가라고 한 것을 에삿일로
보지 않고 이주 결행을 한 것은
당시 불안한 국내외 정세 속에
부유층에게 절실하게 느끼게 했다는
<경물 중생>의 풍조 때문이었을까?


하기야 1900~1910년대는 개화의 물결과 함께 시국이 어수선했다.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의병을 가장한 폭도들도 횡행했었다.
더구나 고흥 해안일대는 대마도에서 온 왜구들의 약탈도 있었다.


당시 고흥 부지들은 유교나 도가, 동학사상, 정감록,
그리고  풍수도참설에  빠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선영홍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사를 가라는
한 신선의 현몽 꿈을 꾸고 보은행 이주를 결행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정감록에 나오는
난세에 유토피아의 땅, 이른 바
한반도에 숨어 있는  십승지의 하나인
속리산 근처의 보은을 보고 바로 이곳이다 하고
판단되어 그렇게 빠른  결단을 하게 된 것일까?
아무튼 선영홍 일가의 보은으로의 이주를
이해하기 위하여 이른바 <10승지>를
먼저 알아 보기로 한다.


십승지의 위치에 관해 『정감록』의 「감결」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으로 소개하고 있다.
“몸을 보전할 땅이 열 곳이 있으니,
풍기 금계촌, 안동 화곡, 개령 용궁, 가야, 단춘,
공주 정산 마곡 진천, 목천, 봉화, 운봉 두류산, 태백으로
길이 살 수 있는 땅이다.”

 

이어서 열 곳 승지의 구체적인 지리적 위치는
다음과 같이 적시하고 있다..
일단 흥미꺼리로 여기에 소개해 본다.
 
“   ▲   첫째는 풍기 차암 금계촌으로
       소백산 두 물골 사이의 장소이다.
   ▲   둘째는 화산 소령 고기로 청양현에 있는데,
           봉화 동쪽 마을로 넘어 들어간 곳이다.
    ▲  셋째는 보은 속리산 증항 근처로,
         난리를 만나 몸을 숨기면 만에 하나도 다치지 않을 곳이다.
    ▲  넷째는 운봉 행촌이다.
    ▲  다섯째는 예천 금당실로
          이 땅에는 난리의 해가 미치지 않을 곳이다.
    그러나 이곳에 임금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   여섯째는 공주 계룡산으로
          유구 마곡의 두 물골의 둘레가 2백리나 되므로 난을 피할 수 있는 곳이다. 
    ▲  일곱째는 영월 정동쪽 상류로
         난을 피해 종적을 감출만한 곳이다. 
    ▲  여덟째는 무주 무봉산 동쪽으로
           계곡마다  피난 못할 곳이 없을 정도로 좋은 곳이다. 
    ▲  아홉째는 부안 호암 아래가 은거하기 좋은 곳이다.
    ▲  열째는 합천 가야산 만수봉으로
             그 둘레가 2백리나 되어 영원히 몸을 보전할 수 있는 곳이다.
             정선현 상원산 계룡봉 역시 난을 피할 만한 곳이다.”
 

 


아무튼 십승지는 전란이나 난시에  
몸을 보전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을 잘 갖춘 곳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후기에 십승지라는
이상향의 담론이 형성된 사회적 배경은
국내외의 전란 및 정치적 혼란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선영홍도 자신과 가족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하기 위하여  현재의 고택 자리가
연화부수형의 먕당으로 믿고  택했다고 전한다.
금산이라는 섬에서 살았던 선영홍이
산속에서도 하천의 물 속에 자리잡은 곳은
바로 물이 주위를 애워싼
연꽃같이 생긴 연화부수형의 섬같은 집터였다..

 

영화부수형.png

 

선영홍이 잡은 연화부수형의 집터 (주변이 겹겹의 꽃잎같은 산 줄기들)

선영홍은 정감록이나 풍수도참설 등을 크게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란 부자가 되어 재산이 많아지면 이를
후대까지 상속시켜서  부를 대를 이어  유지코자 갈망한다.
이런 갈망은 선조들이나 자신의 묘 자리가 명당에 들어서면
더 큰 발복이 있을 것으로 믿는 과대망상에 빠지게 만든다.


선영홍은 현세에서 가족의  안전과 재산을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예지몽적인 꿈도 믿었고,
풍수명관의 말도 너무 쉽게 따랐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고흥 섬에서 충북 속리산 근처인
연화부수형의 명당 집터를 찾아 쉽게  이사를 왔고,
죽어서는 후손들에게 더 큰 발복을 원해서
충북 보은 집에서 몇 백리나 떨어진
충남 서천군 종천면에 묘지를 잡고 그곳에서
영면의 쉼터를 마련했다.

 


◆ 선영홍의 묘지인 충남 서천군 종천면은 

과연 풍수지리적으로 어떤 곳이었길래~~?


일찌기 조선시대의 대 풍수지리학가인
토함 이지함은 바로 서천 종천면 부근이
조선에서 가장 손 꼽히는 명당 자리가 있다도
말한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존경했던 목은 이색의
묘지도 바로 서천군 가사면에다 잡아 주었다.
아마도 선영홍도 풍수지리를 잘 아는 지관으로부터
토함 이지함의 서천 명당설도 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선영홍은 생전이나 사후에나
재산 보존을 위해서 또는 대를 이어 발복을 받도록
풍수설에 의존하고 싶어하는
일종의  운명론자였는지도 모르겠다.
 


◆   동학농민전쟁의 여파는
      선영홍을 고흥 섬에서 충북 속리산 보은으로
      이주하는데 영향을 주었을까?


동학은 선영홍이 출생하기 바로 1년 전인
1860년 최제우가  유불선을 종합하여 창시한
민족주의가 매우 강한 종교였다.
그럼 우선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배경부터 살펴 본다.
 

1894년 호남지방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반봉건(反封建)이고,
반침략(反侵略) 투쟁의 성격이 강했다.
 
그 때의 동학 농민전쟁의 경과는 크게 보아
이렇게 4 단계로 진행되었다.
①고부민란(古阜民亂),
②제1차 봉기,
③집강소(執綱所) 시기,
④제2차 봉기의 4단계로 나누어진다.
 
특히 고부민란은 1894년 1월 10일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난,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항의하는 민란이었는데, 사실 이 민란은
그 이전의 단순한 민란과는 달랐다.
그래서 후세 사학자들은 <동학혁명 > 또는
<동학농민전쟁>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농민혁명을 꿈꾸어 오던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과
그의 동지들에 의하여 농민전쟁은 어떤 면에서는
  계획적으로 일어난 봉기였다.
 
그러나 민란 발생 이후 고부의 농민들은
전봉준 등 지도자들의 농민전쟁에로의 확대계획에
반대하여 일단 해산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무장(茂長)의 동학접주
손화중(孫和中)을 찾아가 그를 설득하여
전라도 일대의 동학교도들이 일제히 봉기토록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동학 농미들의 봉기이다.
 

그해 3월 21일 고부 백산에 모인 동학 농민군들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높이 걸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투쟁목표가 민씨 정권 타도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동학 농민군은 4월에 들어서 황토현(黃土峴) 전투와
장성(長城) 전투에서 관군에 승리였고, 드디어 
28일 전주성(全州城)에도 입성하였다.
 
이에 매판적인 민씨 정권은 당황하여
청에 출병을 요청했고, 5월 5일에는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에은 일본 군대가 한반도를
장악 통치하려는 여욕을 품고 인천에 상륙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전봉준 등 농민군 진영은
관군과 화약을 맺고 전주성을 나와
일단 해산하였다.  (5월 7일).
그러나 농민군이 완전히 무장을 해제하고
해산한 것은 아니었다. 전주성에 있던 농민군은
무장을 한 채 전라도 각지로 흩어져,
전라도는 사실상 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가있었다.
그 때 물론 고흥도 돌산도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농민군들은 여타 군현에도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농민군 자신들의 기강도 바로  잡는 한편,
각 집강소를 농민군의 임시행정기관으로도 사용함으로써
전라도 일대에는 사실상 농민혁명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는 동안 6월 21일 일본군은
왕궁을 강제 점령하여 민씨 정권을 붕괴시키고
친일 개화파 정권을  내세웠다.
농민군은 이에 추수가 끝날 때까지를 기다렸다가
그 해 10월 마침내 반일(反日)의 기치를 높이 걸고
반침략투쟁을 개시하였다.
이것이 바로  제2차 봉기이다.
 
그러나 2만여 농민군 주력부대는
20일간에 걸친 공주(公州) 혈전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끝내  무참하게 패배하고 만다.
이후 농민군은 논산, 금구 전투에서
최후의 항전을 해 보았으나 무위로 끝났고,
전봉준은 순창(淳昌)에서 체포되고
마침내 참수된다..
 
농민군이 패퇴하자 양반ㆍ유생ㆍ부호층들은
의병ㆍ민포군(民包軍) 등을 조직하여,
패주하는 농민군을 일일이 색출하여 마음대로 학살하였다.
이 점은 집강소 시기에 농민군이 양반ㆍ유생ㆍ부호들을
전혀 살해하지 않았던 점과 대비된다.
 
농민전쟁에 참여한 계층은 주로 빈농ㆍ농촌노동자ㆍ
동시잡업노동자ㆍ영세수공업자ㆍ영세상인 등이었고,
일부 중농ㆍ부농이 합세하였다.
 
