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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2015.06.29 18:14

바둑은 '사유(思惟)의 승부' 아닌가. 나이를 먹을수록 오히려 수를 내다보는 사유도 깊어질 텐데 젊은 사람에게 밀린다는 게 이해하기 힘들다.

 

"(웃으며) 나도 이해가 안 간다. 예술에선 연륜이 중요하겠지만 바둑엔 묘하게 체력적인 게 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승부를 내야 하기 때문에 그 시간 안에 자기 안의 모든 걸 끌어올릴 수 있는 체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것도 나이가 들수록 힘들다. 10대 땐 스펀지로 빨아들이듯 받아들이고, 20대 때 절정에 오르게 된다. 이후론 머리가 잘 안 돌아간달까, 좀처럼 쌓이지 않는다. 나만 해도 옛날엔 신수(新手)가 나오면 혼자 터득했지만 요즘은 후배한테 물어봐 익힌다. 그런데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정신력도 차이가 난다. 10대 땐 꿈속에서도 바둑 생각밖에 안 한다. 그런데 20대가 되면 어디 그런가. 술 생각도 나고, 돈벌이 걱정도 해야 하고. 거기다 데이트라도 하게 됐는데 상대 여성이 예뻐 봐라. '내일 또 만나야 하나, 어떻게 잘해줄까' 생각하게 되는 게 청년으로서 당연한 게 아닌가. 100% 바둑에만 전념하는 사람과 다른 생각 할 것이 많은 사람이 맞붙는다면 나이가 어리더라도 집중하는 사람이 이기게 돼 있다."

 

그래도 모든 타이틀을 다 빼앗기고 나자 오히려 홀가분해졌다고 했다.

 

"살려고 그랬겠지. 계속 고통과 분노에 싸여 있으면 죽는 길밖에 없으니까 마음을 그렇게 먹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 바둑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랬을 거다. 창호한테 졌다고 해서 내가 평생을 바친 바둑을 두고 딴 길을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돌이켜보면 당시 그렇게 마음을 먹은 것이 내게 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곤란한 상황에서 '나는 안 돼' 하고 좌절해 버리면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내가 당시 '나는 끝이야' 했다면 인생이 망가졌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따는 일만 남았다'라고 마음을 바꿔 먹었기 때문에 재기가 가능했던 것 같다."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건가.

 

"그렇다. 막상 다 잃어버리고 나니 자유로웠다. 무관이 된 후 예전보다 더 열심히 대회에 나갔다. 1996년 한 해에만 110국을 치렀다. 사흘에 한 번꼴로 바둑을 둔 셈이었다. 예전처럼 타이틀 방어자로 꼭대기에서 도전자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본선부터 시작해 토너먼트를 모두 거치고 올라가야 했다. 예전에도 이기고 지는 걸 반복했지만 승패에 정말로 초연해진 건 바로 이 시점부터였다. 수많은 판을 싸우면서 나는 내가 언제든 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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