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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 신금(新錦) : 본 마을은 원래 금진에 속하였으며 산모퉁이를 끼고 도는 곳에 위치한다하여 “샛감도리”라 부르다가 새로 생긴 마을이므로 새신(新)자를 붙여 신금(新錦)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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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달라져 가는 지역사회의 어제와 오늘 - 방파제축조로 막은 가난
전남 고흥군 금산면 신금마을


고흥 남단 금산면(거금도) 사무소에서 북으로 4km에 위치하고 있는 본 신금리는 1945년 일제말엽 금진마을에서 구분되어 지금까지 35년간의 연혁을 갖고 있다. 금진리에서 분구 당시는 호수 45호에(와가 3동 초가 42동) 인구 260명 (남 131명 여 129명) 경지면적은 180반(전 150반 답 30반), 해태건흥책수는 135책으로써 연중 생산고 6천7백5십속에 수익금 1백3십5만원이고 백미 나맥이 2백5십가마에도 미급하는 빈곤한 마을이었다.
1961년까지 근 15년간을 지나온 도중 생활고에 시달려 견디지 못하고 타지방으로 이사한 이농가구가 나날이 많아졌으며 폐허일로에 있는 마을이었으나 1961년도 부터 시작된 정부의 중농정책의 일환으로 임야를 대폭 개간하게 되면서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비료의 외상 배급의 혜택으로 식량난을 해결하게 됨과 동시 해태양식 물자공급이 원활해졌고 해태가 대량 생산케되어 해태 가격이 호조되어 이(里)의 연간 수입은 이전의 5배를 넘게 되었다.
1969년도말 현재 신금리 현황을 대비해보면 호수 75호(초가 18동 와가 15동 스레트 도단가 42동)에 인구 540명(남 284명 여 256명), 경지면적 474반(전 364반 답 109반). 해태양식 책수는 795책에 6천3백6십만속을 생산하여 수익금 3천1백8십만원. 이렇게 하여 각 개인의 생활 안정은 물론 이(里)자력개발사업을 중점으로 이민(里民) 전체가 일심동체로 협동하여 다음과 같이 수개의 사업들을 완공하게 되었다.
즉 66년도에 이(里)동개사업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농로확장 450m를 자체자금 5만5천원을 투입 완공 발을 보았고 66년부터 68년까지 15정보에 연료림을 조성 몇년후면 연료를 완전 해결할 수 있도록 되었다.

67년부터 68년도까지 농로암거 5개소를 설치 2십5만원을 들여 주민의 교통을 편리하게 하였으며 관계보를 설치 1개소에 7십5만원을 투자 천수답을 수리 안전답으로 전환케 했고 부업장려로써 가축 210수와 원예작물 3단보로 연간 3십5만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또 7십5만원을 투자 창고, 목욕탕 각 1개소를 건립하였고 공동정호 3개소를 16만원을 투자 개보수하여 식수해결은 물론 위생적 우물을 갖게 되었으며, 지붕개량사업으로는 옛날에 비해 초가는 줄어들고 와가 스레트 도단가 등으로 거의 전부를 개량 하였다. 또한 지방행정 수행의 신속 정확한 체계를 갖추기 위해 앰프를 비롯 스피카 십대를 가설하였다.

통신을 원활히 하기위하여 자체자금 15만을 투자하여 전화(거금4번)를 가설하여 통화하고 있으며 이런 모든 사업들의 자금은 전 이민(里民)의 해태생산 위탁판매중 매속당 십원씩을 염출하여 충당 하였다. 모자란 것은 이(里) 재산인 해태 건홍지 육종포 1년간 임대계약금으로써 사업을 추진 완공케 하였으며 정부의 보조 융자는 한푼도 받지 않았다.

주민소득을 들어본다면 절간고구마, 마늘, 축산, 해태, 문어, 기타 잡어 등으로 1965년도말 현재 호수 70호 환가소득액이 6백5십8만8천원(호당 소득액 9만4천원)에 불과 하였으나 1969년도말 현재엔 7십5호에 환가소득액 4천1백4십4만7천원(호당 소득액 5십만5천3백원)의 소득을 올려 주민생활은 나날이 호조되어가니 이는 실로 정부의 영세어민을 위한 정책의 결과라고 이민(里民)들은 당국에 감사드리며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일치 협력하여 주민소득의 배가에 가일층 노력하는 한편 이장을 비롯하여 개발위원 및 반장들은 이(里)행정에 최대한의 연구와 지도를 경주케 하고 있다.

