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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2015.03.13 13:19

21. K 9단과 주전자

 

 

바지도 제대로 꿰지 못한 채 문 앞에 쓰러져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1997년의 일이다.

당시는 이창호 천하였고, 스승 조훈현과 눈만 떴다 하면 도전기를 벌이던 시기였다. 이야기의 배경은 전남 광양제철소. 제철소의 기우회가 제31기 왕위전 도전기를 유치해 대국자인 이창호·조훈현 사제와 몇 명의 프로기사, 한국기원 관계자 등이 제철소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지방의 애기가들은 평소 흠모하던 프로기사를 직접 만나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만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이창호·조훈현은 최고의 프로기사들이고 도전기의 주인공인 만큼 스타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원로기사인 K 9단의 인기 역시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올드팬 사이에서는 K 9단의 인기가 두 주인공을 압도할 정도였다. 게다가 K 9단은 소문난 호주가. 이런 그를 지방의 애기가들이 그냥 놔둘 리 없었다. 기우회원들은 대국이 끝난 저녁, K 9단과 서울 일행에게 상다리가 휘어지는 남도 정통 한정식과 함께 술을 대접했다. K 9단의 고향 역시 남도지방인지라, 그와 애기가들은 향우회라도 벌이는 기분으로 배가 터지고 코가 비뚤어지도록 먹고 마셨다. 밤이 이슥해 잔치는 파하고, 서울에서 내려간 일행은 벌겋게 취한 채 숙소인 광양제철소 영빈관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로비에 매실주부터 고급 양주에 이르기까지 각종 술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프로기사들 중 주당이 많다는 소문을 들은 기우회측의 배려(?)였다.

 

다음날. 상경을 위해 집합하기로 한 오전 9시가 되었건만 K 9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국기원 직원이 K 9단의 방으로 인터폰을 하니 그제야 일어난 듯 잠긴 목소리로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곧 나가지라고 했다.

하지만 20분이 지나도 K 9단은 감감무소식. 로비에 있던 한국기원 직원 한명이 결국 마스터키를 받아 K 9단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것이 웬 변고인가. 바지도 제대로 꿰지 못한 K 9단이 문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사건의 재구성은 이렇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잠이 든 K 9단은 아침 9시에 직원의 전화를 받고 깨어났다. 바지를 입다가 목이 말랐던 그는 테이블 위의 주전자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마셨고, 잠시 후 쓰러져 버린 것이었다. K 9단이 애주가라는 소문을 들은 기우회에서 친절하게도 주전자에 지방 특산 소주를 담아 놓았던 것.

이리하여 결국 K 9단은 한국기원 직원의 등에 업혀 공항으로 가야 했다는, 참으로 황당하면서도 웃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이 탄생하게 되었다.

 

(옮긴이 주 : 이야기의 주인공인 K 9단은 김인 선생님이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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