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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인2015.04.09 10:47

2. 오청원(吳淸原)의 치수고치기 10번기(2)

 

1920년대의 중국은 프로제도가 당연히 없었다. 따라서 권력자가 내놓은 약간의 돈을 상금으로 삼아 지역 고수들이 몰려들어 일종의 대회를 치르는 형식이 잦았다. 당시 오청원의 이모부는 오청원이 바둑의 세다는 소식을 전했고 흔쾌히 북경의 장군은 그를 받아들인다. 지금으로 치자면 권력자의 녹을 받는 장학생이 된 셈이었다. 그 장군에게는 오청원이나 여러 바둑꾼들이 대국을 해주기도 하고, 자체적으로 대회를 하면서 장군을 즐겁게 하는 일이 주 업무였다. 오청원은 그 당시 중국에서 한 달을 여유 있게 생활할 수 있었던 정도의 보수를 받았다.

부친의 죽음으로 가세는 급격히 기울고 집안 가재도구까지 내다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나 오청원이 가져오는 장학금 탓에 오청원의 가정은 금세 복원될 수 있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부친이 가르친 그 바둑으로 인해 오청원이 졸지에 가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오청원이 시대를 새롭게 창조할 인물로 인정되기엔 많이 모자랐고, 북경을 벗어나 새로운 무대로 나가는 데에도 시간이 약간 더 걸렸다. 그런데 장군의 수하에 들어간 지 1년도 채 못돼 그 장군은 실각하고 오청원에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온다. 지금으로 치자면 상금을 따낼 수 있는 대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오청원은 거기에 참가하는 일이 잦아들기 시작한다. 북경에는 청나라 때 조성된 큰 공원이 세 개 있었는데 당시 그중 두개의 공원에는 바둑판을 마련해둔 가게가 있었다. 따라서 북경의 바둑 팬은 두 가게에 집중적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는데, 거기에는 가끔 부자들이 상금을 걸고 선수들을 불러 모아 대회를 열곤 했다. 오청원은 그를 돌봐주던 장군이 사망하자 자연스레 그 공원의 대회에 자주 끼게 되었고 연전연승하여 푸짐한 상금과 상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아마추어 대회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도 독식하다 보면 상당한 재물이 되곤 했다. 가세가 기운 오청원의 입장에선 그만한 복도 없었다고 할 것이다. 사실 그곳에서의 연전연승이 북경신문에 오르락내리락 거리게 했고 그때부터 오청원은 제법 기재가 있는 소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러다 일본인 클럽에서도 소문이 자자하게 나게 되자 오청원의 주변에서는 오청원과 일본인 중 센 선수와 맞붙이는 등 일종의 이벤트가 성행하기도 했다. 신동 오청원을 보기 위해, 그가 나이든 일본인 아마추어 기사를 혼쭐내는 모습을 즐기려고 일부러 대회를 만들기까지 했으니 가히 오청원은 날개 돋친 천리마처럼 기재를 키워나갔다. 당시 구경꾼 중에 한 프로모터가 있었으니 그가 훗날 일본인 스승이 되는 세고에 겐샤꾸에게 북경의 천재소년오청원을 알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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