그러나 부농ㆍ중농층은 어디까지나
 기회주의 적인 참여였고,
농민군의 주력은 빈농층에 있었다.
이들 빈농층은 당시 전봉준 등
혁명적 지식인의 지도하에 결집하여
농민전쟁을 일관하게 주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계층으로 구성된 농민군들은
우선 경제적으로는, 삼정(三政) 등
봉건적 수취체제의 폐단을 시정하여
농민 경제의 자립성을 도모할 것,
봉건적 토지소유관계인 지주제(地主制)을 철폐하고
농민적 토지소유를 실현할 것,
농촌 소상인에 대한 봉건지배층의 수탈과
외국상인들의 상권(商權) 침해를 제거할 것,
외국무역을 통한 영세수공업자ㆍ
영세농민들의 몰락을 제거할 것 등을  요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농민전쟁 지도급 인사들은  평민과 천민의 신분해방,
양반신분의 폐지, 향촌사회에서의
농민자치의 실현 등을 주장했다.
.집강소 시기 농민군은 사실상 이런 요망 사항들을
대부분  실천하려고 했다. 그리고 흔히 논의되는 것처럼
신분제의 폐지는 개화파 정권에 의해
법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농민군 스스로 투쟁으로 쟁취하려고 했다.
     또 대외적으로는 일본을 비롯한
외래침략세력에 대하여 맹렬히 저항하려고 했다.
그래서 전라도 53개 군현애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어떤 곳은 면 단위, 마을 단위까지 집강소가 있었다.
무론 고흥 지역에도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특히 섬인 금산면에도 집강소가 있었으며,
집강소 총 책임자를 집강이라 불렀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겠다는
야심을 품고 군대를 파견했었는데,
농민군은 그 같은 일본의 침략 야욕에
강력한 반발을 보였다.
 
동학 농민전쟁과 관련하여 당시 고흥 상황도
이왕 언급된 김에 좀 더 살펴 보겠다.
 
고흥에서는 1차 봉기 때에
정영순, 송년호, 구기서 3인이 고흥출신
농민들 3000여명을 이끌고 동학군에 합류하였다고 한다.
상세한 기록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김개남이 이끄는 5만 군대와 함께
삼례 전투에 참가하여 대부분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고흥 농민군 지도자들도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희도 지도자는 선봉장으로 싸웠는데,
고흥에 돌아와서 붙잡혀 효수당했다고 한다.
 

 


선영홍이 금산에서 거주할 때
고흥지역의 동학농민군 활동


동학농민전쟁은 전라도에서 발발하였다는 것은
이미 언급하였다..
전주를 비롯한 전라도 53개 고을이
모두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가 농민의 자치가 이루어졌다.
이는 우리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었다..
 
왜 전라도 지방에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는지
그 전개과정은 어떠하였는지 여기에 정리해 본다.
 
전라도는 3남 지방에서도 가장 중요한 곡창지대다.
그런데 탐관오리들이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았던 곳이었다.
또 정부에서 백성에 대한 황무지 개간을 독려하기 위해
균전사를 파견하거나 조세운반을 맡은 전운사가 파견되었으나
균전사와 전운사는 수시로 백성을 억압하고 수탈해 갔다.
게다가 수세와 대동미에 대한
부당한 징수가 곳곳에서 발생했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의 탐학과
가렴주구에 짓눌려 있던 고부 군민들이 드디어
1894년 항거하였다
이것을 역사는 고부민란이라 부른다.
. 고부지역의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조병갑의 부정과 비행으로 인해
나타난 폐해를 바로잡아 달라고
감영에 여러차례 호소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에 고부지방의 농민들은 전봉준과 함께
고부관아를 습격했다. 그리고  조세장부를 불사르고
감옥에 있던 죄없는 사람들을 석방시켰다.
 
이 때  양곡 1000여석을 몰수하여 조병갑에게
곡식을 억울하게 빼앗긴 농민들에게모조리 돌려주었다.
고부지방민들에게 원망의 대상이던
 만석보를도 여지없이 파괴해 버렸다.
조병갑은 이미줄 행랑치며  도망가고 없었다.
조정에서는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파견하여
고부지방의 민심을 수습하려고 시도하였다.
 
바로 이 때 녹두장군 전봉준은 백산으로 거처를 옮긴 후
고부지방의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고부지방의 봉기를 조사하러 온 안핵사 이용태는라는 자는
수습은 커녕, 오히려 봉기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에게 돌리고 , 그들을 동비로 매도하고,
죄없는 백성까지 동학교도로 몰아
이들을 수탈하고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이용태의 만행을 지켜본 전봉준은
1894년 3월 손화중 김개남 등과
무장에서 봉기를 결행하게 된 것이다.
역사는 이를 제1차 농민봉기라고 부른다.
 
이어 전봉준은 보국안민을 이웃 주민들에게 호소하고
또 동학접주에게 통문을 보내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전봉준은 4000여 농민군을 이끌고 백산으로 갔다.
금구, 부안, 고창 등의 농민군들도 백산에 집결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만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농민군은
자치기구인 호남창의소를 설치하고 전봉준을 창의대장,
손화중 김개남을 총관령으로 추대하였다.
 
전봉준이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백산에 물러나
각 지방에 격문을 발송하였을 때
고흥지방에서도 동학의 조직이 갖추어졌다.
고흥의 대접주는  류희도(柳希道)였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고흥 농미들에게 고하는
포고문을 작성하였다.
 
고흥지방 동학포고문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은 인륜(人倫)이요,
군신 부자의 관계는 인륜에서도 큰 것이라,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정직해야
나라가 되고 부자자효(父慈子孝)해야 집안이 되어
무궁한 복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느나!.
 
지금 우리 성상(聖上)은 인효자애(仁孝慈愛)하시고
신명성예(神明聖睿)하시니
만일 정직한 신하가 익찬좌명(翼贊左明)하면
요순(堯舜)의 교화와 문경(文景)의 치(治)를
미구에 바라볼 수 있겠거늘
오늘의 조신들은 보국을 생각치 않고
녹위(祿位)를 도적질하며 성상의 총명을 가리고
아첨을 일삼아 충간(忠諫)의 선비는
간언(奸言)이라 배척하고
정직한 사람은 비도(匪徒)라 트집잡아
안으로는 보국의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학민(虐民)의 관료(官僚)만이 늘어가니
인심은 갈수록 변하여 들어 앉아도
낙생(樂生)의 업이 없고 나서도 보신(保身)의
계책이 없도다.
 
학정은 날로 심하여 원성(怨聲)은 잇달아 일어나고
군신(君臣)의 의(義)와 부자(父子)의 윤(倫)과
상하의 분(分)은 따라서 남아나지를 못하니
관자(管子)가 이르기를 사유(四維)가 바로 잡히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으니
방금의 형세는 그 옛날보다 심하도다.
 
공경(公卿)이하로 방백수령(方伯守令)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기는 생각치 않고
내몸, 내집을 살찌게 할 계책에만 급급하여
벼슬 뽑는 문은 생화(生貨)의 길로 되고
과거(科擧)보다 마음은 교역(交易)의 저자(市)가 되어
허다한 화뢰(貨賂)는 국고에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사장(私藏)에 충당되어 나라에는
누채(累債)가 있어도 갚을 생각은 없고
교치(驕侈)와 음일(淫佚)두려울 줄 모르나니
한심하도다. 
 
팔도(八道)는 어육(魚肉)이 되고
만민은 도탄에 빠져 있다. 수
령(守令)의 탐학(貪虐) 때문에 백성이 곤궁을 면치 못하니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근본이 허약하면 나라가 쇠잔해지는
법이 아니겠느뇨?.
 
보국안민의 방책을 생각치 아니하고
오직 향저(鄕邸)를 두어 혼자 잘 살기만 도모하고
녹위(祿位)를 도적질 하니 어찌 그럴 수가 있으랴.
 
우리 일당은 비록 초야(草野)의 유민이나
나라의 땅으로 먹고 살고
나라의 옷을 입고 국가위망(國家危亡)을 좌시할 수 없어
팔로(八路)가 마음을 함께 하고
억조(億兆)가 의논을 거듭하여
이에 의기(義旗)를 들고 보국과 안민을 사생으로 맹세하노라.
 
오늘의 광경이 비록 놀라운 일이라 하나
결코 공동(恐動)하지 말고 각기 생업에 안온(安穩)하여
함께 태평일월을 축하하여 다 함께 성화(聖化)의 은택을
입게 되면 천만 행심으로 아노라.
 
위의 포고문(布告文)은 전봉준, 손화중(孫華仲),
김개남(金開南) 등이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의 이름으로 발표하고
고부성을 함락한 창의문을 약간씩 바꾼 것이다.
 
위의 포고문은 고흥의 요소 요소에 첨부 하였고,
또는 각읍(各邑)에도 발송되었다.
 
고흥의 남부방면인 포두면 봉림리 들판과
도양읍 관리의 산간에 있는 양조련장(兩操鍊場)에서는
군사훈련을 맹렬히 실시하는 등
동학군의 활동과 기세는 충천했다  한다.
 
