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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인2015.03.31 13:26

바둑계에선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절대자가 바로 오청원이다. 그의 위대함에는 승부사로서의 업적과 바둑관의 비약적 확대에 힘쓴 구도자로서의 양면이 모두 포함된다. 오청원의 승부사로서의 업적을 헤아려보면 무엇보다 치수고치기 10번기 시리즈를 빼놓을 수 없다. 지금처럼 상금을 건 타이틀전이 드문 시절, 그리고 단위(段位)가 엄하게 존중되던 시절, 오청원처럼 젊은 기사가 기량을 맘껏, 그것도 타국 땅에서 펼쳐내기란 무수한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청원은 그의 생애 중 하이라이트였던 십 수 년을 이른바 승부 바둑의 극단, 치수고치기로 화려하게 장식했으니 승부사도 이런 승부사가 일찍이 없었다.

오청원은 1939년부터 1955년에 걸친 무려 17년간의 11번의 치수고치기 10번기에서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세출의 천재를 상대를 전부 하수급으로 전락시킨 기막힌 승부사였다. 또 그의 바둑사적 업적에서 결코 빠지면 안 되는 것은 바로 포석이라는 새로운 혁명이었다. 1930년대 초반 기다니 미노루(木谷 實)와 함께 현대바둑의 효시가 될 업적 신포석을 개발하였으니 그 업적은 바둑의 무궁무진한 세계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비밀을 캐어낸 위대한 금자탑이었다.

 

신포석! 그렇다. 새로운 포석. 즉 새로운 바둑이라는 뜻이었다. 젊은 바둑꾼 오청원은 화점 삼삼 천원을 삼각편대로 형성하는 독특한 포진을 선보였다. 특히 천원이란 곳은 바둑판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중심점으로 당시 바둑가에선 착수를 금기시할 정도의 신성불가침에 해당하는 곳. 바로 그 옥쇄를 풀어헤친 이가 오청원이며, 그 정신적 기반에서 현대 포석이 속도와 중앙 중시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중국 복건성에서 태어난 오청원은 이름이 천(), ()가 청원(淸原)이었다. 6남매의 3남으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부친은 동경제국대학을 국비 유학생으로 졸업했던 재원이며 유학 후 북경의 최고재판소에서 일을 했을 정도의 엘리트. 오청원의 바둑 인생을 송두리째 결정지은 이는 물론 부친이었다. 오청원의 부친은 일본 유학시절 일본의 뭇 프로들과 어울려 기력연마를 도모했을 정도의 열성 바둑 팬. 그는 손수 오청원을 비롯한 자식들에게 바둑을 직접 가르쳤다. 오청원의 부친은 엄한 교육을 자식들에게 시킨다. 일찌감치 오청원의 3형제를 문관시험에 나가게 하기 위해 가정교사를 붙여 개인지도에 들어갔다. 아예 소학교에는 보내지도 않았다. 그런 부친의 열성은 급기야 바둑으로 옮아오게 됐는데, 가장 먼저 규칙을 설명했고 곧장 기보를 마련해 두게 했다. 애당초 3형제에게 모두 바둑을 가르쳤으나 제일 어린 오청원이 기재를 보이자 오청원에게만 스파르타 훈련을 시키게 된다. 오청원이 살아있는 기성으로 추앙 받은 것도 알고 보면 부친의 지독한 권유에 의한 것이니, ‘천재는 만들어지는 것일까.’ 필자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하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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