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시골길은 온통 억새들의 잔치다. 하늘이 높고 푸른 날 박하냄새가 나도록 가슴이 환해지려거든 늦가을 해질 녘 호젓한 시골길을 달리며 하얀 억새가 연출하는 가을의 춤을 바라 보라. 거기에는 한 인생을 힘들게 살다 이제 조용히 생을 마감하려는 시골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며칠 간 초겨울처럼 옷깃을 여미게 하던 날씨가 모처럼 풀려 수작을 하고 나들이를 하는 우리를 즐겁게만 했다. 지난 여름 적대봉의 추억이 너무나 아련해서 토요일 오후 고흥 녹동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는 길목마다 억새들은 가을 바람에 서로 비벼대며 푸른 바다를 향해 은빛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녹동항에 다다를 때까지 내내 회색 갯벌과 늦은 오후 햇빛에 반짝이는 은빛 바다를 따라 한없이 몸짓해 대는 억새의 하얀 물줄기가 내내 이어지고 있었다.
늦가을의 정서를 가장 잘 살려 내는 것은 단연 억새이다. 떠나버린 농촌의 부족한 농부들의 일손과 편리해진 난방 덕을 입은 억새들은 좋은 세상을 만나 잘려나갈 염려가 없어서인지 가을이면 가는 곳마다 온통 억새의 천지이다. 논두렁과 밭두렁은 물론이고 도로변 산자락마다 억새들이 무리 지어 피어올라 가히 억새 공화국이 되어 버린지 이미 오래이다.
곱고 화려한 단풍이 요란스런 색깔로 버물리고 덧칠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화려한 서양화라면 하얀 억새는 수묵과 일필을 중요시하는 선의 미학인 동양화적인 정서이다. 곧으면서도 휘어질 줄 알고 그러면서 길다란 목을 빼내어 하늘을 향해 조용히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 다분히 사유적이다. 그러므로 억새는 생각하는 풀이며, 억새밭은 사색의 뜰이다. 그래서 억새밭에 들어가면 누구나 겸허해지고 낮아져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녹동에서 여장을 푼 우리는 풍남을 돌아가는 해변의 카페에서 밤바다에 아롱지는 담담한 물 그림자와 몽돌 구르는 소리를 들으며 찻잔을 놓고 정담을 나누기도 했고, 녹동 선창가 횟집에서 KBS 맛자랑에 나왔다는 아줌마의 질펀한 사투리에 함께 취하기도 했다.
아침 일찍 녹동항에서 바라보는 적대봉은 지난 여름처럼 남해바다에 긴 등을 누이고 있었다. 검은 모습은 여전히 남들이 그러한 것처럼 한 마리 고래 같은 형상이다. 아침 서늘한 바닷바람에 어제 저녁 취기를 식히는 초행길의 일행들은 아름다운 섬 여행에 들뜬 마음으로 탄성을 연발했다.
파상제에 차를 세우자 가장 먼저 반겨 준 것은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억새였다. 산자락과 공터는 물론이고 버려진 무지렁이 논밭에는 온통 억새의 천지였다. 등산로 길섶따라 억새들은 아침 햇살을 받고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며 도열해 있었다. 등산로를 따라 풀섶에 숨어 하얗게 수줍듯 피어 있는 물매화와 진남색의 용담과 자주쓴풀, 진보라의 꽃향유와 샛노란 산국화, 가냘픈 쑥부쟁이들이 늦가을의 산행에 대한 신비로움을 더해 주고 있었다. 참으로 그렇게 보고자 했던 물매화가 이 늦은 가을에 아직도 무리지어 피어 있는 것을 보며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등에 땀이 배일 즈음 상치재에 올라서자 짙푸른 코발트빛 하늘 아래 하얀 억새들이 늦가을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정상까지 이어지는 억새 사이를 걸으며 나는 이런 장면을 '환상'이라 표현했다.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느끼는 환상이 아니라 미적 쾌감을 일으키기 위한 예술적인 표현인 '환상의 미'라 말하고 싶다.
산줄기를 흐르듯 타고 물들어 있는 화려한 단풍보다 남해의 올망졸망한 다도해를 배경으로 피어있는 억새는 한 마디로 순수와 무색의 세계였다. 화려한 단풍의 사치에 비해 억새의 검소에 그만 숙연해 진 것이다.
내내 그런 억새 길을 따라 적대봉엘 올랐다. 적대봉에서 내려다보니 우리가 올라 왔던 산등을 따라 하얀 억새가 말 갈키처럼 줄지어 피어있었다. 사위가 툭 터진 적대봉엔 봄날처럼 풀려 평온하기만 했다. 동으로 천등산과 마복산이 그리고 북으로 멀리 팔영산과 서로 두륜산이 길게 흘러가듯 누워 있었고, 완도와 여수 반도, 그리고 나로도를 위시한 작은 섬들이 평화롭게 떠 있는 모습이 정겨웠다.
산을 내려와 오천리로 향한 길가에도 온통 하얀 억새 천지였다. 남해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산자락을 돌아가는 길목마다 피어 있는 억새를 보며 어린 시절 빛 바랜 사진첩을 펼쳐보는 그런 기분에 젖어들었다. 주름진 할머니의 하얀 머리와 콜록이며 누워 있던 할아버지 방의 빛 바랜 벽지 같은 그리움으로 말이다 .
섬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오천리의 풍요하면서도 평화로운 바다와 그 위에 떠 있는 아름다운 섬들과 그리고 그림처럼 펼쳐진 마을의 정경이 우리를 동심의 세계로 빠지게 했다. 따스한 갯바위에 올라앉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풍광을 바라보며 우리의 삶의 진정한 존재 의미를 찾아 나선다면 결코 헛된 것은 아니란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억새와 가을 서정을 만끽하세요
2002. 11. 10 촬영 Forman
_ http://www.forman.pe.kr
▼ 그림같은 오천리 풍경
▼ 오천리 앞 바다 1
▼ 오천리 앞 바다 2
▼ 청초한 물매화 1
▼ 청초한 물매화 2
▼ 쑥부쟁이(산국화)
▼ 구절초
▼ 용담
▼ 자주쓴풀
▼ 참회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