1966년도 당시 이장 김순남으로 부터 이민(里民) 공동작업반을 마련하여 하계로는 퇴비증산에 힘쓰고 농한기에는 지력증진사업, 객토, 합뱀이 등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지도하고, 이 자녀들에게는 4-H구락부를 조직하여 농사기술의 실습을 할 수 있도록 실습지 2백평을 마련하여 주었고 가축의 양육 기술을 실험케 하기 위하여 닭, 돼지, 토끼 등의 가축을 개인과제로 두어 지도케 하였다. 이민(里民) 상호 화목단결을 기하기 위하여 부녀회를 조직하였으며 부녀회는 매월 1일 정기 회일로 정하고 시미(좀도리) 저축을 장려 백미 5가마와 보리 15가마를 확보, 이(里) 개발사업에 기여한 바 있다.

1968년도 최중영 이장당시 청년회를 재정비 육성함과 동시 이(里)개발위원회를 원활히 운영하여 이(里)개발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선착장 공사, 선양장 신설 등 기타 수개의 사업들을 완공 또는 진척시키고 있으며 산림을 보호코자 이(里) 자체 애림계를 조직하여 산림녹화사업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里)개발위원들과 협력하여 이(里)개발사업에 모범된자를 선정하여 시상하는 등 이(里)행정에 원활을 기하였으며 1969년도에는 천수답의 몽리를 위하여 정부의 지원사업으로 집수암거 1개소와 관정 1개소를 완공하여 지하수 개발을 보았고 이민(里民) 상호화목을 위하여 양토회를 조직 이풍쇄신을 기하는 등 눈부신 발전을 기했으나 금년도(1970년)에는 예년에 없는 해태흉작으로 인하여 개개인은 물론 이(里)재정에 타격을 면치못할 실정인 바 이민(里民)의 숙원이요 계획된이(里)자체 개발사업추진에 있어 애로에 봉착하여 큰 차질을 면지 못할 것이 예상된다.

본 마을은 해태 생산을 중점으로 해태채취선을 각기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태풍만 불면 해태채취선을 유실 파손 당하는 손실을 보아 연 12척(6십만원상당) 이상의 피해를 입는다. 이러한 피해를 없애기 위해서 우리는 자체자금 1백8십9만원(호당 2만5천원)으로 선박보호 방파제를 (장1백10m 높이 2m 폭1M50cm) 쌓았다. 앞으로도 1백 1십미터의 공사에 2백만원을 투입 완공할 계획이다. 또한 정부 시책에 따라 도로확장공사로 인한 본마을의 해태 항목 적치장이 도로화 됨에 따라 자연히 적치장을 잃을 실정인데 이에 대해 항목 적치장을 확보키 위해 총평 6백평을 마련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다음 사업은 해태건홍지 부족으로 신지포(소제포)를 개발하는 사업계획이다. 기히 개발한 일부 건홍지를 제외하고 금년도엔 3백여책을 건홍할 수 있는 개발지에 5백5십만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실상 기존 설치된 방파책은 항목으로 설치되어 겨울태풍때엔 방파책 항목의 유실로 사실상 제 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이에 튼튼한 방파책을 구상한 끝에 세멘트 콩크리트로 항목을 만들어 제대로 방파책을 만들게 된다면 계획된 3백책 건홍으로 연중 1천만원 상당의 수익이 무난할 것이나 세멘트 콩크리트조 항목 소요개수는 5백5십개, 개당 가격은 1만원정. 그래서 소욕액을 환산하니 5백5십만원---
이 5백5십만원의 자금염출이 애로중이어서 우리 이민(里民)의 숙원이 이루게 되려면 당국의 지원사업이 되어야 겠다는 것이다. 해태생산을 위주로 하는 본 이(里)에서는 해태를 제조하는데는 용수가 주로 되어 용수가 부족하여 좋은 해태 생산과 제품개량에 막대한 애로를 느껴 금년도엔 자체계획으로 용수탱크 1개소를 설치 사용하고 있으나 용수부족을 면치 못해 앞으로3개소를 더 설치 하여야 될 것으로 계획을 세워 추진중이나 금년의 해태 흉작으로 말미암아 그의 소요액 1백2십만원 역시 염출방안이 난한 실정에 있다.
뿐만 아니라 해태를 제조하는 과정에서 시간과 인력이 가장 많이 소요되는 것은 건조작업이다. 여지껏 일광으로 7시간 이상의 건조시간이 요하여 우천이면 전부 버려 막대한 손실을 본 실정으로 해태건조실이 하루속히 되어야 손실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의 소요액으로, 2개동을 건립하는데 1백8십만원을 70년도 본 이(里) 자력개발사업으로 추진할 계획을 세우고 추진중이나 이도 해태 흉작으로 건조실 건립문제가 난한 실정에 놓여 있다.