한편 전봉준의 통문이 각지의 접주에게 전달되자
38개 지역에서 농민군이 전북의 백산성(白山城)으로 나아갔다.
고흥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흥(당시 흥양)에서는 유희도(柳希道),
구기서(具起瑞), 송년호(宋年浩), 정영순(丁永詢) 등 4인이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전북의 백산성으로 진군하였다.
이들이 고흥지방의 동학농민전쟁의 의병대장들, 즉 장령(將領)들이었다.
 
당시 고흥에서 출발한 류희도 장령 등의 진로는
고흥에서 아마도 보성, 화순, 광주, 장성의 경로를
거쳐서 전봉준과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들과
합세하였을  것이다.
 
전봉준은 농민군을 이끌고 백산을 떠난 후
태인을 거쳐 금구 원평에 진을 쳤다.
정부는 농민군의 봉기 소식을 듣고서
장위영 정령관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였다.
 
홍계훈은 경군 800명을 이끌고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군산을 거쳐 전주에 들어갔다.
한편 홍계훈이 이끈 경군보다 앞서
전라관찰사 김문현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부안방면으로 감영군을 파견하였다.
감영군은 황토현에서 동학농민군을 맞아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황토현의 승리는 동학농민군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이제까지 지방관의 지배를 받아 순응해왔던 농민군에게
비록 지방군일지언정 관군을 맞아 격퇴하였다는 것은
큰 성공이자 자신감이었다.
농민군은 황토현에서 승리한 당일 정읍에 들어가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약탈하고 죄인을 석방하였다.
이어서 농민군은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을 점령하고
이속 군교를 처형하였다. 정부는 증원군을 파견하고
홍계훈도 전주를 출발하여 남쪽으로 향하였다.
 
유희도, 구기서, 송년호, 정영순 등 4인
장령이 인솔한  약 3000명의 고흥 동학군들은
역시 장성에 도착한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와
인근지역에서 활약중인 주변 부대와 합세하였다.
농민군의 일부는 전봉준 장군의 지휘하에
수련산(水蓮山)의 지맥인 추산(楸山)에 자리잡아
주위의 산록(山麓)에 매복하였다.
 
또 일부 병력은 월평(月坪) 근교(近郊)의 구장터
김요택(金堯宅: 당시 만석부자)에서
점심을 시켜 먹으면서 관군을 유인했다.
 
이학승(李學承)이 이끈 관군의 선발부대는
함평에서 장성으로 들어오는 길을 따라 진군하여
황룡강변에서 월평의 황룡장터에 있는
동학군을 보고 대포를 쏘면서 공격해 갔다.
 
이에 장터의 동학군이 일제히 반격하여
육박하자 관군은 길을 따라 퇴각하였다.
 
관군이 까치골 능선에 이르렀을 때
사방에 매복한 동학농민군이 일제히 공격하였다.
특히 까치골 능선에 매복한 동학군은
미리 준비한 대나무로 만든
장태(장흥 접주(長興 接主) 이방언(李邦彦)이 고안 제작)를
이용하여 관군을 공격하였다.
이에 미쳐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관군은 농민군에게 참살을 당하여 대패(大敗)했다.
 
황룡전투는 동학농민군이 관군 중에서도
가장 정예부대요, 최신식무기로 무장한 경군(京軍)을 대파하여
2문(門)의 대포와 백여정의 양총(洋銃)을 노획하여
동학농민군의 전력을 강화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오합지졸(烏合之卒)에 불과한
동학군이 경군을 최초로 격파함으로써
동학군의 사기가 충천했고
앞으로의 전세를 결정해 주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장성에서 경군을 격파한 동학농민군의 주력은
4월 28일 날이 밝자 전주성(全州城)을 일제히 공격하니
전라감사 김문현과 민영승(閔泳昇)은 도망가고
미쳐 피하지 못한 이서(吏胥)와
군교(軍校)가 남아서 상당히 살해당했다.
 
한편 홍계훈의 경군은 장성 황룡촌의 패잔병을 수습하여
급히 전주로 향한 동학농민군을 추격하였다.
홍계훈은 전주성이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병력을 남완산(南完山)에 집결시키고
전주성에 대포를 발사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도 반격을 가하여
서로 간에 사상자가 나왔다.
 
한편 전주성 함락의 소식에 접한 중앙정부는
경악과 공포의 초조감에서 청(淸)에 원군(援軍)요청을 서둘렀다.
정부의 외국원병요청은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이
동학군의 성세, 정부의 병력부족 등을 알려
그 자신이 동학군을 쉽게 토벌하지 못한 변명을 하는
내용의 장계(狀啓)를 써서 정부가 청군의 원병을
요청할 것을 건의한데 따른 것이었다.
 
그 후 무능하고 무정견한 집권양반들은
경군의 패보를 접하자 청병문제를 논의하였으나 일단 보류하였다.
그대신 정부는 내란 진정의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을 골라 파견하여 내정을 숙청하고
난군의 귀화를 도모하기로 하였다.
 
첫째, 민(民)이 본인데 민은 토벌할 수 없다.
둘째, 외병(外兵)이 오면 여러 폐단이 수반된다.
셋째, 외병이 오면 각국 공사(公使)가 출병할 것이다.
 
위의 주장은 원임재상(原任宰相) 김병시(金炳始) 등의 주장으로
사리에 합당하여 채택되었으나
사태가 심각해지자 강경론이 우세하여져 갔다.
전주함락의 충격에 접한 중앙 정계에서는
권신(權臣) 민영준(閔泳駿)과 청(淸)의 원세개(袁世凱)가 빈번히 접촉하였다.
 
원세개는 관군의 패보가 계속 들어오자
민영준에게 "나로 하여금 용병하게 하면
5일 이내에 토평하겠다"고 장담하면서
차병요구를 은근히 기대하였다.
 
이에 정부는 중신들의 회의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였다.
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병이 불가하니
차병없이 원세개를 파견, 그에게
지휘작전권을 넘겨주려는 뜻을 밝혔고
민영준이 이 뜻을 원세개에게 전하였으나
원세개는 이를 거절하였다.
 
4월 29일 중신회의에서 왕은 청(淸)의 간섭이 싫지만
초미(焦眉)의 위급함을 구할 방법으로
청에 원병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왕은 4월 30일 외무독변(外務督辨)
조병직(趙秉稷)을 시켜 원세개에게 조회하여
차병대초(借兵代剿: 군대를 빌어 대신 토벌함)를 청원했다.
 
한편 민영준은 청군의 파견 요청이 중차대한 일이라 생각하고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김병시에게 그 의견을 타진하였다.
김병시는 비도(匪徒)가 다 우리 백성인데 청국 병사를 빌려다
우리 백성을 토벌한다는 것은 말이 아니며
일본의 동향도 걱정된다고 하면서 반대의 뜻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차병대초(借兵代剿)의 외교 교섭은 이미 급진전을 보였다.
이것은 민비의 재촉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청(淸)의 원세개가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차병대초의 조회문을 접수한 원세개는
바로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에게 전보로 보고하니
5월 1일 이홍장은 청조정(淸朝庭)의 결재를 받아
그 날로 청의 군함(軍艦)을 정여창(丁汝昌)에게
1500명을 주어 아산(牙山)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5월 3일에는 주일공사 왕봉조(旺鳳藻)를 시켜
일본정부에 이 사실을 알리게 했다.
 
일본은 청(淸)이 군대를 파견하자
이를 계기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정부는 일본의 파병을 저지해보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조선 진출의 기회만을 노리던 일본의 출병을 그만두게 할 수는 없었다.
 
이로부터 양군은 계속 조선에 출병했으니
청일(淸日)의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전주를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처음 내세웠던 기치(旗幟)처럼
군병을 몰고 서울에 들어가서 권신귀족들을
모두 없애고 새로운 정치를 펼 수 있는가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뜻밖의 아산지역(牙山地域)에 출동한 청군과
서울 근교에 자리잡은 일본군의 대규모 병력이 그
들의 구병입경(驅兵入京)을 좌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바로 잡으려는 조국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 몰아 넣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당시의 국내의 정세에 따라
관군과 동학농민군은 휴전을 서둘렀다.
전라도의 치안유지와 제반시정은 동학의 긴밀한 협조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보아 정부와 동학
 
농민군 사이에 전주조약(全州條約)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20여간부를 데리고 열읍을 순행했고
포교권(布敎權)을 획득하게 되었다.
 
또 6월에는 관찰사가 전봉준을 초청하여
관민상합(官民相合)의 책(策)을 상의하고
혁명정치를 담당하는 집강소(執綱所)를 53군에 설치하도록 했다.
 
전주감사 김학진(金鶴鎭)과 동학군의 지도자 전봉준은
조국존망의 위기에 처하여 도정을 상의했으며
혁명정권인 집강소의 설치를 통해 관민이
협력할 수 있도록 하여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고흥지방에도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집강소는 일종의 민정개혁상설기관이었다.
집강소는 장인 집강(執綱) 밑에
서기(書記) 성찰(省察) 집사(執事) 동몽(童蒙) 등의
임원을 두어 행정사무를 분담케 하였다.
 
전주에 총본부인 대도소(大都所)를 설치하여
각지의 집강소를 지휘토록 하였다.
각 군현의 집강소는 통일된 지침에 따라
개혁작업이 전개된 것이 아니라
각 지방의 사정에 따른 폐정을 개혁하였다.
 
