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금대교의 개통을 보고
지난 2011년 12월 16일은 우리 거금도가 생긴 이래 최고의 날이었다.
2002년 12월에 착공되어 9년 만에 완공된 ‘거금대교’의 준공식 날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음 날인 12월 17일에는 우리 금산이 낳은 전설의 박치기 왕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를 기념하여 건립한 ‘김일기념체육관’의 개관식이 있어 나도 개통식 행사 시간에 맞추어 12월 16일 오전에 금산을 방문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12월 15일 오후에 녹동으로 조문을 가게 되어 그 길로 금산으로 들어갔다.
올 4월부터 손수 고향 쇠머리 마을에다 황톳집을 짓고 계시는 형님 댁(본채는 아직 미완이나 별채는 완공하여 거기에서 기거하고 계신다)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오늘로 운행을 마감할 철부선을 마지막으로 타보고자 녹동으로 나왔다.
녹동에서 아침밥을 먹고 목욕도 하고는 금진행 철부선에 몸을 싣고 다시 금산으로 들어가면서 ‘아, 오늘의 이 철부선이 내가 타는 마지막 철부선인가!’하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하는데 멀리 거금대교 위로는 개통식 행사관계자들을 태운 차량들이 씽씽 달리고 있었다.
거금대교 개통식!
거금도 유사 이래 최고의 상징물로 자리매김 될 거금대교 개통식은 그토록 개통을 염원했던 것만큼이나 많은 지역 주민들을 위시하여 관계 공무원, 시공사 관계자 및 정치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오전 11시에 전남도지사의 치사를 시작으로 해양교통부장관, 고흥군지역 국회의원, 금산면 출신 국회의원들의 치사에 이어 시공사 관계자들에게 감사패가 주어지고 축포 및 테이프 절단을 마지막으로 하여 계획된 시각인 12시쯤에 끝났다.
치사는 온통 이 다리의 개통으로 지역사회가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에 부푼 청사진만 제시할 뿐 다리의 개통이 가져다 줄 부정적인 측면은 직시하지 않았다. 하기야 기분 좋은 개통식 날 그런 이야기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부분은 우리 지역주민들이 하나하나 검토하여 해결할 일이었다.
나는 개통식이 끝난 직후 친구의 차로 거금대교를 처음 건너는 감격을 맛보았다. (아직은 통행을 통제하는데도 그 친구의 차는 통제를 받지 않았다)
그날 밤.
거금대교 개통을 기념하기 위한 부대행사로 ‘제4회 아름다운 거금도의 밤’ 행사가 김일기념체육관에서 거행되었다. 각 마을에서 미리 선발된 참가자들의 노래자랑과 중간 중간에 초청가수들의 노래가 이어지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내가 도착했을 때는 계획된 프로그램의 절반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오늘은 분명히 우리 거금도 주민들의 최고의 잔칫날로 우리들이 마음껏 흥겨워하면서 즐겨야 하는데도 분위기가 그렇지 않았다. 분명히 즐거워는 하는데 남의 잔치 구경 온 사람들 같았다. 그게 나만의 생각인지는 몰라도 우리 거금도 주민들은 이러한 놀이문화에 많이 익숙하지 못한 것 같았다.
오늘만큼은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마음껏 즐기고 싶었던 나는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다가 내가 앞장서기로 마음먹었다.(여기에서 밝히지만 나는 춤과 노래 등 그쪽 방면은 완전 젬병이다.)
