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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94]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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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 박 전 대통령의 이름만 떠올려도 너무나 그리워진다. 박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박 대통령을 독자자였다고 비난할지언정 내게만은 최고의 후견인이자 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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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 대통령은 나의 후견인이자 팬이었다.

박 전 대통령의 업적과 평가를 담은 소형 책자를 보니 박 전 대통령이 너무도 그리워 진다.


 
박 대통령 서거 이후 한 번도 그분의 꿈을 꾼 적이 없었는데 올 1월 꿈에서 만났다. 박 대통령이 자신의 생가에서 환하게 웃고 있지 않는가? 하도 이상해 아픈 몸을 이끌고 생가가 있는 경북 구미로 가고 싶었다. 그날 따라 1월답지 않게 바람 한 점 없는 포근한 날씨였다. 그런데 웬걸, 생가에 도착하니 갑자기 눈보라가 치면서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변덕스러운 날씨를 보고 동행했던 최종욱 사장이 내 건강을 걱정하며 차에서 내리지 말도록 당부했다.
 
그러나 아무리 몸이 불편해도 그곳까지 갔는데 차에만 있을 수 없었다. 코끝을 스치는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생가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박 대통령과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방명록에는 '김일 왔다 갑니다'란 글도 남겼다.
 
생가를 나왔다. 이때부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잔뜩 심술을 부렸던 날씨가 언제 그랬는지 싶게 맑아지기 시작했다. 세차게 불던 바람도 죽었다. 난 함께 온 사람들에게 "허허, 별일이 다 있구먼" 하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마치 용 한 마리가 승천한 후 평온을 되찾은 날씨 같았다.
 
주변에선 "아마도 박 대통령께서 김일 선생이 온 것을 알고 너무 기쁜 나머지 날씨 심술을 좀 부린 것 같다"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과의 추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그분의 자상함과 따뜻한 배려는 지금도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1967년 4월 말 마크 루니를 꺾고 세계 챔피언이 됐을 때 박 대통령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박 대통령은 수시로 나를 청와대로 불렀다. 그때마다 빠지지 않았던 메뉴가 고기였다. 박 대통령은 "김일 선수는 고기를 많이 먹어야 힘을 낼 수 있다"면서 손수 고기를 구워 나의 접시에 올려 주곤 했다.
 
68년 겨울쯤으로 기억된다. 박 대통령이 느닷없이 "김 선수 소원이 있느냐"고 물어 보면서 "소원이 있다면 들어주겠다"라고 말했다.
 
난 갑자기 질문을 받는 바람에 주춤했다. 잠시 생각한 끝에 "우리 고향 고흥 금산에도 전기가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시골 마을의 최고 바람은 호롱불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내 고향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는데 섬에 전기가 들어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시기였다.
 
당시 내 고향 최고의 생산품은 김을 비롯한 수산품이었다. 호롱불에 김발을 짜는 것이 얼마나 고된 줄은 해 본 사람만이 안다. 전기가 들어오면 어민들 수익 증대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전기가 들어오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당장 비서를 불러 알아보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고향에 전기 공사가 시작됐고 호롱불 대신 백열등을 켤 수 있게 됐다. 69년 10월 15일 고향 사람들은 나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나 덕분에 전기가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나를 사랑했던 팬은 박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팬들 중에서도 기억나는 팬은 사형수였다. 60년대 중반 사형 선고를 받었던 한 사형수가 "죽기 전에 나를 돕고 싶다"며 형무소에서 조금씩 모아 온 돈 100만원을 주겠다는 편지가 왔다. 그 사형수는 사력을 다해 박치기하는 모습에 감명받았다면서 돈을 보내겠다고 했다. 난 그의 사랑에 감명을 받아 반대로 교도소에 수감 중인 재소자들과 사형수들을 위해 200만원을 내놓았다.
 
난 어려운 삶을 살았던 탓에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왔다. 경기하러 갔다가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남몰래 돈을 내놓기도 했다. 나의 이런 선행을 잘 아는 일본의 유명 프로레슬링 해설자 몬마 타다오는 "오오키 긴타로씨는 삶의 방법이 서투르고, 꽤 손해를 보며 인생을 사는 것 같다. 그런데 오오키씨는 좋은 사람이다. 그는 남을 돕기 위해 레슬링을 하는 사람같다"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난 남의 도움만 받고 살고 있으니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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