다음으로는 우리 이민(里民)은 여태껏 해태로 자급자족을 해왔고 지금도 해태에 의존하고 살아오고 있으나 앞으로 해태 전망의 여부가 우려되어 또한 다음과 같은 농산물 주산지를 만들어 주민소득을 높일까 하고 있다.

첫째로 경제작물(마늘) 재배다. 기후풍토의 조건을 감안하여 본 마을에는 기성재재 면적과 합하여 1차적으로 7십반을 재배하여 1단보에 수확향 3백접 · 접당가격은 현시가 4백원 상당으로 그 소득액으로 8백4십만원의 수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둘째로는 잡업증산이다. 상전은, 기히 조성된 상전과 합하여 70년도 부터 75년도까지 3십단보를 조성 연중 9십만원의 수익을 올려 주민소득에 중점 할 것을 추진중이다.

앞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계획된 본 이(里) 자력개발사업들이 제대로 완공을 보게 된다면 1970년대에는 호당 연중소득이 8십만원으로 증가되어 잘 살 수 있는 마을이 될 것을 확신하며 당국의 편달을 원하는 바이다.




설명 : 지방행정, 19권, 198호, 시작쪽수 32p, 전체쪽수 4p  

원저작자 : 전남고흥군금산면신금리  

저작시기 : 1970.01

발행기관 : 대한지방행정공제회

출처 : http://km.naver.com/list/view_detail.php?dir_id=80805&docid=317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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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1월

신금마을

  • ?
    최보기 2004.12.07 11:39
    국민학교를 들어가기 전인지 1학년 땐지, 그러니까 1970년인지 1969년 이전인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안나지만 그때 동네 청장년 어른들이 날이면 날마다 "밴또 싸서 부역 나오시오~~"하는 동각 이장님의 방송과 함께 한 집에서 한 사람씩 무조건 나가서 방파제를 쌓는 일을 엄청나게 오랫동안 계속했다.

    그때 신금에 있는 장비라고는 삽, 괭이, 쪽배, 그리고 사람의 손이 전부였다.
    방파제를 쌓는 동안 우리같은 조무래기들은 난포(다이나마이트) 튀는 소리가 너무 신기했다.
    주로 차돌배기 바로 위에 산벼랑에서 난포를 튀었는데 돌에 한참 구멍을 뚫은 후
    아이들을 멀리 떨어지게 한 뒤 "난포야~~~"하면서 스위치를 누르면 꽝~~하면서
    돌들이 굴러 내렸다. 어른들은 그돌들을 손으로 날라 바다를 메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돌배기 벼랑뿐만 아니라 배를 타고 멀리 석교쪽으로 돌을 실으러 배들이 줄줄히 노저어 다녔다. 꼭 해전에 나서는 군함처럼 일렬로 서서 멀리 사라지는 배들을 한없이 쳐다보곤 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때 부역 나간 사람들에게 돈을 조금 주었던 모양이다. 둘째 형님께서 주로 우리집 대표로 부역을 나가셨는데 어느날 부역나간 돈으로 샀다면서 똘똘이에서 개를 한 마리 사왔다. 그 개가 내가 이전에 말했듯이 금진 테레비 구경갔다 오니 쥐약 먹고 죽었다는 '에스'였다.
    지금 그 형님이 53 세 이시니까 아마 그때 19살이나 20살 정도였을 것 같다.

    지금 신금 방파제는 바로 이분들, 지금 50대 60대 70대 80대 어르신들이
    맨손으로 돌을 하나씩 바다에 던져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긴 방파제를 만드는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으며 얼마나 많은 땀을 바쳤겠는가. 구체적으로 얼마나 걸렸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당시 방파제 구축을 진두지휘했던 이장님은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당시에는 무척 젊었고 마을에서 상당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계셨다. [거금도]님이 올려놓은 [그시절 추억의 사진], [가족]코너에 [을해생 아부지 갑장분들] 사진 뒷줄 맨 왼쪽에 검은테 안경쓰신, 상당히 지적으로 생기신 분이 그때 그 이장님으로 보인다.

    그러니 방파제에 앉아 밤에 별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실 양이면 이 어르신들의 땀과 피를 꼭 한 번은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지길 바라며, 그런 의미에서 바닷가라고 아무데나 방뇨하는 걸 삼가하시길....

