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하수2015.07.03 17:49

4세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혼자 바둑을 깨우치는 게 어떻게 가능했나.

 

"나도 궁금하다. 아버지가 바둑 두는 걸 우연히 보고 '포위되면 죽고, 집을 내면 산다'는 걸 깨달았던 것 같다. 음악 분야에서도 스스로 깨치는 신동이 있지 않나. 나도 그런 경우가 아니었을까."

 

집중 시간이 짧은 어린아이가 바둑에 몰입할 수 있었던 건 승부욕 때문이었나.

 

"이기고 싶다기보다는 강해지고 싶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간단히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어린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하루에 4시간이든 6시간이든 공부를 한다. 그중에서 본인이 좋아하는 과목이 생기면 몰두하고, 전교 1등도 하는 거다. 내 경우엔 좋아하는 과목이 바둑이었던 셈이다."

 

소년 프로기사의 탄생 소식에 후원자들이 열광했다. 바둑계 원로 이학진이 조훈현의 일본 유학을 추진했다. 196310월 조훈현은 일본으로 떠났다. 항공료는 조선일보사에서 부담했다. 조훈현의 일본 스승은 당시 74세였던 세고에 겐사쿠(1889~1972). 현대 일본 바둑을 태동시킨 영웅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조훈현은 세고에의 마지막 내제자로 9년간 그와 함께 살았다.

10세 때인 1963년 조선일보에 일본 유학 소식을 알린 소년 기사 조훈현’/ 조선일보 DB 재일교포 후원자가 인사치레로 입문을 청했는데 세고에가 두 판을 둬 본 후 제자로 삼았다고 들었다. 세고에로부터는 뭘 배웠나.

 

"바둑보다는 마음가짐을 배웠다. 선생님은 내게 '고수가 되기 전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하셨다. 사람이 되기 위해선 인격, 인성, 인품을 모두 갖춰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선생님이 금한 내기바둑을 두었다가 파문당할 뻔한 적도 있다. 어릴 땐 계속 '사람이 돼라'고 하시길래 속으로 '내가 사람이지 그럼 짐승이야' 하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선생님의 뜻을 알겠다. 잔꾀를 쓰는 프로기사들이 추락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정상의 무게를 견뎌낼 만한 인성이 없으면 잠깐 올라섰다가도 곧 떨어지게 되더라."

 

세고에는 제자를 평생 딱 세 명만 받았다. 세계 바둑의 흐름을 바꿨다고 평가받는 중국의 우칭위안과 일본의 바둑 천재 하시모토 우타로, 그리고 조훈현이다.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다. '이류는 서러워. 쿤겐(훈현의 일본식 발음), 네가 이 길을 가기로 했다면 일류가 되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인생이 너무 불쌍해.' 선생님이 제자를 단 세 명밖에 받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불쌍한 인생을 만들까 봐 오직 일류가 될 사람만 뽑아 받으신 거다."

 

세고에는 1972년 조훈현이 병역 문제로 귀국한 지 4개월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친구와 후배들 앞으로 남긴 유서에 "한국으로 떠난 조훈현을 꼭 일본으로 다시 데려와 대성시켜주기 바란다"라고 적혀 있었다.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브라우저를 닫더라도 로그인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로그인 유지 기능을 사용할 경우 다음 접속부터는 로그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게임방, 학교 등 공공장소에서 이용 시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으니 꼭 로그아웃을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