집강소는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전라도 지역을 압도하고
관의 명령이 시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각지의 동학농민군이 지방통치권을 장악하고
독자적 활동을 전개한 중심기관이었다.
따라서 집강소는 동학농민군이 정부에 제시한
12개조의 폐정개혁안을 추진하였다.
고흥지방에서도 농민군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폐정개혁이 추진되었을 것이다.
 
① 동학교도와 정부는 쌓인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②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③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⑤ 노비문서는 소각한다.
⑥ 칠반천인(七班賤人)의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白丁)의 평양립(平凉笠)을 없앤다.
⑦ 청상과부는 개가를 허락한다.
⑧ 무명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⑨ 관리의 채용은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⑩ 왜(倭)와 내통하는 자를 엄징한다.
⑪ 공사채(公社債)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한다.
⑫ 토지는 평균(平均)하여 분작(分作)한다.
 

이와 같이 농민군은 토지를
평균 분작하기 위하여 양안이 소각되고
작인들에 의해 소작료 납부 거부운동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또 향촌사회에서 반상(班常)을 구별하는
모든 관행이 부정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노비와 백정 등에 의해 천민신분층의
신분해방운동이 전개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과정에서 양반을 중심으로 한
지배층과 농민층 이하의 하층민들 사이에 마찰이
끊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집강소의 설치를 통한 농민군의 향촌지배는
조선 후기 성장한 농민의 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향촌자치질서의 민중중심의 재편이었다.
 
농민군은 전라도 일대를 장악함으로써
정부에 대하여 큰 군사적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농민군의 승리를 계기로 항쟁의 불길은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정부는 동학소요의 평정을 들어
청·일 양국에게 공동 철병을 요구했고
미국공사에게 사정하여 외교사절단의
이름으로 철병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갑신정변 이후
약화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위의 열세를 만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기 위하여 조선 정부의 요청을 묵살하였다.
오히려 일본은 청일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개혁을 단행하자고 제의하였다.
 
더욱 일본은 내정개혁 강령 5개안을 제시하고
수락여부를 하루만에 응답해 달라고 협박했다.
이렇게 노골적인 침략야욕을 가진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6월 21일에
경복궁을 침입하여 우리 수비병을 축출하고
궁궐과 4개 출입문을 장악했다.
그리고는 6월 23일 청국 군함을 포격하여 격침시키고
실질적인 전쟁에 들어갔다.
 
처음부터 청군은 장비나 병력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고 전쟁의사가 없었던 육해군이
패멸상태에 빠지게 되자 일본은 승세를 이용하여
더욱 노골적으로 조선의 정국을 간섭했다.

 


  선영홍이 금산 거주할 때 
고흥 동학농민군의 재봉기 상황

 
본래부터 척왜(斥倭)를 부르짖던 동학군은
이러한 상황(혹은 일본의 침략야욕)을 묵과할 수 없었다.
추수가 되기를 기다린 동학군은
9월 중순 일제히 봉기하여 구국항일의 대열에 섰으니
이것이 재봉기였다.
 
전봉준은 정주에서 궐기하고 손화중은 광주에서 봉기했다.
 
남원에 운집한 김개남 휘하의 군대 5만명에
고흥 동학군은  합세하였다. 


처음 제1차 봉기때
유희도를 위시한 송년호, 구기서, 정영순 장령들은
고흥지방에서 약 3천여명의 동학농민군을 모병하여
전봉준 산하에서 전라도의 고부, 태인, 부안, 금구,
고창, 무장, 나주, 함평, 무안, 영광, 장성 등의
각 읍을 점거하거나 혹은 접전을 거듭하면서 맹렬히 활약하였다.
 
고흥의 동학군은 전봉준이 지휘한 동학군과
관군이 서로 강화를 이루자 고흥으로 귀향하였다.
 
 
전주조약에 의하여 각 군(전라도 53개읍)에
집강소가 설치되자
유희도의 지휘를 받은 고흥의 동학군은
각 조련장(포두면 봉림리, 도양읍 관리)에서
군사훈련을 계속하였다.
 
 
청일전쟁 승리 후 일본의 침략적 야욕이 노골화되고
내정을 간섭하자
 
1894년 9월 유희도의 주도하에 다시 3000여명이 일어나
구국항일의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제2차 거병(擧兵)시 3천여군을 인솔한 유희도 중군은
삼례에 집결한 전봉준 주력부대에 가담하였다던 것이다. 
 
후방의 방위를 위하여 김개남 5만군을 광주에 주둔시켰다.
기록에는 송년호, 구기서, 정영순 등 3인 장령의
활동이 보이지 않고 있으나 이들도
유희도와 함께 기병하였다고 생각된다.
송년호, 구기서, 정영순은 동학농민군을 재편성하여
후방에 유진(留陣)한 김개남 군에 편입되었으리라 추정된다.
 
다만 고흥 장령들인  3인 구기서, 송년호, 정영순 등의
생사는 알 길이 없고 동학군의 패전으로
일본군과 관군이 구석구석 뒤졌을 때
참수(斬首)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제2차 기병(起兵)시 논산에 집결한 20만명의 군인 가운데
전봉준을 따라 공주 우금치에서 패전할 때
전봉준은 후방에 주둔한 김개남 5만군을
급거 삼례로 진군토록 하였다.


이때 구기서, 송년호, 정영순 영장들이
김개남 군을 따라 이곳에서 전사하였으리라 추정해 본다.
그 중 유희도 영장은 선봉장으로 싸우다가
고흥(흥양)에서 잡혀 효수(梟首)되었다.
당시 유희도 영장의 한이 서린 동요가
오늘날까지 구전되어 오고 있다.
 
복만아 복만아
니 군사 어데두고
잿당위에 니 홀로
쟁만 치고 있느냐 ~!

 

 
이밖에도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으나
다른 지방이나 산간지역에서 주소, 성명조차
남기지 못한채 죽어간 동학농민군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며
서리나 불량양반 토호 등에게
보복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것은 우리 역사에 큰 의의를 남겼고
그것이 끼친 영향 또한 컸다.
 
동학혁명운동이 우리 역사에 끼친 의의중
가장 뚜렷한 것은 민중이 역사의 표면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우매하고 항상 당하기만 하는 민중이 궐기하여
그들의 힘으로 나라를 바로 잡으려 한 것이다.
그것이 일본의 외세만 아니
었다면 충분히 달성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양같이 순한 농민이라 할지라도
죽음에 이를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충의가
만방에 과시됐다는 점이다.
 
이 동학도들의 시위와 절규가
그들 농민의 용기를 북돋았고
그들의 아픈데를 어루만지면서 자각시켰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의 일대전환을 가져온 동학농민운동을
바로 이 지방 민중이 중심이 되어 일으켰고
가장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는 것은
우리 고장의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역사를 창조하는 용기와 애국충정은
뒷날 의병항쟁의 주역이었던 점과 아울러
우리 고장 최근 역사의 빛나는 발자취였던 것이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본군 출신으로
동학군에 가담하여 관군에 체포되어
효수(梟首) 또는 전사한 분과 그들의 활동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특히 고흥관아 앞 거리에서
목이 베여서 효수되었던 고흥 동학군 대장
유희도 장령은 이런 애달픈 동요를
후세에 남기고 갔다.
다시 그 슬픈 동요를 반복해 서 옮겨 본다!
“ 복만아~!
  복만아~!
   니 군사 어데 두고 젯당 위
   니 홀로 징만 치고 있느냐~! “

 

<복만>이는 유희도의 본명이라고 한다.
고흥읍에서 <젯당>은 남계리 학림부락 지역을 말한다.
옛날에 그곳에 제를 모시는 사당이 있었는데
고흥 읍내 사람들은 고흥 사투리로  <지땅>이라고 불렀다.
옛 기록에 보면 제당 뒷산, 그러니까 현 고흥동초교와
경주이씨 세덕사의 뒤산을 <제당산>이라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유희도 농민군 대장은 고흥동초 뒷산 언덕에서
홀로 올라가 징을  치며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몰려 오는 왜놈들을
막아내지가 하며 의병 창의를 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제당산 바로 맞은편 산이 고흥의 명산인 봉황산이다.


고흥군 출신으로 동학군에 가담하여
관군에 체포되어 참수 당하거나 또는
전사한 사람들 중에서 기록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 유희도 ~~ 일명 유복만이다.
            고흥군에서동학군 최고 책임자인 도접주였다.
            고흥출신 동학군을 이끌고 가 정봉준 휘하에서 활약했다.
          고흥에 돌아 와서 븉잡혀 효수당했다.

 

▲~ ~ 정영순~~정두현의 아들이며 동학군의 대장으로
         전봉준 휘하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 ~구기서~~고흥군 농민군 대장으로 활약하다 전사했다.

 

▲~ ~송년호~~고흥군 농민군 대장으로 싸우다 전사했다.

 

▲~ ~정창도~~정의열의 아들이며 동학 농민군의 훈련장
        도양 관리마을에서 훈련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풀렸다.

 

▲~ ~오윤수~~오상권의 아들로 조련장을 확보하여
              궁마, 귱술, 사격 등 훈련을 실시한
             훈련대장으로 활약했다.
             감오경장 후 고흥 현청에서 체포되었다가
             포도대장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 ~신학구~~신정모의 아들로 조련장의 도집을 맡아
           군졸의 식량과 부식을 보급하는 등
           동학 농민군으로 황약했다.