    (1963년생으로 작년 여름쯤 이 카페에 썼던 것 다시 복사해둡니다.
    거금도군은 겁나게 감격스런 자료를 꾸쩍시런데서 잘도 찾어왔네. 고상했네.)
  • ?
    촌놈 2011.12.12 18:26
    최보기 님에게 달린 댓글

    사진을 보면서 어릴때 아버지와 했던 추억들을 생각 하면 눈물이 흘러 내릴것만 같습니다. 

     

    저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사진 속에 아버지 사진....

     

    무척이나 보고 싶었습니다..아버지의 추억의 사진 올려 주신분께  정말 감사 합니다

  • ?
    복이 2004.12.08 01:43
    그걸 못참고 또 사진 가져다 넣어 줬네?
    탱큐포유어카인니즈.
  • ?
    이재원 2004.12.08 11:31
    보기 행님
    로마제국이 하루아침에 이루워진 것도 아니겄고,이루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희생과 피와
    땀을 필요로 했을까라.일반 국민들에겐 그 독재자들은 분명 악의 무리들이었을건데,
    그 후세들은 가만히 앉아 관광수입을 짭짤하게 올리고 있지라잉
    그와 마찬가지로 신금 어르신들이 이루어 놓은 방파제에서 그 다음 세대들은
    세월아 네월아 하고 달과 별을 안주삼아 풍류를 즐겼다는 것이제라잉!!!
    그러니까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가 어디 있겄소
    결론은 금진 아그들이 거기까지 놀러가서 방뇨를 했다는 것인데,누군지는 말 안할라요
    나는 절대 안한 걸로 기억하는데............어르신들의 노고를 쭈-욱 잊지 맙시다.

  • ?
    울산댁 2004.12.09 00:10
    거금도님 안녕하세요?
    거금도님 덕분에 경상도 보리문둥이들한테
    우리 고향에 이런 곳 있다 큰소리 치면서
    움~메 기살아!!~~^&^*
    하며 삽니다.
    감사합니다. 복 많이 받으시고 날마다 행복하세요.
    감기도 조심하시구요...

    그라고 복이님!
    오리지날 토종빵 거금도 말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들빵구리' 뜻은 잘 모르겠네요.
    부탁합니다.,
  • ?
    복이 2004.12.09 00:22
    씨름할 때 상대방 두 다리 사이에 오른 무릎을 끼운 후
    샅바를 끌어땡기면서 상대방을 들어올려 확 자빨새 버리는 기술인데
    대충 "들어메치기"를 어렸을 때 들빵구리라 했던 것 같습니다.
    영운 감독.
    맞는지 확인해주소.
    그리고 "넉장구리"라고도 있었는데 그것은 어깨위로 상대방을 걸쳐서
    거꾸로 내리 꽂아버리는 "업어메치기"아닌가 싶네요.
  • ?
    무적 2004.12.09 09:23
    보기님의 설명 중 (확 자빨새 버리는) 것을
    (내 꽂아 버리는)으로 바꾸면 100점이제!
  • ?
    울산댁 2004.12.09 09:33
    아 그렇군요!!~~
    난 또 설명 듣기 전에는 대충
    본인이 방뇨한 그 샛감도리 바다에
    집어 던짐을 당해서 짠물 먹으면서 오르락내리락 하나
    그렇게 짐작을 했습니다.
    물어 보기를 잘 한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 ?
    무적 2004.12.09 11:12
    시간이 없어서 암말 한할라고 했는디
    보기 같이 영리한 넘이 넉장구리를 저렇게 해설한 것은
    우리 금산 초딩 출신으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또 여기 거금도.컴에 마실다는 사람으로서도..........

    넉장구리는 (넉장거리)가 표준어로 그 뜻은
    '네 활개를 벌리고 뒤로 벌렁 나자빠지는 것'을 말함이니

    우리 어렸을 때 얼음을 지치거나 할 때 미끄러져
    어떻게 손 써 볼수도 없이 뒤로 '꽝'하고 벌렁 넘어지면
    "아이고, 허리 다리 파리 머리야!"가 바로 넉장구리란다.
  • ?
    김태성 2004.12.18 17:52
    우리집 보이네요 얼마전 갔다 왔는데 사진으로 보니 또 가고 싶습니다
  • ?
    영운 2004.12.22 11:02
    위 사진본께로 아부지 친구분들 금진,신금 을해생 갑장 입니다.사진은 광주사직공원앞뜰,배경은 뒷쪽 무등산이고,산 아래 조선대학교가 보입니다. 아부지 친구분들께서 세월의 무게을 이기지못하고 한분 한분 세상을 등지고 있습니다.고인분들께 삼가명복을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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