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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인2015.04.10 12:54

오청원이 12세 되던 여름. 일본으로부터 이와모토 6, 고수기 4단 일행이 방중한다. 그때 이미 오청원은 북경의 소년강자로서 이름이 자자했으니 당연히 그들에게 오청원은 소개되어지고 지도대국을 받게 된다. 이와모토는 1940년대 중반 하시모토 우따로와 함께 일본 바둑계의 거성이 되는 인물로 지금으로 치자면 단순 보급기사가 아니라 혁혁한 토너먼트 프로였다. 1902년생으로 오청원보다는 12년 연상의 장형. 그때 처음으로 일본의 프로기사와 대국하게 되는데 이와모토 6단에게 오청원은 석 점을 놓고 2연승, 두 점을 놓고 2집 패배를 당한다. 그리고 고수기 4단에겐 두 점 바둑에서 이긴다. , 일본의 프로와 두 점 치수라는 실력평가를 받게 된다. 일본 정상 프로와 두 점 치수라... 이때 오청원이 거둔 성적은 혁혁한 것이었고 일본 내에서도 중국의 천재소년을 불러들이자는 여론을 형성하게 만든 기폭제 역할을 한다. 물론 그로부터 오청원이 막상 일본으로 건너갈 때까지는 2년이 더 소요되며 스승이 되는 세고에와는 그동안 무려 50여 통의 서한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세고에는 마지막 제자로서 한국의 조훈현을 택한다. 세고에의 제자 중 또 한 명은 하시모토 우타로. 따라서 이 세고에는 한3국의 최고수급인 오청원, 조훈현, 하시모토 우따로 등 세 사람을 동시에 거느린 행복한 기사였다. 그가 오청원의 기예를 알아듣고 얼마나 그에게 러브 콜을 했는지 증명해주는 것이 바로 50여 통의 편지다. 그런데도 2년이나 시간이 소요된 건 소개하는 측에 좀 소극적인 인사들이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기원의 부총재인 오오쿠라 남작은 2년 동안 월 200원의 생활비를 보증했고 2년 동안은 확실하게 재능을 뒷바라지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또 다른 측에서는 오청원의 몸이 쇠약하다든지 날로 험악해져가는 중일관계의 장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한쪽에서는 오청원을 대대적으로 환영하였지만 또한 쪽에서는 주저하는 일이 생겨 2년의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1927년이 되자 오청원은 북경의 기사 중 일인자가 된다. 그 해 여름 일본에서 또 다른 프로기사가 찾아오는데... 이노우에 5단이 북경을 찾아온 것이다. 당연히 북경 최고수 오청원과의 대국이 빠질 리 없고 두 점으로 맞선 오청원은 완승을 거두고, 다시 정선으로 세 판을 두어 111패를 기록한다. 당시 일본에서 4단 이상은 고단자로 불렸고, 고단자와 정선으로 두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북경에서는 놀랄만한 일이었다. 프로기사가 그것도 고단자인 이노우에가 정선으로 바둑을 두어 주는 것은 획기적인 일로 그 대국은 이노우에의 결단이 돋보인 대목이었다. 훗날 이노우에도 자신이 정선으로 오청원과 두기로 한 건 대단한 식견이었다고 자랑했다. 어쨌든 이노우에와 정선으로 111패를 기록했다는 사실은 오청원의 실력을 가늠하는 단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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