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달인2015.04.21 14:42

7. 오청원(吳淸源)의 치수고치기 10번기(7)

치수고치지 10번기는 무예자의 진검승부와 같은 것이었다. 가혹했다. 진검승부란 한번 무너지면 가면을 빼앗긴 프로레슬러처럼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운명의 치수고치기에서 패하게 되면 대등했을 터인 상대방에게 뚜렷하게 한단의 격차가 생기고 맞수시합을 둘 수 없게 된다. 그간 쌓아온 명예는 상처가 나고 또다시 치수고치기를 하지 않는 한 바둑계의 일인자 자리는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실제로 재승부란 거의 불가능하므로 1회 한도의 필사적인 승부다. 특히 기계 일인자를 다투는 치수고치기 시합에서 승자는 대단한 명예를 얻는 반면 패자는 그것으로 기사생활을 마감하는 경우가 흔하다. 고래로 바둑계의 제1인자의 지위인 명인기소(名人碁所)를 정하는 대국은 단 한 번 만인 치수고치기로 10번기, 20번기를 행하는 일이 많고 대국자는 목숨을 걸고 반상의 사투를 벌여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에도 시대에 있어 혼인보(本因方), 야스이(安井), 이노우에(井上), 햐야시() 4대 문파에서는 명인기소를 다투는 치수고치기 승수는 언제나 심각하고 피비린내 나는 것이었다.

 

단차(段差)에 의한 치수라든지 치수고치기가 바둑계 관습에서 없어지게 된 것은 혼인보 슈사이가 은퇴하며 세습 명인제도가 폐지되고 그 후 모든 타이틀전에서 따르도록 한 다음부터다.

400년의 바둑역사를 본다면 극히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치수고치기 10번기는 본질적으로 종래의 치수고치기와 다를 바 없다. 기사생명을 건 살과 뼈를 깎는 매치였다. 특히 요미우리라는 단골간판으로서 10번기를 둔 10년은 글자 그대로 배수의 진이었다. 일본기원의 뒷받침이 없어 10번 승부에서 패한 중국인 오청원을 일본 바둑 팬들이 알아줄 리 만무했다. 좌우간 치수고치기 10번기는 (, 진검승부의 두려움?) 두어본 사람이 아니면 모를 것이다. 지금 기사들은 그런 것이 사라져 다행일 것이다. 현재 타이틀전은 한두 번 져도 명예에 상처가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치수도 달라지지 않고 몇 번씩이나 도전할 기회가 있다. 타이틀 수도 많고, 누가 강한지 뚜렷한 순위를 매기는 것도 없다.

 

오청원은 즐겨 10번기를 둔 것은 아니다. 1939년 기다니와의 10번기를 효시로 1955년 다가카와까지 당대 최고수를 상대를 해서 실로 10, 100국 가까이 치수고치기 십 번기를 두었다. 이것을 가지고 '오청원의 치수고치기 10번기'라 부르고 있다. 사실 이 치수고치기 10번기 만큼 당시 처절한 맛이 있던 것은 없다. 뭐니뭐니해도 "일본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므로 세상의 눈은 정상에 있는 두 사람에게 집중된다. 두 사람은 생활을 걸고 명예를 걸고 돈까지 건다. 보는 사람은 손에 땀이 차고 한 점 한 점에 껑충 뛰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한다. 이토록 스릴 있는 건 없다. 현재의 승부 형태로 정착되어 있는 7번 승부도이 점에서는 10번기의 발바닥도 미치지 못한다. 그 처절함은 짐작하리라.

 

19399. 오청원의 최초의 10번기가 치러졌다. 기다니 7단과의 10번기. 오청원이 활약하던 나이는 아직 20. 기다니도 갓 스물을 넘은 한창 나이로서 둘 다 신진기사. 특히 건장사에서 벌어진 제1국은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대국으로서, 1933년의 홍인보 슈사이 명인에게 신포석으로 대항한 일국과 함께 오청원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바둑이다. <계속>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브라우저를 닫더라도 로그인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로그인 유지 기능을 사용할 경우 다음 접속부터는 로그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게임방, 학교 등 공공장소에서 이용 시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으니 꼭 로그아웃을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