 

▲~ ~신춘휴~~ 조련장에서 기마술을 훈련시켜는
            동학 농민군으로 활약했다.
     

 


◆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건은 선영홍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1885년 3월 1일 영국 군함 3척과 상선 2척이
당시 고흥에 속한 거문도에 상륙하고
그 후 2년간이나  불법 점령을 했다.

 

이를 한국 근대사에서는 <거문도 사건>이라 부른다.


이 때 무역 사업에 한창 재미를 붙이던
선영홍 청년 사업가는 나이가 열혈의 나이 25세였다.
무역이 생업인 선영홍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저 왔다.


당시 금산에는 정기 연락선은 없었지만
북쪽 해안에서는 녹동과 도양면이 지척 거리여서
뗏목 배를 노를 저어서 가도 1시간 가량이면
건너편 고흥 반도에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대부분 육지의 소식은 녹동 부두를 통해서
금산으로 오는 나룻배가 실어 왔다.
그러니 이번에는 금산섬 남쪽 해안 부둣가인
연소 부락에서 전해 왔다.


" 거문도에 큰 산만한 철갑선 3척인나 들오 왔다네~~"
하는 소식이었다.
이어서 그 배들은 영국 군함인데 영국 군인들이
많을 때는 6~700 명이나 섬으로 상륙해서
서양 과자, 케이크, 못 , 톱, 망치, 냄비도 공짜로 주고,
일을 시키면 삯으로 돈도 주고,  땅을 빌려써도
돈을 주고,  아주 친절한  양놈(?)들이라는 소문이 금산에 쫙 퍼졌다.


일부 청년 어부들은 무턱대고  어선을 몰고 거문도 쪽으로 향하여 몰고 가기도 했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희한한 소식들을 싣고 왔엇다.
정구장 이야기, 축구 차기, 그리고 거문도 처녀와 한 수병의 연애 이야기도 실려 왔다.


1886년 초 여름에 일어난 일이다.
어스름이 내려 앉아가던 초저녁에
두 척의 작은 보트가 20대 초반의 젊은
영국 해군 병사 12명을 싣고 본선 군함을 떠나
거문도 주막 거리에 상륙했다.


그곳에는 벌써 영국인을 상대로 돈벌이를 하려는
조선 상인들, 일본, 중국 상인들도 몰려 들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곽도 생겨나서 남해안 항구나 포구 마을에서
온 술 접대 아가씨나 유곽 여자들도 모여 들어 있었다.
속말로 영국 병사들은 님도 보고 뽕도 따로 가는 뱃길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돌풍을 만나고
 암초에 부딛쳐 배들이 둘 다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영국 젊은 해군들은 대부분 수영을 잘 해서
생명은 잃지 않았다.
그러나 경리를 담당했던 해군 한 명만이
익사를 하였다.
그는 사실 수영을 제일 잘 하는 수영선수였다.
그런데 하필 그만이 죽었을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는 돈 때문에 물에 빠자 죽었다 한다.
그는 경리 담당으로 술값과 유흥비 팁으로 주려고 양 호주머니에
은화와 은괴를 잔뜩 넣고 갔는데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 수영을 제대로 못하여
익사를 했다고 한다.


오 마이 갓~!!
시신은 며칠 후에 거문도 섬 사람들이 찾아다 주었다.
군함장은 그 시신을 찾아 준 섬 사람들에게 사례를 했다고 한다.
물론 함장은 다음날 부터 유곽을 폐쇠시켰다 한다.
아무튼 영국군인들은 거문도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잘 대해주어 2년 후에 영국군이
대마도를 철수할 때 무척 서운해 했다고 한다.


그들은 거문도에 있는 동안 학질이라기도 부르는
말라리 병에  특효가 있는 키네네 약 등 
여러 가지 서양 의약품도 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또 군함에 탑승해 온 의사들을 동원해서
거문도 주민들 중에 병든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도 해주고
치료도 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에 주둔하다가 사망하여
묻힌 영국 병사들의 무덤도 헤치지 않고
지금까지도 거문도 주민들은 잘 보호와 관리를
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거문도 주민들은 영국군이
거문도를 떠날 때 무척 서운해 했었다 한다.


이런 저런 영국 해군 주둔 관련 소식은
선영홍은 물론, 인근 금산 사람들 모두에게는 연일 화제꺼리였었다.
청년 무역상 선영홍은 중국 청나라 상인들을 통해서
이미 홍콩과 마카오에 대해서 들은 바가 많아서 큰 뉴스꺼리는 아니였다,


그런데 특히 영국이 거문도를 사서
 홍콩처럼 만든다는 소문도 있어
 이 고뭄멈은 선영홍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그렇게 되면 무역판을 더 크게 벌려서
큰 대상이 되어 보겠다는야심도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라고 하는 쏼라쏼라 말이
그에게는 너무나  어려워 큰 장사는 못하고,
 영어를 잘 하는 중국인 장사꾼을 시귀어서
양품을 먼저 수입하고, 잽싼 유통을 통해서  
이문을 빨리 챙기는 방법이라도
남보다 먼저  사전 연구해 보려고 몰두하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엄세영이라는 관리가
영국군 대표와 담판을 짓기 위해서
고흥을 거쳐 거문도에 왔다 갔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물결과 파도가 잔잔한 봄철에는 영국 해군이
 대여섯명 쯤  탄  통통배 똑닥선을 몰고 와서 
금산 앞 바다까지 바싹 다가 와서
물 속 깊이를 재어 가기도 했다.
유식한 사람들은 이런 행위가 바다 지도를 만들려는
측량이라고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 큰 배에는 대포가 수십개 있는데
전쟁을 시작해사 막 쏘아대면 금산같은 섬은 쪼개져서
물속에 금새 사라질거라는 소문도 들려왔다.


이런 소식을 들은 선영홍은 이제 먹고 살만큼
돈도 벌었는데 저런 배가 전쟁을 일으키면
그간 모은 재산이나 가족 생명도
유지하기가 어렵겠구나 하는
두려운 생각을 갖게 하였다.


 따라서 거문도 사건과 동학 농민 봉기 사건은
결과적으로 선영홍을 고흥 땅을 떠나서 빨리
충북 속리산이 있는 보은으로 이주를 가도록
결행을 하는데 간접적인 영향을 크게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  선영홍은 신분상승을 위해서 어떤 방법을 동원했나?

 


다음은 선영홍이 금산에서 살고 있을 때
수재, 태풍, 해일, 가믐 등으로
흉년이 되어 주민들이 식량이 부족으로 아사지경 일때마다 쌀, 보리, 조 등 수 백 가마니의 식량을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는 선행에 대해서 써 본다.


그리고 세금을 납입 못 한 경우에도 죄다 대납을 해주었다.
또 소금 생산을 위해서 갯뻘을 막는
제언 사업을 할 때 거금을 희사했다.
뿐만 아니라 조경사에도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적선에 대하여 금산면 유림들과
돌산군 유림들이 돌산군수에게 10여 번 이상
연서를 하여 선영홍의 적선 행위에 대해
표창을 해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를 참고로 요약 정리해 본다.


 ● (1) 1896년 10월 청원서 (병오년)
         청원 대표자 ~금산면 집강 및 각 마을 이장들
         연서자 명단 ~집강 최서옥, 이인협, 한남광, 박흥식 등


       청원 내용 ~ 금산면 어전리 거주
                       선형수의 선행사항 표창을 청원함,(선영홍의 본명이 선형수임)


가난한 사람을 많이 도와 주웠음..
주민 100가구의 호포세를 대납해 주었음.
     
 선영홍이 금산에서 거주시에
수재, 태풍, 해일, 가믐 등으로
흉년이 자주 들 때 마다 주민들이 식량이 부족으로 아사지경을 목격하고

쌀, 보리, 조 등 수 백가마니의 식량을 무료로 나누어 주었음.

 

그리고 세금을 납입 못 한 경우에도 죄다 대납을 해주었음..
또 소금 생산을 위해서 갯뻘을 막는 제언 사업을 할 때 거금을 희사했음..
뿐만 아니라 조경사에도 경제적 도움을 주었음..
이러한 적선에 대하여 금산면 유림들과
연서를 하여 선영홍의 적선 행위에 대해
표창을 해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함. 

 
● (2) 1896년 10월 청원서 (병오년)
청원자 대표 ~~금산면 어전리 김사현, 윤경하,김찬영
연서자 명단 ~~정성구, 윤학서, 김문화, 김사선, 오국선, 김덕현, 송자송, 노일선 등
청원 내용 ~ 어전리 선형수 선행 표창을 청원한다.(선형수는 선영홍의 본명임)
청원 내용은 상기 (1)과 유사함


● (3) 1900년 1월 청원서 (경자년)
~ 청원자 대표 ~~어전리 이장 김사현
~ 서명자 명단 ~~ 윤경서, 김찬영, 정두서, 오국선,김형숙, 김경효, 김세록 등
~ 청원 내용 ~~ 선영홍 단자(프로필) 소개 및 선행 표창 청원한다.
기타 내용 (1)과 유사함


● (4) 1900년 2월 청원서 (경자년)
~ 청원자 대표 ~~금산면 집강 양준봉
      (단 독) ~ (영서 명단 없음)
~ 청원 내용 ~~ 선영홍 단자 소개 및 선행 표창을 청원한다.
기타 내용 (1)과 유사함.


