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6월 중순으로 기억된다. 그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자신을 한국의 CIA(중앙정보부) 소속 요원이라 소개했다. 그에게 "왜 찾아왔느냐"라고 물었다. 그는 다짜고짜 "한국에 올 수 없느냐"라며 고국 방문 의향을 타진했다. 그는 "한국에서도 당신은 꽤 유명하다. 각하(박정희 대통령)께서도 당신의 활약상을 너무도 잘 안다. 한국에서도 프로레슬링 경기를 보여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 1964년 6월 말 한국을 방문한 난 중앙정보부 및 군 핵심 인사들과 만나 한국에 레슬링을 보급하고 발전시키는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당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는 사진이다. 오른쪽 두번째가 나다. 한·일 국교 정상 수립 얘기는 내겐 반가운 소식이었다. 특히 일본서 차별과 냉대받았던 교포들도 한·일 국교 정상화가 하루속히 이뤄지기를 바랐다. 당시 국교가 수립되지 않아 일본으로 온 사람들은 불법 밀항자로 취급받고 나처럼 수용소에서 인고의 나날을 보낸 후 한국에 강제 귀국 조치당해야만 했다. 국은 국내 선수들끼리 경기를 치렀다. 당시 미국과 일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을 불러오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개런티를 지불해야 했다. 개런티가 비싸 좋은 외국 선수들이 오지 못하니 당연히 한국의 프로레슬링은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의 제안에 대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한국은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고국이었다. "언제 가면 좋겠느냐"라고 물었다. 그는 "갈 수 있으면 당장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다.
그후 일주일 뒤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한국은 정치·사회적으로 무척 어수선했고 시끄러웠다. 가장 큰 이슈는 한·일 관계였다.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씨가 당선되면서 한국과 일본은 국교 정상화 문제가 급속도로 진행됐다.
그러나 한국 측 사정은 달랐다. 한국에선 국교 수립을 반대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그해 6월 3일 한·일 정상 회담과 국교 수립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이른바 6·3사태였다. 시위를 일으킨 학생들은 과거 식민지 통치에 대한 일본의 반성 없이 국교 정상화는 있을 수 없다며 수교에 반대했다.
일본서 레슬링만 했던 난 한국서 그런 것을 구실로 큰 데모가 벌어진 것은 꿈에도 몰랐다. 서울에 와서 그런 사정을 전해들었고 당시 데모란 말이 생소했기에 난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쨌거나 나의 한국 방문은 1964년 6월 말 이뤄졌다. 1956년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떠난 지 8년 만이다.
정부에선 나의 귀국을 언론에 알리겠다고 했지만 난 떠들썩한 고국 방문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고국 방문은 조용히 이뤄졌다. 한국에 오자마자 중앙정보부 및 군 핵심 관계자들과 만났다. 기억 나는 인물은 이병두 중앙정보부 차장이었다. 변호사 출신인 이 차장의 권한은 막강했다.
그들은 나를 환대했다. 그들이 나를 초청했던 이유는 국내 프로레슬링 저변 확대와 국민에게 볼거리 제공을 위해서였다. 도쿄서 만났던 중정 관계자의 말처럼 그들은 "한국에서 프로레슬링 경기를 개최하면 어떻겠는가"라고 나의 의사를 타진했다.
당시 한국도 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렸다. 그때 한국에는 장영철이 독보적 존재였다. 이어 천규덕 등 젊은 신인 선수들이 가세해 팬들로부터 사랑받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서 느낀 점은 선수들 간의 실력은 둘째 치고 한국과 일본의 레슬링 수준 차이가 10년 이상 벌어졌다는 것이다.
난 그들에게 한국 레슬링 발전을 위해 경기를 치르겠다는 확답을 주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제안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일본서 최고의 전성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에 올 수 없었다. 난 일본과 한국을 오가면서 경기를 하고 싶었지만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도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난 귀국을 섣불리 결심하지 못했다. <계속>
[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87]
by 운영자 posted Jul 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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