나는 여러 어르신들을 차례차례 무대 앞으로 나오게 하여 같이 춤추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나의 이런 수고에 감응을 하셨던지 자신이 78세라고 밝힌 어떤 할머니 처음에는 부끄러우신 듯 주저주저하다가 이내 윗옷을 벗어던지고 덩실덩실 춤을 추시더니 급기야는 자기가 직접 무대 위로 올라가 노래를 하고 싶다고 나에게 부탁한다. 물론 그 청탁을 들어주지 못 했지만 그 할머니도 개의치 않고 흥겹게 춤을 추시며 노셨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난 후 나는 처음으로 손수 운전해서 거금대교를 건너고 싶어 거금대교로 차를 몰았다. 주위 경관을 살피며 차를 천천히 몰면서 내려다 보는 바다는 생각보다 아득했다. 기왕 녹동에 나온 김에 목욕도 하고 가려고 목욕탕으로 차를 몰았는데 목욕탕의 주차장이 차들로 꽉 차서 다시 나와 녹동↔금산 철부선이 다니던 선착장의 주차장에다 차를 주차하고서 목욕탕으로 걸어가는데 아, 어제까지 엔진소리도 씩씩하게 우리를 싣고 다녔던 철부선 두 척이 이제는 닻을 내리고 을씨년스럽게 정박해 있지 않은가!
내일의 운항을 위해 쉬고 있는 배와 이제 그 임무를 다하고 쇠락하여져서 닻을 내린 배와의 차이가 저리도 클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 배들은 쓸쓸하게 보였다.
또한 많은 사람들로 붐비던 매표소 앞도 사람하나 보이지 않고 한산하였으며 여객선 대합실의 문도 닫혀있다.
나는 갑자기 매표소 부근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던 그 여자 동창이 생각났다. 이렇게 사람들이 없으니 당연히 포장마차도 폐쇄되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나의 발길은 그곳을 향하였다. 역시 포장마차만 덩그마니 남아 있을 뿐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내 대합실 내의 가게가 궁금해졌다. 담배도 살 겸 대합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인인 듯한 여자가 혼자 앉아 있다.
“아주머니, 서운하시겠습니다!” 하고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서운하기만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지가 막막합니다.”하고 그녀가 말을 받는다.
“그렇지만 어떡하겠습니까! 그래도 몇 십년동안 아주머니는 여기에서 돈을 벌어 자식들 키우며 살았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지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되겠지요.”
“다 잘 될 것입니다. 저도 여기에서 담배를 사는 것이 마지막인 것 같네요. 그래서 마음먹고 들렀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렇다.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이다.
우리는 다리의 개통이라는 양지를 보고 흥겨워만 했지 그 다리의 개통으로 인하여 일자리를 잃은 포장마차 주인, 대합실 가게 주인, 그리고 철부선 선원들은 저 다리의 개통을 어떠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앞으로 이 다리의 개통이 가져다 줄 또 다른 음지(부정적인 측면)가 많이 나타날 것이다. 미리부터 걱정할 바는 아니지만 그런 것들을 충분히 예견하고 미리미리 검토하여 대비책을 세우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걸 새삼 느껴본다.
이제 우리 거금인들이 꿈에도 그렸던 다리도 개통되었다.
나는 이 다리를 ‘소통의 다리’라고 감히 정의해 본다.
고향을 지키시는 지역 주민들과 전국 각처에 흩어져서 사는 우리 모든 향우들의 마음을 이어주는 징검다리라는 의미이다.
그러한 나의 마음을 담아 표현한 시를 소개하고 맺는다.
「거금대교」
육지를 향한 억겁의 염원은
12개의 교각과
2,028미터의 길이와
167.5미터의 높이로
이렇게 그 위용을 자랑하노니
바다여 춤춰라 그대여 꿈꿔라!
항상 순종했지만
때로는 성내는 바다의 몸부림을
엄마의 마음으로 내려다보는 적대봉은
이제 다 이루었다고 저리도 여유로운가?
그러나 오늘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어라!
오늘, 2011년 12월 16일
섬과 뭍이 서로 이어지는 날
5천여 명의 거금인과 2만 여명의 향우들이
뜨거운 마음을 합하여 다시 잉태할
우리의 영원한 고향
거금도여, 거금도여!
거금대교의 개통식과 김일기념체육관의 개관식이 있었던
지난 12월 16일과 17일의 금산에서의 저는
마음 한 편에에 조그마한 아픔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척 즐거웠노라고 고백합니다.
고향을 위하는 뜨거운 마음들이
강을 이뤄 하나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