● (5) 1900년 2월 청원서 (경자년)
~ 청원자 대표~~금산면 어전리 김사현, 윤경하, 김찬영,, 김영유
~ 연서자 명단 ~~ 정성범, 윤학서, 김문화, 김사선, 이경선, 오국선, 김석찬, 김덕현,노일선 등
~청원 내용~ 선영홍의 선행을 표창하여 주길 청원함.


● (6) 1900년 3월 청원서 (경자년)
~ 청원자 대표~`김찬영, 김두열, 곽종성
~ 연서자 명단~ 도유사 김종호, 김정렬, 이지기.김흥옥, 최홍빈, 김남규 등
~ 청원 내용 ~~ 선영홍 선행 표창을 청원한,
기타 내용은 (1)과 유사함.


● (7) 1904년 3월 청원서 (갑진년)
~ 청원자 대표~~금산면 이기우, 박두옥, 최일봉, 이석우,김연호
~ 연서자 명단~ 최일표, 한넘옥, 박필형, 김태화, 김재희.

김길호, 김후근, 진영조, 김중조, 남상걸,이향석, 화용기, 이성칠, 황방현, 김창근 등
~ 청원 내용 ~~ 선영홍 선행 표창을 청원함.
기탸 내용은 (1)과 유사함,


● (8) 1904년 4월 청원서 (갑진년)
~ 청원자 대표~~ 돌산군 유생 김재윤, 주홍필, 강정호
~연서자 명단 ~~ 강태원, 우유인, 곽종성, 이종주, 박봉운,
조창규, 김재철, 김찬영, 강만수, 안창희,
정극삼, 김인성, 김상식, 이송오, 이승항,
김정식, 박봉승, 서상윤, 김동현, 박병규,
김정렬, 김상희, 안철환, 조순기, 임재규,
김상숙, 정태순, 여규준, 김인영, 박종지,
정양모, 곽종현, 김백현, 김재식, 장문혁 등
~ 청원 내용 ~~ 선영홍의 선행 표창을 청원함.
기타 내용 (1)과 유사함.


● (9) 1904년 12월 청원서 (갑진년)
~ 청원자 대표~~ 돌산군 유생 김재윤, 주홍필, 강처홍
~ 연서자 명단 ~ (8)의 연서자 명단과 동일
~ 청원 내용~~ 선영홍의 선행 표창을 청원한.
기타 내용 (1)과 유사함.


● (10) 1906년 5월 청원서 (병오년)
~ 청원자 대표~ 금산면 유생 이윤우
~ 연서자 명단~~ 김정호, 박봉옥, 양임봉, 최일봉, 이석우,
한남옥, 최일표, 김태화, 박윤빈, 박필형,
이향석, 김술근, 남상걸, 진영조, 장남희,김기호 등
~ 청원 내용 ~~ 선영홍의 선행 표창을 청원함.
기타 내용은 (1)과 유사함.


● (11) 1906년 6월 청원서 (병오년)
~ 청원자 대표~~ 돌산군 유생 이승환, 안창희, 김재륜
~ 연서자 명단~~ 곽종현, 이종주, 우유인, 김정렬, 김정식,
김찬영, 강만수, 김인식, 강처홍, 정극삼
곽종성, 임현주, 김동우, 이주영, 정양모,
정태순, 이송오, 박병규, 조순근, 강태원, 김재식, 이상포, 김익호 등
~ 청원 내용 ~~ 선영홍의 선행 표항을 청원함.
기타 내용 (1)과 유사함.
 
 


선영홍의 선행에 대해서 표창을 해 달라는
금산면 거주민의 유생들과 돌산군 거주민의 유생들은
위와 같이 유사한 청원 내용을 반복해서
돌산군수에게 제출했다.
 
금산을 떠나기 전에 6건,
금산을 떠났던 1904년에는 3건,
보은에 가 있을 때에는 2건으로
총 11회에 걸쳐서 청원서가 돌산군수에게 제출되었다.


아마도 이 청원서는 돌산군수를 통해서
정부당국(조정)에 전달되기를 바랬던 것으로 보인다.
 
청원서에서 선영홍의 벼슬 직위로
1904년 12월 청원서에는  <전 의관>으로,
1906년 5월 청원서에는 <비서감승>으로
호칭하고 있어, 최초의 1896년과 1900년의
청원서 6건은 행(현직) 벼슬이 아니라
증(신분 상승용) 벼슬을 받기 위함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말하자면 정부 당국이나 고위층이 <증> 벼슬을
이미 약속해 주고
그 증빙으로 향교의 유생들이나 주민들이 선행을
청원해 오면 벼슬 증서를 주었지 않나 상정해 본다.
 
조선 말기, 구한말에는 각 성씨마다
족보 만들기가 대 유행이었다.
종래에는 필사본 족보여서 대동보의 대량  발행은
거의 불가능했다. 재력이 있는 문중이나
명문 성씨는 겨우 목판으로 제한된 족보를
발행했었다.
그러나  철자의 인쇄술이 도입되자
손쉽게 보다 저렴하게 대량으로 족보를
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족보 자랑과 경쟁 시대가 되고보니
이제는 누구의 족보가 화려하느냐가 중시되었다.
동일 문중에서도 서로가  단자 내용을
화려하게 치장하려다 보니
서로가 조상의 높은 벼슬 명이 필요했다.
 
이 때 <증> 벼슬을 팔고 사는 행위도 유행햇다.
돈이 없으면 족보에 날조 도는 과장하여 벼슬을
기록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래서  족보상 선조의 벼슬과 관련하여
입증 자료, 교지나 증서, 또는 행장록 등을 요청하면,
임진왜란, 또는 병자호란, 기타 난리가나서,
또는 화재나 홍수로 분실되었다고 핑계를 대기도 했다.들
 
만일 과거에 급제 했다고 하면 <방목>에 있는
합격자 명단에 들어 있어야 확실하다.
그러나 그저 족보에 과거에 합격했다고 기록된
족보들이 상당이 많다.
 
만일 종 3품 이상 벼슬을 했다면
이조실록에 한 두번 이름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조 실록에 전혀 언급이 없는데
참판이나 판서, 도승지, 좌승지를 역임했다고
족보에 기록만 해둔 경우도 많다.
그래도 양심이 있으면 진짜 역임을 했다는
표시인 <행/行>을 쓰지 않고, 선행이나 업적이 있어서
사후에 추증을 받았다는 <증/贈>자를 벼슬 앞에 써 두웠다.
 
이런 경우는 일반인 신분에서 갑자가
부자가 되어 양반 행세를 하고 싶고,
후손들에게 뼈대있는 명문 가문임을 과시하고
싶은 가문은  특히 족보를 만들 때
신분 상승용 명목상의 벼슬 이름이
<증>자와 함께 활용 또는 도용하려고 했다.
 
나는 선영홍의 족보 단자에 
"과거 무과 합격,  행 참봉,
갑진년(1896년)에 <통정대부> 작위받음,
동부승지, 경연,  참찬관승,
가선대부 비서경 "
이라 기재된
경력을 의심하기 보다는 그 당시의
족보 편집시  대부분의 여러 성씨의 족보에는
신분 상승용 벼슬 기록이 그렇게
비일비재했다는 사실과 그 시대적 풍조를 말하고 싶을 뿐이다. 
 
누군가가 향토사나 족보학을 조사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여러 성씨의 족보나 동일 성씨의
족보에서 단자 내용의 변화를 계속 추적해 본다면
그 시대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로울 것이다.
 
아무튼 첫 청원서를 제출했던 갑진년 1896년에
<통정대부>라는 작위를 받았다고
선영홍의 단자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사실이라면 청원서의 효과를 단단히
본 셈이다..
 
<통정대부> 현 직책은 아니지만
정3품으로 인정을 받는 양반표 타이틀의 작위이니까
양반 행세도  가능해 진다.
 
그러나 보수적인 보은 지역의 향교와
그 유생들은 이를 쉽게 인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집을 134칸으로 크게 짓고,
관성정이라는 일종의 사립 향교를 지어서
그도 무료로 기숙시키는 교육사업을 해도
그들에겐 선행으로 보이지 않고
다만 신분 상승을 위한 돈 자랑(?)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1910년부터  조선 왕조가 문을 닫고,
양반제도가 무너지고, 이미 대원군에 의해서
향교도 문을 닫게 되었고,  신분제도가 페지되어
 이제는 그야말로 돈이면 최고라는 세상이 되어가자
선씨 보은 문중도  재법 기를 펴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영홍은 돈에서 오는 즐거움 보다는
선행을 해서 얻는 기쁨이 최고라는 정신적 가치와
인생관을 터득하고 이를 깊이  깨달은 자였다.
 
<최선위락/最善爲樂>~!
이것은 선영홍이 후손들에게 남긴
 가훈이었다.
그가 깨달은 정신적 유산이었다.
말하자면 선영홍은 물질적으로는 <보은 저택>을,
정신적으로는 <최선위락>이라는 유산을 남겼다.
 
 


◆  선영홍은 동학사상과 동학 농민군과는 어떤 관계였을까?


보은하면 근대 한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동학농민 전쟁, 동학 농민 봉기 장소를 연상할 수 있다.
1893년 3월 11일부터  4월 2일까지
보은 장내리에서 전국에서 무려 3만명의 동학군
집회가 있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동학군의 소굴이나 다름이 없는 곳이었다.


비록 10년 후이지만 바로 이런 보은을
선영홍은 재산과 생명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곳으로
믿고 멀리 남도 섬에서 천리길을 멀다 않고 이사를 온 것이다.

 

이것은 단지 정감록이나 도참설의 믿음 이상의
종교적 믿음이 있었기에 결행이 가능했을 것이다.
바로 후천개벽 사상을 믿었지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러운 그러나 합리적인 의심을 해 본다.
동학을 믿으면 난세에도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을것이다.

 

선영홍이 금산을 떠난 후에
그 지역과 건너편 고흥 반도에서는
동학사상을 바탕으로 한 훔치교, 보천교,
천도교가 성행했던 것을 연관시켜 보면 그렇게 생각된다.

 

또한 선영홍이 금산에 있을 때
그의 선행을 찬미하고, 이를 청원서로 작성하여
돌산군수에게 제출할 때 대표 서명자나
연서자 명단 중에는 동학군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1896년 10월 청원서를 낼 때
맨 앞에 선 사람은 금산 지역 동학군의
지도자요  집강인 최서왕과 그의 막료들이었던 지역 동학군  간부들이었다.

 

선영홍이 가난한 이웃 주민들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흉년 때는 수 백명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며 상생 정신을 발휘했었다.
말하자면 <사람을 하늘처럼> 중하게 여긴다는
동학교의 교리인 <인내천> 사상을
알게 모르게 몸소 실천한 사람이었다.


아마도 이 때문에 금삼면 일반 주민은 물론이고
관리와 부자들을 증오했던 동학도들도
선영홍만은 착한 부지로 보고 오히려
그의 선행을 앞장서서 돌산군수에게
상부에 상신하여 표창을 받도록 청원까지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04년 전후에 동학군의 패잔병들이
당국으로부터 동비라는  딱지가 붙어서
국가의 적대 세력으로 낙안을 받고 토벌 대상이 되자
 급히, 또는 은밀히 남해에 있는 섬들로 숨어 들어 왔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부자집의 재산을 빼았아 가거나
생명을 위협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 중에는 외세인 양왜를 배척하는
착한 의병으로 변신한사람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일부는 의병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국에서는  정부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의병들은
모조리 <동비>라 부르고 토벌 대상으로 보았다.
마치 6.25. 전후에 빨치산이나 이에  협조한 사람들, 또는
무구한 가족들은 대부분  공산 빨갱이인 <공비>로 보고
소탕의 대상으로 보았듯이~~``


선영홍의 손자인 선병한씨는 나와의 인터뷰 중에
자기의 증조부인 선영홍도 일부 나쁜 동학도에게
죽창에 옆구리가 찔려서 그 상처 때문에
보은으로 이사를 와서도  큰 고생을 했다고 증언해 주었다.
그래서 보은 집에는 한의사도 한분 상주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사 나쁜 동학도 때문에 생명에 위협을 느껴
고향인 고흥을 떠나,
인내천 사상을 교리로 삼는 착한 동학도가 많이 있는
보은 지역을 안전한 곳으로 보고,
1904년에 이주를 온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나의 합리적인 추측이다.
 
현재 보은 고택에 걸려있는 액자 <최선위락/最善爲樂>은
바로 선영홍의 깊은 인생 철학이 그 글뜻 속에
숨어 있지 않을까?
사람들에게 평소에 선을 배풀면, 난세에도
죽음을 면하고 즐겁게 살 수 있다는 생각과 믿음이
바로 <최선위락>이라는 가훈 속에 담겨 잇지 얺을까?

 


◆  선영홍은 얼마나 큰 부자였나?
 그리고  최초의 합자화사인 대동상회 설립자인가?


선영홍은 우무가사리로 떼돈을 벌어서
고흥의 갑부가 되었다고 했다.
물론 우무가사리 말고도 김, 미역, 디시마, 굴, 건어물 등
해산물 장사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은 식량 품귀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일본은 일찌기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고 공업 생산품을 대량생산하는 산업화 시대였었다.


따라서 농촌에 살던 농부들이나 젊은이들이
산업화 중인 도시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농촌에서는 노동력이 부족하여 살이나 콩 등 곡류 생산이
격감하여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 상인들은 전라도 해안에 들어 와서
쌀을 매집하여 일본으로 수입해 가는 밀무역이 성했다.
당시 일본의 쌀값은 우리나라 쌀값의 두 배나 되었다.


따라서 전라도나 경상도 해안 지역에서
장사나 무역을 하는 우리나라 보부상이나
객주들은 큰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본 쌀 수입상들과
쌀 수출 밀무역을 했었다.
왜냐하면 이윤이  크게 남는 게 쌀 장사였다.
나라에서는 방곡령을 내려 쌀 수출과 밀무역을
막으려 했지만 당시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는 속수 무책이었다.
아마 선영홍도 이문이 크게 남는
쌀을  중개해 주는 유통사업을 회피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손자 선병한 선생에 따르면, 증조부는
만주에서 조를 1000여 가마씩 수입해서
미곡이 부족하여 식량난에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주었다고 했다.
아마도  장사에 수완이 탁월한
선영홍은 살은 수출하고,  조는 수입을 해서
동시에 이윤을 남기는 장사를 크게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손자 선병한선생은 조부는
주선말기 최초로 합자회사인 <대동상회>를 설립했다고 했다.
중국 상해, 단동에도 지사가 있었고,
국내 주요 지역 10 곳에 지사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해방 전후 국내 최고 부자인 화신백화점 소유자
박흥식도 젊은 시절에 조부 밑에서 심부름을 했다고 전했다.


와~~!!
최초의 상사인 대동상회 설립, 그리고 지시가
국내외 13개 이상이나 두웠다니~~대단하다!
그리고 돈이 많아서 전국에서 규모가 제일 큰
134칸의 대저택을 건축했던 선영홍 부자~~!
그는 얼마나 큰 부자였을까?
고흥에서 보은으로 이사를 올 때
우마차 30 대 분량의 이삿 짐을 운반해 왔다고 한다.


그리고 고흥군 4개 면에 있는 논들은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배분을 해 주고 왔다고 한다.
그래서 1922년에 그 곳 수혜자들은
선영홍의 시혜에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
두원면 운대리 비석거리에 영세불망 철비를 건립했었다.
지금 그 철비는  2004년에 보은 고택 솟을 문 앞에
옮겨 다 세워놓고 있다.

 

그런데 지난 7월 초에 나는 경복궁 근처에 있는
국가 기록원을 방문하여 1920년대와
1949년도 농지 개혁 당시 고흥군 대 지주들의
토지 실태를파악해 본 적이 있었다.
조사 결과 대 지주는  영광집 김정태,
서민호선생의 부친인 서화일,  한약사 신우구,
풍도 농장 이상하는 상당한 토지를 소유한 기록이 있었다.

 

그러나 선영홍은 금산지역에 일부 토지 소유의
흔적이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고흥을 떠날 때 무상으로
소작자들에게 분배해 주었다는 논도
1천 마지기 내외였을거라  추정해 보았다.


왜냐하면 선영홍은 토지보다는 현금, 가령 당시 국제 화폐로
통용되었던 은이나 금, 또는 일본 지폐 등을
많이 소유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기 떄문이다.
그리고 고흥 4개 면에 소유했던 논들도
무역으로 축적한 돈 중에서 돈을 빌려간
사람들에게서 받은 담보물인 논문서가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돈을 빌려간 사람이 4개면에 걸쳐 있어서
빚을 제 때에 갚지 못하면 약조대로 논문서가
선영홍에게로 넘어 와서 부득히 중소형 지주가
되었지 본업은 현금 위주의 무역 장사였을  것이다.

 

그런데 1910년대 말 고흥에서도 일제당국이
토지조사를 실시했는데 대부분의 논문서는
소유권이 없는 경작권이었으므로
이런 경우의 논들은 대부분  국유화시키고
결국은 동척에 싸게 팔아버렸던 것이다.
1910년대 고흥의 논들은 대부분 둔전토가 많았고,
왕실인 궁례궁에서 소유권이 아닌 경작권만을
인장해 주고 소작을 시켰던 논들이다.

 

조선이 망하자 왕실의 소유권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경작권만 있는 논문서가 헐값에 거래되었다.
이 대 영광집 김정태도 이런 논문서를 많이 사들여
소유권이 있는 논문서로 둔갑시켜 재산을 늘렸다는 설이 있엇다.

 

아마도 선영홍은 소유권이 없는 경작권만 있는
논문서를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주고, 못 갚으면
자기 논으로 삼았지 않았을까 일단은 추정해 본다.

 

그래서 1910년대 일제가 실시한
국토조사 시기에, 선영홍은 소유권이 없는 경작권의 논문서들을
보은에 떨어저 있고, 무역에 몰두했으므로 그 문서들을
소유권 문서로 둔갑시키는 요령을 부를 겨를이 없어
일제에 빼앗기기 보다 차라리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갖게 하고
각자가 둔갑을 부리도록 허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둔갑술이 약한  소작인들은 둔갑술이 강항
고흥의 대지주들에게 헐값에 넘겼을 것이다.
 
나역시 이복형이 풍도농장 지주였고,
한약사 한우구 지주는 친할머니의  사촌 오빠였고,
영광집 김정태 지주의 맏며눌이는 내 사촌 누님이고,
서민호의 부친인 서화일 지주는 내 형수님의 부친이 되는 등
고흥의 지주들과는 거의 인척 혼척 관계에 있어
고흥 지주들에 대해서는   둔갑술 등 들은 바가 많은데,
선영홍이라는  부자는 말은 들었어도, 고흥에서
논이 많은 지주라는 말은 별로 듣지를 못 했다.

 

이런 연유에서 나는 선영홍이 고흥에서
큰 지주는 아니고, 다만  돈을 많이 소유한
당대의 제일 갑부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토지의 소유 량이라면 그의 부를 비교할 수 있는데
금은 등 사실상 현금만을  보유한  상태라면  본인 아나면
 그가 얼마나 큰 부자인지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선영홍은 고흥에서 떠닐  때
제일 돈 많은 갑부였는데 그가 얼마나 큰 부자였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것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결론이다.
 
나는 금년 5월 고흥출신 고향 친구인
완재 송기영, 무구 이경우, 백광 노순필 친구랑
예산 추사 김정희 고택을 탐방하고 이어서
고흥출신 선영홍의 고택도 탐방해 보자는 뜻으로
보은 고택에사 1박 홈 스테이를 했었다.

 

고택에서 거주하며 홈 스테이 숙박업과
종갓집 음식, 간장 판매를 하고 있는
선영홍의 현손 부부도 만나 보았다.
그러나 내가 알고 싶어하는  자료, 예컨데
사진첩이나, 대동상화 관련 서류, 또는 빙표,
계약서, 보부상 도장 등등 이 보존되어 있지 않았다.
언젠가 수해로 유실되어 없어졌다는 것이다.
좀 과장해서 단순하게 말하면,
눈에 뜨이는 것은 앞뜰에도 뒷뜰에도
수백개나 되어 보이는 간장 독, 간장 항아리 뿐이었다.
선병한선생은 인터뷰 중에 이런 말을 자주 했었다.


" 내가 제일 듣기 싫은 말은 선참봉은 부자여~ 그 사람 부자였다"는 말이라고 했다.

 

그러나 하루 밤 고택에서 스테이 하고 난
우리들  생각도 역시 선영홍 가문은 장사에 정통이다는 생각이었다.
가문의 전통이나 <최락위선 정신>보다
간장 장사~~! 간장 장사~~!
이 가문은 역시 장사꾼 가문이구나 하는
못 내 아쉽고 씁씁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찌기 <우무가사리>라는 하찮은
물건에서 돈 뭉치를 만들어 낸 가문이라면
어설픈 양반 행세나  정감록이나 명당설에 빠질 것이 아니라
당시 밀려오는 산업화 물결을 타고, 방직공장, 제지공장,
인쇄업, 철물공장 등 산업화에 앞장 서고 집중했다면
오늘날 간장 장사가 아니라, 전국적인  대기업이나 대재벌이
될 수도 있었을터인데  하는 아쉬움도 컸었다.

 

손자 손병환선생은 조부가 보은으로
이주를 왔을 대는 3만석 상당의 재산가였을거라 평가했다.
1920년대를 기준으로 볼 때, 당시 쌀 한가마의 가격이 15원 정도라 했다.

 

그러니까 이를 화폐로 계산하면 대략 1석을 30원으로 치면
90만원 정도의 재산이 된다.
지금 화폐 가치로는 약 900억원 쯤 되지 않을런지~~`
아무튼 이 돈을 과시용으로 134칸 저택을 짓는 일보다
공장 등 산업화에 과감히 투자를 했다면 선씨가문은
지금 쯤  <재벌가문>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그 만한  상업자본을 축적한 사람이 드믈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를 창설한 김성수도 같은 시기에
경성방직 등 산업화에 투자를 했기에 오늘날
후손들은 재벌은 아니어도 간장 장사는
면했던 것은 아닐런지?
선영홍이 대동상회(大同商會) 만 제대로 운영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데 선영홍 후손들은 선영홍이
우리 나라 최초로 합자회사인 대동상회도 설립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내가 조사한 바로는 대동상회 설립과는
관계가 희미하다. 그 근거를 찾기가 무척 힘들다.
대동상회가 서울에 있는 <장통상회>와 더불어
국내에서 최초로 설립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동상회는 1883년에 평양에 거주하는
20명의 상인들이 합자하여 만든 상회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영국  한 영사의  보고 기록에 따르면
대동상회는 회원이 각각 수십만량  달라에서
1 만 달라 씩 투자해서
설립한 일종의 유통회사라고 했다.
그런데   선박도 몇 척 소유하고 있었으며,
설립 초에는 쌀, 콩, 목화, 쇠가죽 등 국산품을
중계 수출하고 양품 등을 전국 각지에서 판매했었다.

 

그러다가 외국과의 직접  무역 거래도 시작했다고 한다.
대동상회는 1886년에는 인천에 첫 지점을 설치했다.
대동상회는 국산품은 중국 일본 등 외국에 수출하고,
면직제품, 옷감, 화장품, 한약재, 서양 의약품  전국에 팔았다.
당시 정부에서는 대동상회를 보호해 주는 편이었다.

 

통리아문이라는 정부 기관에서 전국 각 지방 공무원들에게
대동상회의 영업활동을 잘 보호해 주고,
잡세를 징수하지 못 하게 도와주었다.
대동상회 직원들은 정부가 발행해 주는 <빙표>를 가지고
전국 어느 곳에서나 장사를 할 수 있었다.
대동상회는 합자회사로서 다소 자본금이 있었으나
당시 국내에 진출한 중국, 일본, 독일 등 외국 상사에 비하여
규모나 자금이 부족한 편이었다.
따라서 때대로 영국 상인들로부터 일시적인 자금을 융통받기도 했다.
국내외에 20개 정도의 지사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회사 창립 멤버에게는 통리기아문(외교통상부)에서
발행한  무역 상업 자격증인 앞서 말한
 <빙표>를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선영홍 후손들은  이런  대동상회와 관련된
아무런 물증도 없이 구전에 의해 그저 듣고서야
대동상회를 건립했노라고 무턱대고 자랑한다.

 

그리고 해방 전후 전국 제일부자였던
박흥식도 한 때는 선영홍 밑에서 심부름을 했다고 하나
이것 역시 근거가 미약하다.

 

왜냐하면 박흥식은 1903년 평안도 용강에서 태어 났다.
선영홍 부자가 보은에 이사왔을 때
박흥식은 갓 돌이 지난 두살 짜리 아기였다.
선영홍이 1924년 타게하였을 때, 박흥식은 겨우 23세였다.

 

그 때 그는 평양에서 미곡 장사를 했고,
 1928년, 25세가 되던 해에 서울에 와서 <선일지업회사>라는
종이 장사를 시작했을 뿐이다.
그때 선영홍은 타계한지 4년이 지나고 있었다.
물론 선영홍이 평양에사 10대의 박흥식 소년을 만났을
기회는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박흥식이 선영홍 밑에서 직원 노릇을 했다는 것은
근거가 아주 미약한  스토리에 불과하다.

 

 

◆   1900년 초 고흥 최고의 갑부, 선영홍에 대한 마지막을  정리해 본다.

 

선영홍은 구한말 하찮은 우무가사리를
외국 상인들에 팔아서 고흥의 갑부가 된
고흥 최초의 무역왕이다.
그는 1904년 동학농민 전쟁으로 어순선한 시기에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인내천을 교리로 삼았던
동학교의 본거지 중의 하나인 충북 보은으로 이주를 하여
당시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134칸의 가옥을 건축하여 남겼다.


그는 돈 보다도 이웃 주민들에게 선행을 베풀며
상생하며 사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즐거움이라는 인생 철학을 남겼다.


그는 젊었을 때 자기의 몸을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 사업을 하겠다는 패기 정신도 남겼다.
나는 그가  삶의 가치를 표상하는 <최락위선> 의 상생정신과
빈손이지만  몸을 담보로 잡혀서라도 성공해 보겠다는
그의 패기  정신에 매료되어
이렇게 그에 대해 길게 쓰게 되었다.


그가 만일 정감록이나 명당 등 풍수지리설에
깊이 매몰되지 않고,
동시에 신분상승을 위한 가옥 건축이나
족보의  치장을 위한 노력을 줄이고
오로지 축적된 상업자본으로
산업화에만 계속 정진하고  몰두했다면
그는 고흥의 갑부나, 보은의 대 주택 소유자가 아니라

국내에서  거대 기업가나  일류 재벌이 되었을거라는 아쉬움을 갖으며
그에 대한 글을  여기에서 마무리 한다.

 

끝으로 고흥인이라면 휴가철 등을 이용하여
보은에 그가 남긴 고택을 한번 방문해 보고,
그가 젊었을 때 보였던 패기와 상생정신,
그리고  하찮은 우무가사리와 왕대나무에서 창조적인 부를 일구어 낸
그 지혜에서 어떤 재 창조적인 영감을 받아 오기를 기대해 본다.

 

 


2016년  7월 29일 뉴욕에서 일시 체재중에 퀸 지역 차녀가 사는 아파트에서 이글을 마무리한다.

 

 

본문 글 출처 : http://blog.naver.com/swlee8585/220765510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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